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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능초보 Apr 04. 2022

미스에듀케이션 오브 노미희

2020 병영문학상 소설 부문 입선작

-1-

 

눈 떠보니 모르는 천장이었다. 벌떡 일어나려고 보니 링겔이 꽂혀있어 손등이 따끔거렸고, 옆에서 뒤늦게 팔을 뻗어 나를 말려 결국 허리를 반도 못 일으킨 채 다시 몸을 천천히 누였다.

“정신 들어? 괜찮아?”

익숙한 목소리가 물었다. 반 친구 미희다. 응급실인 듯한데, 여기 눕기까지의 과정이 가물가물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물었다.

“나야말로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다! 같이 집 가는데 소리소문없이 사라져서 어디 갔는지 부르는데 한참 뒤에 갑자기 털썩 쓰러져서 나타나고… 무슨 일인 거야!”

미희가 울먹울먹 격앙된 어조로 말했지만 다른 응급 환자를 배려해서인지 목소리는 최대한 낮췄다. 주위는 분주했지만 의외로 크게 소란스럽지 않았다. 침대 맞은편에 넓게 뻗은 창밖은 어둑어둑했다.

“나, 많이 다쳤어?”

“아니, 그냥 쇼크로 기절한 것 같다던데.”

안심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괜히 호들갑 떨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다. 잠시 뒤 의사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가도 좋다고 했고, 나는 구급차에 실려 와도 돈이 든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의 심야 할증이 붙어 무섭게 올라가는 요금표를 애써 외면하려, 응급실 침대에서 (어쩌면 구급차에서부터) 세상 모르게 자고 있을 때 꾼 꿈을 기억해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한 치 앞만 겨우 보이는 컴컴한 골목에, 웬 고급 승용차 한 대가 그 나갈락 말락 하는 불빛마저 반사해 광을 내며 내 앞을 가로로 막아서 있었다.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낀 두 경호원이 무표정하게―잘 안 보였지만 정황상―그 앞을 지키고, 그중 한 명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흰 수트에 망토까지 두른 기다란 기럭지의 남자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백발(염색)을 찰랑이며, 품위 있는 몸짓으로 등장했다. 경호원과 흑백의 명확한 대비 때문인지 어두운 중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선명히 드러났다. 신비롭고, 위압적인 분위기. 창백한 피부 아래 길게 찢어진 입술로 지은 미소는 그의 야비한 멋을 돋보여주었다.

그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멈추더니, 망토 끝을 잡아 살짝 들어올리고 무릎을 가벼이 굽혀 연극적인 톤으로 인사했다.

“만나게 되어 반갑군, 괴도 아가씨.”


“으아아아아악!”

“왜 그래?! 뭐야?! 발작이야?!”

“아, 아니… 이상한 꿈 생각이 나서….”

그 오그라드는 첫인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할 때마다 참기 힘들었다. 옆에 있는 미희를 안심시켰더니 이번엔 앞에서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린다.

“에이! 씨부럴… 아 뭐여 아가씨! 놀래서 차 디비질 뻔했네….”

“아하하하하….”

멋쩍게 웃었다. 미희가 기사에게 안 보이게 과장된 표정으로 ‘으이씨!’ 하고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리고 서로 욕설을 벙끗거리며 실실댄 뒤, 차창에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 기울여 아저씨의 푸념으로 애써 의식을 돌렸다. 습한 데다가 앞뒤 경황이 없어 허둥대느라 열이 잔뜩 오를 법도 한데, 차에 틀어둔 에어컨 덕분에 오히려 쌀쌀할 정도였다. 하계 생활복 반바지라 드러난 맨 무릎을 부비적거리며 체육복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었다. 왼쪽 주머니에는 2만 원 남짓에 산 블루투스 이어폰 케이스가, 오른쪽 주머니에는 핸드폰과 함께 조그만 플라스틱제 물건이 잡혔다. USB다.


