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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Jul 30. 2020

칭퀘떼레- 그대에게로 가는 사랑의 길

방구석 드로잉 여행 13

  새벽의 피렌체 거리는 조용하다. 한낮의 소음과 사람들의 발걸음이 사라진 도시의 새벽은 색다른 느낌을 준다. 호텔에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까지 10분이면 도착하는 짧은 거리이지만 아침 공기가 꽤 쌀쌀해져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쓰레기통을 기웃거리던 고양이가 불안한 눈으로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고 있다.


  새벽의 거리와는 대조적으로 기차역 내부는 새벽을 여는 사람들로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다. 기차시간을 기다리면서 커피를 한잔 하는 사람, 신문을 보고 있는 사람, 아침의 피곤함 때문인지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사람 등 여느 도시의 아침풍경과 다르지 않다. 낯선 곳을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렌다. 낯선 냄새, 낯선 촉감들이 어디에선가 잠자고 있던 나의 세포를 깨워 낯선 상상으로 인도하게 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칭퀘떼레는 다섯 개의 땅이라는 지명을 가진 조그마한 마을 다섯 곳을 일컫는 말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묘하고 아름다운 마을들을 찾아서 몰려든다. 피렌체-피사-라스페치아를 거쳐 칭퀘떼레로 가는 길은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나를 보러 오려면 이정도 노력은 감수해야 해’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 마을들은 기차역으로 연결되어 있어 불편하지 않게 둘러 볼 수 있다.


  나는 이곳을 좀 더 온전히 즐기기 위하여 다섯 마을을 이어주는 해안 길을 도보로 걷기로 했다. 3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라스페치아 역은 벌써 여행객들로 분주하다. 칭퀘떼레 1일 패스를 끊고 나니 전체 구간 중 두 구간은 2년 전 비피해로 망가진 후 아직 보수중이라서 폐쇄되어 도보로 이동할 수 없다고 한다. 하는 수 없지. 나머지 구간인 몬테로쏘- 베르나짜- 코르닐리아 구간만 걷기로 계획을 수정한다.


  누가 해안 길이라고 했을까. 절벽 길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한 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진 곳이 많다. 행여라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미운사람)과 오면 큰일 날 것 같은 길이다. 살짝만 밀어도 천 길 낭떠러지로 그대로 직행할 것 같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와야 하는 곳인가 보다. 가족 혹은 친구처럼 보이는 여행객도 있고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연인들도 있고 아주 가끔 혼자서 걷은 사람도 있다. 흠, 다행이다.


  베르나짜를 내려다 보고 있는 아가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씩씩한 뒷모습을 봐서는 슬픈 생각은 아닐 듯하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잠깐 상상에 빠져본다. 오래된 연인들이 있다. 내 몸을 기억하는 오래된 소파처럼 푸근하긴 하지만 애틋하지는 않다. 여자는 어느 날 쪽지 한 장 남겨두고 여행지로 떠나 버린다. 남자는 이런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온한 생활이었는데,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여자의 빈자리가 점점 커져간다. 여자는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을 갖게 되지만 어쩐지 겁이 난다. 혼자 남은 남자. 짐을 꾸려 여자를 찾아 나선다. 여행지에 도착한 남자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지나다니는 광장의 한구석에서 가방에 걸터앉아 이제 여자가 지나가기를 턱을 괴고 기다리고 있다.     


  잘 만들어놓은 절벽 길을 따라 살짝 살짝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걷는 길은 정말 환상적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도보 대신 기차를 이용하는 탓인지, 아니면 피크씨즌이 지난 탓인지 길은 한가롭고 여행자들은 여유롭다.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힘내라고 격려를 하면서 걸어간다.

  길은 아무런 조건 없이 오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길에 있는 사람은 어느새 길과 하나가 되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길은 절벽을 가르고 올리브 숲을 지나 조그마한 마을의 골목길에 닿아 있다. 길은 다시 마을을 가로 질러 이윽고 또 다른 골목의 끝에 다다른다. 이 골목의 끝은 끝이 아닌 시작이 되고 길은 번잡함을 모두 떨어 버리고 한 가닥 실이 되어 또 다른 곳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만남 또한 그러하리라. 언젠가 끝을 맺어야 할 때도 있고 그 끝에서 다시 시작하여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수 없이 많은 밤들을 상념으로 괴로워하며 죽을 만큼 힘들게 보내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나는 게의 껍질 속에 들어 있는 연약한 살이었고 날카로운 부리에 의해 받은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유충이 고치 속에서 가늠하기조차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야 나비가 되듯이 구멍이 나버린 껍질 속에서 나와야만 했다. 이제는 단단한 껍질대신 말랑말랑한 살 속에 무너지지 않을 뼈대를 가져야만 하는 존재로 변해야만 했다. 상처를 쉽게 받겠지만 치명상을 입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존재.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를 변화시키고 나니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음을 알게 되었고 조심스럽게 다시 손을 잡고 함께 길을 떠날 용기가 생겼다. 이 길의 끝이 어디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고 이 길이 끝날 때까지 함께 걸어갈 것을 알고 있기에 힘들지 않을 것이다. 칭퀘테레의 길은 그대에게 가는 사랑의 길이다.


  



  코르닐리아에 도착해서 거리와 골목 구경을 하다가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커플과 다시 마주쳤다. 신혼여행 중이란다. 좁은 동네이니 동선이 같다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칭퀘테레의 마을들은 아기자기한 골목길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힘들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표정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에서 며칠, 아니 하루만이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코르닐리아에서 마냐놀라까지는 도보로 갈 수 없게 되어 기차로 이동을 한다. 마냐놀라와 리오마조레를 이어주는 도보 길은 사랑의 길로 유명하다. 오늘은 혼자였지만 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올 수 있게 되길 바라며 그 길을 조금 걸어 본다. 살랑 살랑 걸어도 되는 아주 편한 길이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온다. 과유불급. 너무 좋은 풍경도 지나치면 좋지 않은가 보다. 마지막 마을인 리오마조레는 생략하기로 하고 기차역으로 갔다가 그 커플을 또 만났다. 이 정도라면 더 이상 모른척하고 지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다가 사랑을 꽃 피운 커플이라고 한다. 둘 다 문화탐방에 관심이 많아서 신혼여행을 겸해 로마와 피렌체에 왔다고 한다. 앞으로 일 년에 한 번씩 한 지역에 집중하는 장기 계획을 세워 놓았다고 깨알 자랑을 하신다. 선생님이란 직업이 너무 부러워지던 순간이다. 피렌체 문화탐방도 인상 깊었지만 성당과 박물관, 미술관으로만 계속되는 일정에 조금 지루해져서 여기를 오게 되었다고 한다.


  하루정도 피렌체에  머물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며 여기를 오지 않았으면 어쩔  했냐며 하루 만에 칭퀘테레와 사랑에 빠진 표정이다. 하긴 둘이 같이 있으면 어딘들 사랑스럽지 않으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피렌체의 음식이야기까지 나왔다.(여기는 이태리이니까) 피렌체에 오면 티본스테이크를 먹어주어야 한다고 살짝 바람을 넣어 본다. ‘아니타 Anita’ 티본스테이크는 혼자 먹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크기이어서 마침  되었다. 와인  잔이 더해지고 선생님으로서의 고민, 직장인으로서 고민, 미래에 대한 고민, 상사에 대한 뒷담화 그리고 여행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다와 함께 피렌체의 밤은 깊어 간다.   


https://brunch.co.kr/@jinho8426/193

출판진흥원 2022년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어 고대하던 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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