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드로잉 여행 20
최근에 해외 유명 관광지에서의 버스킹을 소재로 한 ‘비긴 어게인’으로 베로나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듯하다. 특히 작은 공연을 했던 산 피에트로 성, 피에트라 다리는 너무 근사한 곳처럼 보였다. 이름만 들어도 멋질 것 같은 이곳을 정작 베로나에 까지 가서 너무 아쉽게도 가지를 못했다. 딱 좋던 날씨가 비가 오면서 갑자기 추워져서 무리하게 아이들을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스킹 공연 때문이 아니더라도 베로나는 이미 영원한 사랑의 대명사인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잘 알려진 도시이다. 현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안개로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의 날씨에도 줄리엣의 집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3일 밤과 낮 동안의 짧은 이야기이지만 목숨과도 바꾼 어린 연인들의 사랑이야기는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 남아 오늘도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었지만 정작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은 베로나 사람들이다. 이태리 사람들의 장사 수완은 너무나 창의적이다. 그럴듯한 집을 하나 물색해서 줄리엣의 집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탈바꿈시켰다. 줄리엣이 가공의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줄리엣의 집이 있을 리가 없지만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아름다운 거짓말을 더 좋아하는 듯하다.
아무렴 어떤가. 베로나에 오셨다면 꼭 방문하셔서 벽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쓰고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구속의 마법주문도 함께 남겨두어도 재미있는 추억이 될 듯하다. 내가 가본 곳 중에서 자유로운 낙서를 허용하는 유일한 장소이다. 물론 이곳에서도 연인들은 서로의 굳은 사랑을 약속하며 자물쇠를 채워둔다. 하지만 어쩌랴. 세월은 가고, 사랑도 가고, 또 다른 사랑이 오고, 젊은 연인들은 다만 오늘, 현재에 충실할 뿐이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줄리엣의 가슴도 한 번 만져보고 있다. 그래야 다시 베로나로 돌아올 수 있다나 뭐라나. 시크한 여행자라면 이런 것은 패스!
왜 사람들은 금지된 사랑의 매혹에 빠져드는 걸까. 파괴적인 결말이 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사랑이 올까 봐 무섭다. 불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상상을 할 때도 있지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아서 ‘바람을 피워 보라’고 권하는 아내의 소원은 아직까지 들어주지 못했다.
생뚱맞지만 베로나를 떠올리면 2015년 여름 한국에 와서 고생하던 이탈리아 기술자가 생각난다. 비니오라는 친구였는데 중국은 몇 번 갔었지만 한국은 처음이라고 했다. 중국에서의 기억이 좋지 않아서 한국에 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온지 하루 만에 한국이 좋아졌다고 너스레를 떤다. 길을 지나가는 아가씨들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예쁘고 구워먹는 돼지고기와 쪽갈비는 가히 환상적이며 마트에서 파는 과자들도 너무 맛있다고 하면서 하루 일과를 끝낸 후 즐기는 저녁식사와 밤 산책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이렇게 행복한(?)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아침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왔다. 배가 너무 아프다는 것이었다.
아프다는 사람에게 일을 시킬 순 없고 하루정도 호텔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는데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호텔직원이 전화를 했다. 배가 너무 아프다고 하소연을 하는데 꼭 담석이 생긴 사람처럼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어휴, 이건 또 뭔 일인가 싶어 급하게 병원으로 데려가서 이런 저런 검사를 해 보더니 담석이라고 오후에 초음파로 깨는 시술을 하자 하신다. 상황을 설명해도 비니오는 영 이해가 안 되는 눈치이다. 의사양반 쉬운 영어는 자기가 하고 어려운 설명은 나보고 하라고. 나도 영어 잘 못 한다구요. 손짓 발짓, 스톤, 팬크레아, 울트라소닉, 어쩌구 저쩌구. 간신히 이해를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딴 소리다.
오늘 시술 한다구! 소리를 버럭 질렀더니, 고개를 흔들며 ‘임뽀시블’이란다. 뭐가 불가능하냐 했더니 오늘 검사받고 오늘 시술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단다. 최소한 한 달은 기다려야 하는데 말이 안 된단다. 안되긴, 여기는 한국이고 너는 의료보험 대상자도 아니라서 병원에서는 오히려 더 좋아한다고 했더니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치이다. 살짝 얄미운 생각이 들어서 간호사 분께 엉덩이 주사 놀 때 힘껏 때리고 가능한 한 아주 아프게 놓아 달라고 했더니 키득키득 웃으시며 너무들 즐거워하신다.
우여곡절 끝에 시술을 모두 끝내고 호텔로 돌아왔더니 아이처럼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는 비니오. 야! 의사선생님이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말라 했잖아. 얼른 가서 자! 이렇게 전쟁 같은 하루가 지나고 비니오는 며칠 후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이탈리아에 가서 자기가 한국에서 겪은 일을 얼마나 자랑을 했던지 나중에 본사 출장을 갔더니 본사 매니저가 비니오 아빠노릇(?)까지 해주느라 고생했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비니오는 지금도 날 보면 멀리서부터 달려와서 꼭 인사를 하고 가곤 한다. 이 친구가 베로나 출신이다. 이탈리아에 오면 자기와 함께 꼭 베로나에 가서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 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매년 여름마다 아레나(원형경기장)에서 열리는 페스티벌로 베로나를 기억할 것이다. 로마의 콜로세오와 달리 베로나의 아레나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서 지금도 콘서트를 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한다. 여름밤 가벼운 식사거리를 챙긴 바구니와 담요 한 장을 들고 자리를 잡는다. 와인과 촛불과 오페라를 이천 년 전의 유적지에서 즐길 수 있다니 이거야 말로 시크한 여행이 되지 않겠는가.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대치의 보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로 만들려면 부지런히 예약도 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 일 년 전에 이미 모든 입장권이 매진될 테니 말이다.