“저… 저 도(道) 같은 거 안 믿어요 무신론자예요 신은 죽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허, 어이없네. 난 당신의 존재 자체를 모르겠다고! 갑자기 뭐야! 밤길에 개 무섭게 시리―라고 입 밖으로 말할 깡다구가 있더라면….

“아니, 저… 진짜로 누구세요…?”

“호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가씨에게 미래를 빼앗긴 불쌍한 종자지.”

뭔지 모르겠지만 아까 ‘괴도’ 뭐시기 말한 것도 그렇고, 일단 나한테 뭔가를 뺏기셨나 보다. 그의 말투도 그렇고, 올려 깐 목소리가 너무 연극조에 비현실적이어서 이걸 웃어도 될지 말아야 할지 몰랐는데, 오히려 그 말투에 어울리는 목소리, 거기에 신비하고 위축되지 않는 카리스마까지 더해지니, 아예 방금까지와 동떨어진 연극적 인물 하나가 구축됐다. 주변은 캄캄하고, 주위로는 그와 경호원에 둘러싸인 데다가, 앞에는 이 동네에서 도저히 볼 수 없는 고급 승용차까지. 상황을 주도하는 건 그들이고, 그 세계관에 휘말린 건 오히려 내 쪽이다.

그래도.

“아니, 저,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요….”

“흐으음, 그렇게 나올 줄 몰랐는데 말이지. 나는 당신을 매우 뛰어난 인물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서유현 양?”

“아니 그걸 어떻게…!”

갑자기 거대한 공포가 엄습했다. 여기 놓인 상황 자체가 공포감 조성에 충분했지만, 그 비현실성을 뚫고 현실에 발을 디딘 내 이름이 호명됐기 때문이다. 지금의 비현실에서 의지하고 있는 일말의 상식의 세계를 지키는 선이 붕괴했다.

“자네 옷에 적힌 이름표가 그 사실을 말해주는군.”

아…. 이 멋대가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파란 체육복에는 왼쪽 가슴에 붙은 초록색 이름표가 그 추함에 화룡점정을 찍는다. 정말 도움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디자인이야, 라고 불평하면서도 그 순간 긴장이 잠시 완화됐다. 가,

“그건 그렇고, 미스 메이후드?”

…다시 엄습한 공포. 그것은 내 음악가 명이다.


“자네가 작곡한 〈니꺼내꺼(Liquor)〉의 멜론 차트 1위 소식은 흥미로웠어. 《쇼미더머니》를 지나 유튜브 콘텐츠 홍보 방식이 대세가 된 시대에, 힙합 대중화를 논하던 시기에나 유행하던 발라드 랩을 다시 가져오다니, 이만한 시대착오가 없더군…. 아, 오해는 말게. 나는 그 대담함을 말한 것뿐, 모욕의 의도가 아니야.”

그저 곳곳에 뿌리던 데모곡을 아티스트 쪽에서 가져간 것뿐인데, 라는 생각까지 읽었는지 뒤에 그가 덧붙였다. 그래도 꿈 치고는 신랄한 평가다.

“아무튼, 용건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 곡 후렴의 멜로디 라인은, 내가 손수 제작을 도맡은 신인의, 머지않아 발표하려던 음반의 타이틀곡을 예상 표절[1]한 결과란 말일세.”

“예상… 뭐요?”

“예상 표절. 즉, 자네는 미래에 나올 내 음반의 멜로디를 베껴서 미리 선수 친 거지.”

궤변이다. 난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발표도 안 된 멜로디를 알 리도 없을뿐더러, 설사 표절했다 하더라도 시간은 앞으로만 가지 않는가. 그러나 너무도 저돌적인 카리스마에 눌려 반론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어쩐지 멜로디가 너무 잘 떠오르더랬어. 나도 모르게 시간 여행을 다녀왔던가? 하긴 지금 처한 상황부터가 말도 안 되는데, 하고 납득해버릴 것만 같았다.

“저… 제 껀 이미 나왔으니, 그쪽에서 멜로디를 바꾸면 안 되는… 건가… 요?”

