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와 게으름, 그리고 나를 찾은 1년
10월 초까지만 해도 가을은 언제 오나 싶도록 여름 같은 날씨가 이어지더니 어느새 성큼 가을이 다가왔다. 작년 이맘때, 나는 급작스럽게 제주행을 결심하게 되었고 2주의 시간 동안 정신없이 제주에서 지낼 준비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1년 전인가 싶기도 하고, 훨씬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작년 11월 초, 제주에 왔으니 벌써 제주에 온 지 11개월이 되어간다. 제주살이를 오랜 시간 준비했던 것도 아니었고 아주 열망하며 바라던 것도 아니었는데 막상 살아보니 너무 잘 맞고 좋아서 이제는 제주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제주에 남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 제주에 들어섰을 때를 떠올려본다. 뭐가 달라졌을까 생각해보면 크게는 내게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껏 더 게을러졌다는 것. 이젠 어디 가보고 싶은 곳도 크게 없고 그저 바다가 보고 싶으면 근처 아무 바다, 푸릇함이 보고 싶으면 근처 어떤 길이나 숲, 공원을 찾는다. 특정한 어딘가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 많이 사라졌다. 가고 싶은 곳도 많고 주말 하루하루가 너무 짧다고 느껴질 만큼 알게 모르게 조급함이 있었던 제주 생활 초반과는 달리 이젠 꼭 가야만 해, 갈 거야! 하는 곳이 거의 없다. 여전히 지도 앱에 즐겨찾기가 된 곳은 수두룩하지만 '언젠간 가겠지'하며 한껏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무엇보다 그저 동네에서만 시간을 보내도 한없이 좋아서 굳이 어딘가로 이동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여유'의 일부인 듯하다.
그것 말고도 이제 나는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살아가려 하고 맛있는 커피를 찾아 카페를 찾아다니는 것은 여전히 좋아하지만 외식은 좋아하지 않는다. 배달음식을 주문하는 횟수도 많이 줄었다. (엄마와 같이 살았음에도 나는 참 외식을 좋아했다) 산책을 예전보다 훨씬 좋아하게 되었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예전보다는 나를 많이 돌봐주고 있다. 그리고 나를 더 오롯이 알아가고 있다. 타인의 시선이나 의견 없이 내가 나를 바로 마주하고 사실 나는 어떤 것들을 좋아하는지, 무엇들과 잘 맞는지, 그런 것들을 알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더없이 제주가 좋고 또 감사하다.
짧다면 짧고 또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을 제주에서의 1년여의 생활을 돌이켜보려 한다. 사람, 교통, 생활, 바람, 배송 등 내가 제주에 있으며 느끼고 알게 된 것, 그리고 바뀌게 된 이야기들을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