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경 Apr 05. 2024

잃어버린 사랑과 시간의 가치를 파헤치는 도굴꾼 신화

영화 <키메라> 리뷰, 해석 / 신작, 이탈리아 영화 추천


키메라 (LA CHIMERA, 2024)

잃어버린 사랑과 시간의 가치를 파헤치는 도굴꾼 신화


개봉일 : 2024.04.03.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132분

감독 : 알리체 로르와커

출연 : 조쉬 오코너, 알바 로르와처, 이사벨라 로셀리니, 캐롤 두아르테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잃어버린 것은 확실한 무언가를 찾아 땅을 파는 남자가 있다. 사랑과 지나간 시간, 어떠한 이유로 증발하듯 사라져버려 다시는 손에 쥘 수 없는 그것을 찾기 위해 남자는 습관적으로 누군가가 묻힌 묘지의 뚜껑을 연다. 실로 흉하고 애처로운 모습이다.


<키메라>는 잃어버린 연인 베니아미나를 찾아 헤매는 도굴꾼 아르투의 이야기다. <키메라> 또한 감독의 전작 <행복한 라짜로>의 주인공 라짜로처럼 현세와 전세, 두 개의 세상을 오가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영화는 그의 여정을 통해 두 개의 세상이 가진 보통의 의미를 보여주기도 하고 가끔은 그것을 파격적으로 뒤집기도 한다. 상당히 흥미롭고 가끔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이 영화는 도굴꾼의 로맨틱한 신화다. 도굴, 로맨틱, 신화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처럼 영화 안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짝을 이루고 있다. 따스함과 차가움. 이승과 저승. 진중함과 약간의 웃음. 일상과 신화. 이 상반되는 의미들 사이의 빈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사랑이란 미스터리다.


그리고 도굴꾼의 사랑과 더불어 중요시 다뤄지는 건 무덤 안에 함께 묻힌 물건들의 가치다. 오래전, 아르투가 밟고 있는 그 땅에 살았던 에트루리아인들은 죽은 이를 향한 마음과 내세에 대한 믿음을 담아 커다란 무덤을 만드는 문화가 있었다. 아르투와 도굴꾼들은 호화스러운 것들로 가득 차있을 그 무덤을 찾아 헤맨다.


현재를 살아가는 도굴꾼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무덤을 만들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도굴꾼들에게 무덤 속 부장품은 돈벌이 수단일 뿐이다. 도굴꾼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땅에 묻힌 것과 지나간 시간 속 사람들에겐 크게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키메라>는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과 마음을 한껏 퍼담아 양지바른 곳에 펼쳐놓는다. 그것이 가진 가치를 잊지 말라는 듯이 말이다.


수다스럽게 설명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기만 하는 영화라 느리게 느껴지는 구간도 있지만 그것이 뒤집히는 순간이 올 때까지 잠시만 참으면 곧 유물만큼이나 가치 있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저승의 입구를 들어 올리는 남자


도굴꾼, 고분이나 유적을 몰래 파내 부장품들을 파는 사람. 아르투는 도굴꾼이다. 그가 머물고 있는 나라 이탈리아는 ‘땅만 파면 유적지라 지하철이 발달하지 않은 도시가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수많은 유적, 유물이 잠들어 있는 땅이다. 도굴꾼이 파먹기 딱 좋은 땅이란 말이다.


도굴꾼들의 리더인 아르투에게는 신기한 능력이 있다. 그는 수맥을 기가 막히게 찾는 동물적인 감각의 소유자이며 무덤 입구에 선 순간, 일명 ‘키메라 상태’에 접어들어 정확하게 무덤의 위치를 짚어낸다. 이 상태를 왜 키메라 상태라고 부르냐하면, 아마도 두 개의 몸이 합쳐져 만들어진 키메라처럼 두 세계가 접붙는 무덤 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닐까 싶다.


도굴꾼들은 돈을 벌 생각에 신이 난 얼굴로 삽질을 하고 아르투는 간절한 손놀림으로 땅을 판다. 입구를 꾹 덮고 있던 돌판을 들어 올리며 아르투는 작은 기대를 가진다. 어쩌면 이번엔 내가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방인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두 개의 세상을 오가다.


