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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런 Dec 06. 2021

너와 나 양자간의 법칙 , 양자역학

본격 이과가 보면 화나는 글 (철학으로 보는 양자역학)

 과학 수업은 싫고 과학은 좋다. 공부는 싫고 탐구는 좋다. 시키면 하기 싫고 내키면 하고 싶다. 그래서인지 탐구할 때는 유튜브를 찾게 된다. 내가 필요할 때만 핵심을 요약해 주니 탐구 플랫폼으로는 제격이다. 최근에 탐구하고 있는 과목은 양자역학이다. 평소에도 천문학에 관심이 있어 관련 영상을 찾아보던 중 어떤 알고리즘이 내 방을 양자역학 강의실로 바꾸어 놓았다.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양자역학은 한 마디로 입자의 최소 단위 전자가 지켜야 할 규칙이다. 우린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는 잡을 수 없다. 손은 입자이고 소리는 파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는 여러 사람이 함께 들을 수 있고 특정 영역 내에서 복수의 공간에 동시에 존재한다. 반면 입자인 손은 누군가가 잡고 있는 한 다른 사람이 같은 손을 잡을 수 없다. 전자는 앞서 말했 듯 입자의 최소 단위이며, 한 번에 한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입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험을 통해 전자는 파동처럼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냈다. 전자 가족이 사는 집에 각 벽마다 창문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동서남북 총 4개의 창문으로 전자가 나갈 때 입자라면 동쪽으로 나간 전자는 동쪽 창문에서만 나와야 한다. 하지만 실험 결과 하나의 전자가 마치 소리처럼 동서남북 모든 창문에서 나온 흔적이 발견 되었다. 놀란 과학자들은 전자의 움직임을 관찰했지만 전자가 동쪽으로 나오는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실험의 변수를 찾던 중 아주 작은 전자들의 세계에서는 빛이 반사되어 눈으로 들어오는 "관찰"이라는 행위가 아주 큰 변수임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전자는 누구도 보지 않으면 파동이지만 누군가 보면 입자가 된다. 아무런 자극이 없으면 어디에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외부의 자극을 받는 순간 위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낭만적인 법칙이라 생각이 들었다. 마치 김춘수 시인의 <꽃>에 전자를 한 스푼 얹은 느낌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실험실의 전자처럼 우리 각자는 온전히 우리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고 친구가 아니고 애인이 아니고 카피라이터가 아니고 한국인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 그때 우리는 정말 리차드 도킨슨의 말처럼 유전자 운송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너'가 있어야만 '내'가 존재하는, 너에서 나의 의미를 찾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mbti가 한창 유행인 요즘 누군가는 외면에 누군가는 내면에 집중하고 누군가는 현실에 또 누군가는 상상에 몰입하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나만 존재하는 세상에선 16가지나 되는 분류법이 필요 없을 것이다. 애초에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남보다 외면에 집중하기에 E이고 남보다 직관적이기에 N이고 남보다 감정적이기에 F이고 남보다 인식에 가깝기에 J이다. 너와 내가 만나야 서로가 서로로서 존재하는 양자역학은 최소한의 양쪽 두 사람 양자(兩者) 역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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