말꼬리가 점점 흐려졌다. 그는 차가운 눈동자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이 찢어진 듯한 미소를 잃지 않았으나, 고압적인 침묵을 지켰다.

“제가 그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았나… 요?”

“첫 번째 질문부터 대답하지.”

그는 몸을 옆으로 돌려 허리를 구부정하게 꺾어 한 스텝 두 스텝 움직이며 주머니에 넣지 않은 오른손 검지를 추켜세웠다.

“자네의 표절 건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감정은 당혹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다만 나의 곡이, 멜로디까지 포함해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작품이었다는 것뿐이지. 그런데, 그 요소 중 하나를 가져다가 자네가 선수 침으로서, 졸속이기 짝이 없는 반짝 유행가의 표절곡으로 전락하게 될 위기라… 안 되지, 안 되고말고. 이것은 옳지 않은 일이야.

진지한 얼굴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따위를 논하는 나르시시즘 앞에서 내가 그 자리에서 돌릴 수 있는 이성적 두뇌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새삼 깨닫고 있었다.

“저기… 그래도 표절당한 건… 제 쪽인데….”

“아니. 나의 곡은 읊조림에서 시작해 같은 멜로디의 보컬을 반복하고 증폭해가며 인간 심리의 불안을 그대로 거룩하게 성화(聖化)한다는 콘셉트 하에서 통제된 멜로디이지. 반면 자네 곡을 보세.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 케이팝에서 보이는 단선적인 프리-코러스(pre-chorus)와 중독성 있는 후크(hook)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발라드 랩’ 스타일 곡이란 말일세. 그런데 갑자기 브릿지에 이르러서 분위기도 코드도 맞지 않는 휘스퍼링 랩-싱잉을 통해, 장르도 다른 나의 곡과 같은 멜로디를 부른다, 라…. 그것은 아무리 봐도 인용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 아니한가.”

뜬금없는 아이디어이기는 했다. 전형적인 전개에 특이점을 주기 위해 브레인스토밍한 여러 아이디어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럴 수 없지…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해… 바로잡아… 바로잡아 바로잡아 바로잡아 바로잡아 바로잡아 바로잡아 바로잡아야 하니, 그래~~~서!”

광기 어린 ‘바로잡아’의 크레셴도 이후, 커다랗게 찍히는 악센트. 한없이 고조되는 극(劇)적 긴장감. 숨결과 박동 소리로 긴장이 유지된 잠시의 침묵 후, 그가 나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뒷걸음을 슬금슬금 치다가, 뒤에서 어깨가 턱, 하고 붙잡혔다. 용기를 내어 돌아보니, 이럴 수가, 경호원이 한 명이 어느새 뒤로 왔던가. 붙잡힌 내게로 백발(염색)의 남자가 앞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쑥 꺼내 내밀 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5초 남짓 지났나. 아무 일도 없길래 실눈을 떠서 봤더니, 그의 넓고 창백한 손바닥 한가운데 조그만 USB가 놓여 있었다.


그래, 처음부터 눈치챘겠지만, 꿈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고, 지금 택시에서 내 손에 잡힌 USB는 그 명백한 증거다. 나중에 ‘꿈이 아니었어!’ 거리면 괜히 모양새 떨어질 것 같아 처음부터 알고 있는 척하려고 했는데, 사실 지금 알았다. 뭐야, 진짜였어?!


건네면서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 곡의 데모 파일을 자네에게 줄 테니, 마음껏 샘플링 하여 공동작곡 명의로 해서 어떠한 형태로든 곡을 발표하게. 그리고 그것이 차트 정상에 오르지 않는다면… 〈니꺼내꺼(Liquor)〉의 스트리밍 사재기 의혹을 언론에 폭로하겠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그들은 유유히 사라졌고, 온몸에 긴장이 쭉 풀린 나의 다음 기억은 처음으로 이어진다.