아르투는 두 가지 의미에서의 이방인이다. 하나는 공간적 배경이 되는 이탈리아 시골마을의 토박이도 이탈리아인도 아닌 영국인이라는 의미에서, 다른 하나는 살아있는 사람이면서 죽은 사람들의 집(무덤)을 열고 그들의 세상에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아르투는 영국인이다. 영국인인 그가 어쩌다 이탈리아 시골마을에 와서 땅을 파고 있는진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극 중에 나오는 노래 가사와 관광객 가족들이 사진을 찍었던 마을 유적지를 생각해 보면 그는 고고학을 사랑했던 학생 또는 학자였고 직접 유적지를 연구하기 위해 이 마을에 온 게 아닐까 추측된다. 마을에 머문진 꽤 오래된 것 같지만 아르투는 여전히 성벽의 밖도, 안도 아닌 성벽의 위로 추정되는 높은 언덕 위 판잣집에 살고 있다. 그는 다 스러져가는 폐허 안에서 어렵게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 애매하고 아슬한 집의 위치와 상태를 보면 이 마을 사회에서 이방인 아르투가 어디쯤에 속해있는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다. 도굴꾼들은 지난 도굴 현장에서 아르투를 버리고 도망쳤고 스파르타코는 도굴꾼인 아르투를 친구라고 말하면서도 그가 가져온 부장품을 이용해 중간에서 큰 이익을 챙긴다. 시간이 지나도, 겉으론 친구가 되어도 결국 이방인은 이방인 또는 돈벌이 수단일 뿐이다.


무덤은 죽은 사람들의 집이자 지하 세계인 저승을 뜻한다. 아르투가 무덤을 발견하면 하늘과 땅이 뒤집힌다.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뀐다는 건 세상이 반대로 뒤집힌다는 것. 그가 무덤을 여는 순간 따뜻한 이승의 땅이 아닌 차가운 저승의 땅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르투는 아직 멀쩡히 살아있으면서 끊임없이 저승의 문을 여는 이방인이다. 태양의 힘을 느끼며 이승에서 살아가야 할 그는 잃어버린 연인을 만나기 위해 저승의 입구와 죽음을 찾아 헤맨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저승으로 떠난 과거의 연인과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이승의 여인
결국 과거를 선택한 아르투


아르투의 몸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과거를 살아간다. 아르투는 베니아미나와 함께했던 과거에 머문 채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아르투의 심리적 상태는 외적 요소로도 표현된다. 아르투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얇은 미색 자켓을 입고 있다. 날씨가 얼마나 춥든 옷이 얼마나 더러워지든 상관하지 않고 같은 자켓을 입는다. 항상 같은 그의 모습은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아닌 어제와 같은, 어제에 멈춰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탈리아는 아르투와 반대로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생명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그녀는 버려진 역을 포근한 보금자리로 만드는 활기를 가졌고 내일(미래)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며 살아간다. 베니아미나가 저승으로 떠난 과거의 연인이라면 이탈리아는 이승에서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여인이다. 아르투는 잠시 이탈리아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무덤 도굴에 대한 의견차로 인해 그녀와 이별한다.


시간이 흘러 이탈리아가 했던 말에 공감하게 된 아르투는 여신상의 머리를 바다에 던지고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녀를 다시 만나러 가기 전,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자른다.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보통의 이야기라면 이렇게 새로운 사랑을 만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로 걸어가며 끝나겠지만 아르투는 스스로 새로운 사랑을 등지고 다시 저승의 입구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르투의 세상이 한 번 더 뒤집힌다. 갱도가 무너지고 그의 머리 위에 있던 땅이 그가 밟고 있는 땅으로 바뀐다. 간절하게 당겨댔던 붉은 실의 반대편에서 잃어버린 연인이 나타난다. 그는 드디어 그토록 갈망하던 저승에 닿은 것이다. 기쁘고도 슬픈 재회다.



<행복한 라짜로>와 <키메라>의 공통점
이방인과 성자의 시선으로 본 세상


감독의 전작 <행복한 라짜로>와 <키메라>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의 주인공인 라짜로와 아르투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을 오가는 존재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주인공들의 탐욕스러운 주변인들은 이들을 이용한다. 라짜로는 후작부인과 소작농들에게 아르투는 스파르타코와 도굴꾼들에게 이용당한다. 라짜로와 아르투는 추운 날씨에도 지저분한 반팔 티나 얇은 자켓을 입은 채 남루한 모습으로 길을 걷는다. 두 사람 모두 돈에는 욕심이 없으며 제대로 된 거주지도 없다. 각자의 이익을 쫓고 다른 이의 인생을 착취하고 침범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라짜로와 아르투는 보통 사람 같지 않은 초연하고 이질적인 모습을 유지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모습은 성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세상은 성자를 착취한다. 냉정하고 차갑다. 그래도 <행복한 라짜로>에 비하면 <키메라>는 조금의 유머러스함이 더해져 세상의 비정함보다는 아르투의 운명과 사랑, 잃어버린 것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영화였다.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기에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는 걸까.