베로나 시내 구경도 좋지만 근교에 가르다 호수를 가 보는 것도 좋다. 이태리에서 가장 큰 호수라서 볼만하기도 할 뿐더러 주변엔 가르다 랜드라는 놀이동산도 있고 캠핑장도 있어서 아이를 데리고 여행 중이라면 하루정도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아이들에게 성당 구경과 도시 구경은 사실 그다지 인기가 많은 여행코스는 아니지 않은가.
딸아이와 조카아이를 데리고 베로나를 간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이곳을 가장 좋아했었다. 엄마 아빠를 따라다니느라 힘든 아이들에게 하루 정도는 휴가를 주는 셈 치고 휴식을 취했더니 오히려 남은 일정을 더 수월하게 소화한 기억이 있다.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하는 날씨라서 그랬는지 사람들도 많지 않아서 별로 기다리는 시간 없이 아이들은 거의 모든 놀이기구를 섭렵했고 심지어 롤러코스터 같은 재미있는 기구는 몇 번씩 타기도 했다.
놀이동산 이곳저곳에는 무덤에서 나온 해골들이 오랜만의 자유를 즐기는 컨셉으로 핼러윈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조카아이는 엄마 아빠에게 선물을 사다 주고 싶다고 해서 기념품 가게를 들어갔는데 정말 신중하게 고른다. 거의 한 시간을 고른 끝에 조그마한 커피잔을 샀다. 딸아이는 별로 그런 거 없다. 광속으로 드라큘라 이빨과 인형을 고르고 나서는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칭얼거린다. 희한하게 아이스크림은 정말 신중하게 고른다. “어느 것을 먹을까요. 나를 당겨 주세요” 주문까지 외우면서 고르고 있다.
너무 신나게 즐긴 탓인지 아이들은 저녁을 먹으러 나가지 않겠다고 한다. 하는 수없이 햄버거와 콜라를 사 가지고 와서 호텔방에서 패스트푸드 파티를 하고 아이들은 오랜만에 먹는 자극적이고 익숙한 소스 맛에 행복해한다.
베로나는 남쪽으로는 볼로냐, 동쪽으로는 베네치아와 가까워서 하루 훌쩍 다녀올 수도 있고 북쪽으로는 남 티롤(South Tirol)의 산군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남 티롤은 대충 이태리 쪽 알프스라고 생각해도 될 산악지대이다. 남 티롤의 중심이 되는 도시인 볼차노까지도 그리 멀지 않다. 살인적인 물가로 악명이 높은 베네치아 대신 이 곳에 숙박을 하면서 이태리 북쪽 지역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도 재미있다.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나는 베로나처럼 작은 소도시에서 그냥 시간을 보내면서 지내는 것도 좋아한다.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을 싫어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주변으로 작은 강도 흐르고 언덕도 있어서 도시를 조망할 수도 있는 그런 곳을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이번 여행에는 언덕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조망을 놓쳤지만 대신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혼자 하는 여행은 오롯이 혼자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둘이 하는 여행은 자유를 둘로 나누어야 한다. 고로 자유로움은 고독과 맞닿아 있다. 누가 한 말인지 생각나지 않지만 가끔 혼자서 여행을 해야 하는 나에게 누가 왜 혼자 여행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럴듯한 핑계가 될 것 같아 기억해 두고 있는 말이다. 고독과 맞닿아 있는 자유로움이라니. 무언가를 얻으려면 다른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하는 우리의 인생과 닮아 있다. 이 간단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무리한 일, 하면 안 되는 일을 벌여 놓고 후회하고 힘들어하는 것은 아닌지 곰곰 생각해 본다.
혼자서 여행할 때는 그림도구를 챙겨가지고 다닌다. 그림도구라도 해봐야 고체물감이 담겨 있는 조그마한 팔레트, 펜, 물붓과 손바닥보다 조금 큰 스케치북이 전부이다. 사진으로 찍어 가서 방구석에서 그리면 될 일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화가는 아니지만 마치 화가인 듯 기분을 내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재미있고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줄 때는 왠지 기분이 으쓱하기도 한다. 아마 한국에서라면 하기 쑥스러운 일이라도 익명이 보장될 것 같은 이곳에서라면 할 수 있다. 그림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아이라도 보게 된다면 손에 붓을 쥐어주고 조금 그려보게 한다. 그림의 구석에 아이 이름을 써주면서 선물이라고 하면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여행의 기쁨을 선사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는 여행자에 대하여 선한 의미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아이를 데리고 여행하는 여행자에게 쉽게 호의를 보이는 것처럼 자기들의 도시를 그리고 있는 여행자에 대한 의심을 쉽게 거두는 경향이 있다. 혼자서 여행을 하는 것을 즐기는 여행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취미이다. 고독과 자유로움, 한 권의 책 그리고 그림도구는 나에게 있어 완벽한 혼자만의 여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즐기려고 조용한 카페에서 혹은 도시 한구석의 그늘 아래에서 조심스레 스케치북을 펴는 누군가를 상상해 본다.
https://brunch.co.kr/@jinho8426/193
출판진흥원 2022년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어 드디어 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