-2-

 

다음 날 확인한 USB에는 정말로 오디오 파일 하나가 달랑 들어있었다. 화려하게 등장한 것 치고는 명함조차 안 남긴지라 하물며 ‘read me.txt’ 같은 거라도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오로지 ‘1.wav’뿐이었다. 다만 그 파일에는 작곡가 태그가 있었고, 그걸 토대로 검색을 한 결과, 몇 개 알고 있는 곡을 포함해 상당히 화려한 커리어를 보유하고 있고, 팝과 순수예술을 잇는 활동에 주력하는 명망 높은 작곡가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뜬금없던 만남은 어쩌면 그의 독무대를 경험한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느끼진 않았지만.


내가 작곡한 곡이 유명 아이돌 그룹 컴백 삼파전을 제치고 멜론 차트 1위를 거머쥔 사건(?)과 관련해 나는 트랙을 제공한 것 이상의 관여를 한 적이 없다. 솔직히 나는 갑작스러운 1위 소식에 감격할 뿐, 마음 깊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의심의 씨앗을 싹틔울 여지 따위 없었다. 곡을 부른 남자 래퍼와도 업무를 위한 이메일과 인스타 DM 이상의 개인적인 친분 역시 없었고, 바이러스 창궐로 인해 행사가 없어서인지, 페이스북에 라이브 영상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것 이외에 이렇다 할 활동 양상을 보지 못했다.

아무튼, 백발(염색)의 양반이 제기한 의혹에 있어 솔직히 아는 바도 없고 내 책임 소재도 없다. 굳이 걸리는 게 있다면 그가 지적한 멜로디 역시 내 손에서 나왔다는 부분인데….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왜 괜히 마음이 찜찜할까. 마치 자기가 피해를 입은 것 마냥 말하는 논리의 함정에 빠져버린 것일까. 멜로디가 걸렸다면 그것만 바꿔도 되는 것을, 무슨 ‘완벽’ 운운하면서 발매를 중지한 건 오히려 그 사람 책임인데 말이야.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해.

그 말이 망령처럼 머리를 떠돌았다. 뭐, 망령 같은 말투이긴 했다.


편견이겠지만, 아마 힙합 프로듀서들 대부분은 랩으로 먼저 음악을 시작했을 것이다. 나도 두 권 정도 가득 찬 가사 공책이 있지만, 마땅히 녹음할 장비도 장소도 없고, 어쩌다 가족의 눈을 피해 어설프게 녹음을 했어도 믹싱으로 커버할 수 없는 자신의 열악한 퍼포먼스 상태와 서사 조립 능력에 실망해 중학교 졸업 이후 자연스레 손을 떼게 되었다. 그래도 내 관심은 랩과 함께 호기심으로 시작한, 그러니까 아무래도 타입 비트를 찾아다닐 여건이 안 되고 음악적으로 확 오는 것도 없는 데다가 저작권 문제로 시비 걸릴 걸 우려해 아예 직접 만들기 시작한 비트 메이킹으로 성공적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나한테 힙합이라 악기를 안 다루고도 음악을 할 수 있는 길이 되었다. 물론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나 더 루츠(The Roots) 같은 힙합 밴드도 있고, 프로듀서로서 당연히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게 훨씬 표현의 폭이 넓어지는 거야 당연하지만, 못하면 못하는 대로 표현 방식이 있는 법.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는 샘플 콜라주로 소리의 벽[2]을 재현했고, 매드립(Madlib)은 아이패드로 앨범을 완성하며, 릴 펌프(Lil Pump)의 〈Gucci Gang〉은 세계를 강타한다.

이처럼 한계 가운데서 돌파구를 찾아내고 마는 힙합 정신을, 랩의 서사적 전형뿐만 아니라 프로듀싱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돌파구가 안 보여….”

미희한테 찾아가 매달렸다. 뒤에서 홰까닥 안았는데, 나보다 훨씬 작은 친구지만 그녀의 등은 왠지 편안하고 의지가 된다.

“응, 근데 나도 앞이 안 보여….”

