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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Aug 08. 2020

산 지미냐노 - 중세의 마천루와 빨간우비

방구석 드로잉 여행 16

  아침부터 바람이 부는 것이 심상치 않다. 창밖을 보니 하늘 한구석에는 비를 몰고 올 것 같은 시커먼 구름도 보인다. 게으름에 핑계를 대기 딱 좋은 날씨이긴 하지만 조금 늦은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선다.


  산지미냐노는 피렌체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전날 저녁에 즉흥적으로 가보기로 결정을 했다.


  구불구불한 이태리의 시골길을 달리며 여유로운 여행을 하고 싶은 분에게 렌트카 여행을 추천한다. 3명이나 4명 정도 렌트카로 여행을 하면 경비도 절감될 뿐 아니라 즉흥적으로 가고 싶은 곳이 생기더라도 훌쩍 떠날 수 있는 장점을 누릴 수 있다.           




  네비게이션을 따라 피렌체에서 1시간정도 느긋하게 운전을 하다보면 어느새 마을 입구의 주차장에 도착해 있다. 마을 안으로는 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날씨 탓인지 주차장이 한가하다. 주차를 하고 CENTRO라고 쓰여 있는 화살의 과녁판처럼 되어있는 표시를 따라 걸어 올라가다보면 성곽의 문이 보인다. 이 문을 지나는 순간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이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다.


  마을은 잘 보존되어 있고 아기자기한 공예품을 만드는 상점들이 아직도 옛날 방식을 고수하면서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그마한 마을이기 때문에 서둘러 봐야할 일도 없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공방, 금과 은으로 아름다운 장신구를 만들고 있는 공방, 작은 갤러리도 있으니 천천히 느긋하게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토스카나 지방이야말로 슬로우시티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지역이 아닌가?



  산 지미냐노는 중세시대 로마로 가는 순례자들이 지나가던 요충지였다. 성지순례는 중세시대 가장 중요한 사업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종교가 모든 가치의 기준이던 시대였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게다가 이태리 사람들의 장사수완이 어디 하루 이틀에 완성된 것이겠는가? 산 지미냐노는 이를 바탕으로 상당기간 번성을 누렸다. 당당한 성벽과 성벽 안 마을의 규모와 상태를 보면 많은 부가 축적되었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축적된 부가 골고루 주민들에게 분배되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고 산 지미냐노의 유력한 두 가문에 집중되었던 모양이다.


  두 가문은 경쟁적으로 높은 탑을 만들면서 우위를 과시하려 하였고 한 때는 이 작은 마을에 70개가 넘는 탑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14개가 남아 있다. 높은 것을 욕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이 본성은 근대를 거쳐 현대로 넘어와서도 변하지 않고 세계 곳곳의 도시에서 경쟁적으로 마천루를 건설하고 있다.   


  산 지미냐노의 쇠락은 흑사병의 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전염병은 인적 물적 교류를 억제하였고 마을은 박제가 된 것처럼 성장과 활력을 멈추고 피렌체 공화국의 보호를 받게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잘 보존된 성내의 골목길과 성당 등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 되었고 지금은 순례자 대신 관광객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들어온 입구를 지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걷다 보니 또 다른 입구가 보인다. 입구 밖에서 보고 싶은 생각에 성문 밖으로 나가니 반가운 사람들이 있다. 어반스케치를 즐기는 그림쟁이들이다. 현장에서 취미로 그림을 즐기는 모임이라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의외로 이런 분들이 많다. 사진 한 장 달랑 찍고 돌아서는 대신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듯이 스케치북에 천천히 자기만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대장님처럼 보이는 분께 양해를 구하고 나도 주섬주섬 여행용 키트를 꺼내 놓고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어반스케치를 하시는 분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언어가 쉽게 통하지 않더라도 그림이라는 공통주제가 있으니 거리감이 확 줄어드는 느낌이다.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시작과 끝을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라며 아쉬워하는 대장님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그림 그리는 일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모른다며 쉬지 말고 계속하다 보면 정말 재미있는 인생이 될 거라며 덕담을 건네며 엄마 오리가 아기 오리들을 데리고 가듯이 일행을 데리고 사라진다.                            


  마을의 볼거리는 두오모와 피아짜(성당과 광장)이지만, 진짜 볼거리는 성곽주위로 보이는 푸른 토스카나의 낮은 구릉과 언덕들로 이어진 풍경이다. 산 지미냐노가 위치한 곳이 주변보다 약간 높은 언덕이기 때문에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기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 보면 슬슬 시장기가 느껴진다.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식당으로는 ‘네 마리 고양이(Quatro Gatto)’가 있다. 가보았지만 이미 예약이 꽉 차있어서 자리가 없다며 주변의 다른 식당을 추천해준다. ‘이삭줍기’를 하고 있는 식당에 가서 무얼 시킬까 고민하고 있으니 오늘의 메뉴를 추천한다. 브루스케타와 파스타 그리고 와인 한 잔으로 이루어진 ‘Menu del giorno'. 기본은 하는 식당인 듯하다.          


  오후에는 골목길 이 곳 저 곳을 둘러본다. 골목 자체로도 훌륭한 예술품처럼 보이지만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골목을 지키는 작은 공방의 주인들이 없었다면 중세시대 촬영을 위한 세트장처럼 보일 뻔 했다. 심상치 않던 날씨는 드디어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비도 피하고 다리도 쉬어 줄 겸 카페에 들렸다.


  혼자 여행하는 동양인이 신기했던지 옆자리의 꼬마가 쳐다본다. 같이 쳐다보면서 웃어 주니 수줍은 듯 아빠 뒤로 가서 고개만 빼꼼이 내밀고 있다. 이 가족은 매년 이곳으로 휴가를 온다고 한다. 마을 외곽의 농장 민박(Agriturismo)에 묵고 있는데 진정한 토스카나의 분위기와 음식을 즐기고 싶다면 농장 민박이 최고라며 엄지를 들어 올린다. 오늘은 하루 일정으로 돌아가지만 다시 오게 된다면 농장 민박도 하면서 고즈넉한 토스카나 시골의 정취를 즐겨보리라.


  

  비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이 가족들은 숙소로 돌아간다면서 여행자에게 행운을 빌어주고 떠난다. 추적추적하게 내리는 비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느낌이다. 김광석의 노래 그리고 커피와 비라니······. 이런 조합은 매우 위험하다.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빨간 우비를 입고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황급히 카페를 나와 그녀가 지나간 길을 따라간다. 수없이 많은 불면의 날들을 보내면서 잊지 않기 위해 밤마다 그려 보았던 그녀의 뒷모습이다. 그런 그녀가 바로 내 눈앞에 있다. 달려가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야.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데. 그냥 지금까지 지내온 것처럼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짧은 순간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발걸음을 멈추고 멀어져가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마치 나무처럼 그 자리에 서있다. 각막은 비에 젖어 희미해지고 이제 더 이상 빨간 우비가 보이질 않는다. 비에 젖은 눈에 고인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가 없다.        

  여행지의 날씨는 무조건 맑아야 한다. 혼자서 여행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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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진흥원 2022년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어 고대하던 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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