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
지난 2주간 많은 일이 있었다.
일일이 설명하기엔 꽤나 복잡하고도 개인적인 일들이 있었다. 사실 세상을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일들이 처음 겪는 일들이긴 하지만, 이번 일은 내게 꽤 큰 타격을 주었다. 꽤 타격이 커서 정신적으로도 위태로운 기분이 들어 너무 바닥으로, 동굴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괜찮다, 괜찮다'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 사건은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최대한 생각하지 않기로 한 부분이라 당장은 어렵고 나중에 내가 여유 있어지면 그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제주에 온 지 2주 차에 내가 했던 생각이다. 그만큼 제주가 좋았고 제주에서의 삶이 좋았다. 비록 2주였지만 그 2주 동안 내가 느낀 제주는 '여유' 그 자체였다. 제주에서는 꽉 막힌 출근길이 없었다. 만원 지하철이 없었다. (물론 제주도 도심에도 출퇴근길 정체는 존재한다고 한다.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지만. 그리고 제주엔 지하철이 없어 만원 지하철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다) 그 빽빽한 자리를 드넓은 바다가 채우고, 푸른 밭이 채우고, 먼 듯 가까운 듯 보이는 한라산 그리고 오름들이 채웠다.
그런 여유 덕분인지 나에게도 여유가 조금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고작 2주였음에도 말이다. 제주에서라면 나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물욕도 훨씬 줄어든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옷이나 다른 물건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먹던 치킨도, 일주일에 세네 번은 생각나던 떡볶이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일 거라 생각했는데 때에 따라서는 가능한 일이었다니!) 아니 무언가가 강렬하게 갖고 싶거나, 강렬하게 먹고 싶지 않았다. 뭔가가 먹고 싶어 져도 그게 아니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나를 발견하니 스스로도 참 신기했다. '나도 제주에서는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에 스스로 너무 신기했다.
제주의 삶이 사실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알겠지만 제주는 택배 배송료에 추가가 붙는다. 물론 로켓배송 덕분에 꽤 편리해지긴 했지만 제주에서의 로켓배송은 +2일이다. 주문하면 다음 날이 아니라 다다음날 도착한다. 심지어 가구는 거의 배송을 받을 수 없다고 보면 된다. 너무 가지고 싶은 가구면 전화해서 배송료를 추가 지불해서 배송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걸 언젠가 다시 육지로 가져갈 생각을 하면 망설여진다. (여전히 언젠간 서울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는 비교적 따스한 기온을 자랑하지만 바람이 매섭게 불기 시작하면 서울 못지않은 추위를 느낄 수 있다. 그 외에도 서울에 위치한 회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복지와 연봉, 차 없는 뚜벅이에게는 꽤 가혹한 버스의 배차시간, 육지보다 확연하게 큰 바선생(소문으로만 익히 들었는데 언제까지나 소문으로만 존재하길 바란다) 등 불편한 점은 많다. 물론 이런 불편함을 참기 힘든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이런 불편함 들을 자연과 여유가 상쇄시켜주어 제주에 더 머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2주 전,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갈 뻔했다. 아니 돌아가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 사이 제주에 빠져버려서 가능하다면 제주에 머물고 싶었다. 이 곳에서 일을 구하고 생활하고 싶었다. 지난 2주간 지냈던 애월처럼 밭이 늘 곁에 있고, 금방 바다로 걸어갈 수 있는 위치가 아니더라도 제주에 있고 싶었다. 그런 불편함 들을 감수할 만큼 제주가 좋았다. 아니 제주에서 만난 나의 새로운 모습들이 좋았다.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감사한 기회로 제주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애월읍에서 도심으로 옮겨왔다.
마음만 먹으면 애월과 같은 자연의 푸르름이 가득한 마을에서 지낼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여자 혼자 도심 아닌 마을에서 지낸다는 것이 내심 무서웠다.(내가 남자였다면 분명 한적한 마을의 작은 집을 구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마을에 살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섭다고 생각이 드니 걷잡을 수 없이 그 생각이 커져 혼자서 마을에서 지내는 건 영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제주 도심의 집값은 서울에 비하면 꽤 저렴했다. 연고지가 없는 제주에서 공인중개사를 찾고 집을 소개받고 마음에 드는 집을 계약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좋은 분을 만나서 계약을 하게 되었다. 물론 한 번에 만나진 못했지만. 제주에서 집을 구하고 직업을 찾고 하는 등의 좀 더 소상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풀어보고자 한다.
11월로 들어서서 평화로운 2주를 보내고, 그 후 격동의 2주를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제주의 도심으로 안착했다. 도심에서는 여기가 제주가 맞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쉴 때 언제든 제주다움을 느끼러 갈 수 있다는 것이 좋다. 한없이 고요하고 한적했던 애월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새로 시작하게 된 제주 도심살이, 애월에서만큼 즐거운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