그녀가 허리를 펴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의지가… 되긴 되는데….

매점에 내려가면서 이런저런 쌓인 감정을 털었다. 꿈(실제) 얘기는 이미 며칠 전에 했는데, “참신한 꿈이네”라면서도 어딘가 측은한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희는 내 얘기를 진지하고 주의 깊게 들어주었고, 그런 반응이 더 미친 사람 취급 아닌지 싶어 기분이 묘하면서도 그 상냥함이 따뜻해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녀에게 기대기로 했다. 물리적으로 말고.

“‘예상 표절’은 피에르 바야르의 책 제목인데―”

“피에르 본(Pi'erre Bourne)?”

“바야르. 뭐만 하면 다 음악 쪽으로 연결시키더라, 넌?”

“아하하….”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같은 되게 역설적인 형태의 문학 담론을 만드는 사람인데, ‘저자 살해’를 주장한 롤랑 바르트를 극적인 형태로 적용하는 듯하지?”

“…롤링 스톤즈?”

“야, 이건 억지다.”

“아하하하….”

나는 또 어색하게 웃었다.

“듣지도 않은 노래… 아는 척했던 거… 들킨 것 같네….”

“에이~ 유현이 너는 프로잖아! 이미 알 만큼 알잖아! 1위 가수 서유현!”

“가수 아닌데….”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미희는 “장하다! 할 수 있다! 천재 소녀 서유현!” 등의 응원 구호를 남발했다. 그녀 입장에서 실질적인 아이디어나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그 밝은 기운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실없는 말을 주고받는 새 수업 종이 이미 한참 전에 울렸고, 이미 선생님이 수업을 막 시작하고 있던 교실 앞에서 내가 어쩔 줄 몰라 쭈뼛대고 있는데, 미희가 당당하게 과장된 제스처로 “죄송함다!” 하고 들어가 좌중을 웃기는 사이 졸졸 따라 들어가 착석했다.

 


-3-


사실 매점 앞에서 정말 말하려던 건 메이저 가수와의 컨택 방식에 대해서였다. 곡을 돌리면서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게 이 내향성 인간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여전히 스스로 믿기진 않지만 어쨌든 나는 어떤 형태로든 간에 음원사이트 실시간 차트 1위 곡을 만든 프로듀서였고, 그것을 향한 세간의 의구심과는 별개로 작곡 의뢰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현상을 당연히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하겠지만, 그 낯선 환경이 좀처럼 적응되지 않고, 솔직히 무서웠다.

한편, 종종 들어가는 힙합 커뮤니티를 보니 가수나 그의 소속사에 대한 카더라통신에 기댄 욕은 있어도, 그것이 작곡가를 향한 걸 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래도 곡은 좋지 않아요?”라는 글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것을 보았는데, 본래 힙합 장르 팬의 대다수가 발라드 랩을 싫어하는 걸 감안할 때, 이런 여론은 매우 보기 드물고, 그래도 내가 잘 해내고 있다는 증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걸 왜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지는, 여러모로 억울한 부분이다.

정말, 나는, 곡을, 줬을, 뿐이다. 그랬더니 인터넷에서는 사재기 의혹이 일고, 현실 같지도 않은 현실에서는 나보고 ‘예상 표절’이라며 응급실에 실어간 광대가 있다. 그래, 사재기 의혹은 솔직히 나도 남을 보며 여러 번 욕했었고, 지금 와서는 얼떨결에 그것의 당사자가 된 당혹감이 더 강하다. 문제는 그걸 구실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한 광대인데….

나는 그게 어떻게 불리하고 과연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 더 두렵다.


야자를 째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을 보아하니 아빠는 금방 나간 것 같다. 나가기 전에 설거지나 좀 제대로 하면 어떤가… 싶은 한편 또 밤새 상하차로 고생할 사람한테 너무 야박한가 싶기도 했다. 어차피 밥그릇과 다 먹은 콩나물 반찬 그릇뿐이라 세제도 안 묻힌 수세미로 대충 닦아두고 컴퓨터를 켰다. 시퀀서를 열었다.