누군가의 집을 침범하고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에 값을 매기는 사람들
부장품, 유물. 오래된 것들의 가치


영화의 타이틀이 나오기 전, 기차역에서 아이들이 장난감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뭐가 보이니?”라는 피로의 질문에 아이들은 “사람들요.”라고 답한다. 순수한 아이들은 고대 벽화에서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반대로 도굴꾼과 유물 경매인인 스파르타코는 고대 사람들이 남긴 부장품들을 오로지 돈으로만 본다. 무덤에 있는 부장품들은 고대 문명인들이 죽은 이에게 남긴 소중한 마음이자 그들의 것이다. 하지만 도굴꾼들과 스파르타코는 남의 것에, 감히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에 값을 매기고 이득을 취한다.


당연하게 “에트루리아인들이 우리에게 남긴 거다.”라고 말하는 도굴꾼, 도굴꾼들을 하나의 부속품으로 이용해 경매 시스템을 돌리는 스파르타코. 그리고 무덤을 찾는 아르투. 이들은 모두 돈을 좇는 도굴꾼 패거리처럼 보이지만 아르투는 다른 도굴꾼, 스파르타코와는 다르게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아르투가 무덤을 여는 이유는 사랑을 찾기 위해서일 뿐, 돈에 큰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래도 다른 도굴꾼들처럼 죄책감 없이 부장품을 챙겨오긴 했으나 이탈리아가 주장한 ‘부장품은 혼령을 위한 것’이란 말을 듣고 여신상을 마주하며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낀다. 그는 다른 도굴꾼들이 여신상의 목을 꺾는 것에 분노하고 바다 위 비밀 경매장에서 짐승처럼 싸워대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여신상의 머리를 던진다. 더 이상 서로의 욕심을 주장하며 싸울 일이 없도록, 땅속 깊이 묻어둔 에트루리아인들의 비밀스러운 마음이 공개적인 구경거리가 되지 않도록.



베니아미나의 집도 여신상과 비슷한 개념이다. 플로라 부인이 지키고 있는 베니아미나의 집은 오래되어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택이다. 플로라 부인은 베니아미나가 돌아왔을 때 머물 곳이 있어야 한다며 집을 지킨다. 부인에게 집과 가구들은 딸과 함께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이다. 그런데 부인의 다른 딸들은 부인의 몸이 약해졌고 집도 많이 낡았으니 집을 팔고 이사를 가거나 요양원으로 가길 권한다. 그리고 어떻게 집을 떠나냐며 거부하는 부인의 말은 듣지 않은 채 가구의 값에 대해 논하고 램프를 얼굴 앞에 들이밀며 쓰지 않으면 내가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이승에 지어진 산자의 집, 저승에 지어진 죽은 자의 집인 무덤. 이 공간 안에 담긴 물건과 벽화들엔 그들의 추억과 마음이 깃들어있다. 하지만 무심한 사람들은 그 소중한 공간을 아무렇지 않게 침범하고 물건을 훔친다. 플로라 부인의 집과 아르투의 집은 타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거나 무너진다. 내세를 믿었던 에트루리아인들은 죽은 이가 또 다른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라 믿으며 땅 밑에 커다란 무덤을 만들어 그를 오래 기억하고 지켜주려 했지만 무덤은 도굴꾼들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파헤쳐 진다. 따뜻한 햇살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내뱉는 말과 행동은 너무도 무심하고 차갑다.


부장품과 유물, 유적들은 단순히 오래 물건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과 마음이 담긴 가치를 메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극중 사람들은 그 소중함과 가치를 보려 하지 않는다. <키메라>는 아르투와 함께 땅을 파헤치며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이승과 저승에 대한 생각을 뒤집은 영화


각자 다른 동물의 일부가 모여 만들어진 동물 키메라처럼 각자 다른 의미를 가진 죽음, 사랑, 삶이 모여 아르투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죽음, 사랑, 삶을 모두 경험한 아르투의 영혼은 저승에 닿은 후 진정한 행복을 찾았을 것이다. 아르투가 본 환상 속 저승은 사랑하는 연인과 햇살이 가득한 곳이었으니까.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이승과 저승 사이를 헤매던 이방인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키메라>는 이렇게 이승은 좋고 아름다운 것, 저승은 나쁘고 슬픈 것이라는 내 생각을 한큐에 뒤집었다. 난 아직은 이승이 훨씬 좋지만,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이승을 떠난다면 나도 아르투처럼 저승의 입구를 찾아 헤매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hkyung769/

https://www.instagram.com/movie_read_together/

블로그 : https://blog.naver.com/hkyung769

유튜브 : https://youtube.com/channel/UCTvKly8P5eMpkOPVuF63lwA

매거진의 이전글 메마른 세상의 사람들이 이방인을 대하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