집에 컴퓨터가 거실에 단 한 대 있어 내가 컴퓨터를 온전히 쓸 타이밍을 재야 한다든지, 작업이 늦어질수록 빨리 들어가서 안 자냐는 부모님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을 괴로워했는데, 그 압박감 때문에 오히려 작업 속도가 빠르고 효율적이게 된 부분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빠의 직장이 야간으로 바뀌고, 오빠가 군대에 가고, 무엇보다 엄마가 입원하고 나서는 컴퓨터를 눈치 안 보고 쓸 수 있었다. 방금 문장의 윤리적 문제의식은 스스로 자각하고 있고, 그렇기에 오히려 작곡에 힘써 엄마 입원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다. 가해자의 합의금은 자꾸만 밀렸고, 한순간의 저작료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1.wav’ 샘플은 항상 다른 의뢰곡들의 작업을 어느 정도 마친 후에야 들었다. 그것은 들을수록 그 남자의 말처럼 정말 ‘완벽’에 가까운 곡처럼 느껴졌고, 아직 나로서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칸예 웨스트(Kanye West)의 화려한 강박이 응축된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를 처음 듣던 그때의 기분이랄까. 그렇다고 장르가 힙합은 아니었고, 케이트 부시(Kate Bush)나, 현대로 치면 FKA 트윅스(FKA Twigs)스러운 아트 팝이었다. 초반에는 으스스한 앰비언스 사운드와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여성의 보컬이 들리고―아마 그가 말했던 ‘신인’이겠지―점차 정체불명의 반짝이는 소리가 겹겹이 쌓이며 음량이 증폭되는 포스트록적인 형식을 띠었다.

보컬의 멜로디는 반복됐는데, 계속 맴도는 네 마디가 고스란히 〈니꺼내꺼〉의 브릿지 멜로디와 퍼포먼스 스타일까지 일치하고, 이 정도면 당연히 내 거를 베낀 것 아니냐고 되물어야 할 수준이었지만, 서로 기본이 되는 코드도 다르고, 너무나 상이한 장르성 때문에 쓰임새가 완전히 달랐다. 법원에서 판단하는 표절의 기준을 정확히 모르지만, 사실 이대로 내더라도 별 상관없지 않았을까 하는 게 ‘예상-표절 용의자’ 따위가 아닌, 오롯이 ‘피-표절 당사자’인 내 의견이다.

아무튼, 그날 밤 나타난 광대의 카리스마를 도무지 격하시키기는 힘든 노릇이다. 나 같은 고딩 양산형 작곡가에게 그의 천재적인 계획이 선수 쳐진 입장이라면 화가 날만도 하겠다. 거기서 시간의 흐름이라는 룰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순진한 소년적인 사고방식은 세간의 소위 ‘천재’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인식될 것이라는 게, 짜증이 치민다.


그런 나에게 미희는 ‘천재 소녀’라 응원해주었지만, 그 호칭은 나보다 미희에게 훨씬 어울렸다.

호리호리하고 작은 키에 단발머리 귀염상. 실제로도 밝고 친근한데, 그녀의 생기, 당당함, 열정이 담겨 반짝이는 눈빛 때문인지 카리스마도 넘쳤다. 교장과 싸워 쟁취한 교복 바지와 두발 염색권은 학교의 전설이자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음침한 말더듬이인 나와는 생판 정반대인 사람.

미희와는 1학년 때 한번 짝이었는데, 그때 미희가 책상 귀퉁이에 볼펜으로 그린 얼굴 낙서 때문에 특별히 친해지는 계기가 됐다. 그걸 보고 나는 언젠가 “미스에듀케이션 오브 로린 힐….”이라고 중얼거렸고, 미희는 “어, 너도 아는구나 그거!” 하고 기쁘게 반응한 게 계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크게 낙서할 수는 없어서.”

목제 책상에 레게 머리를 한 자기 얼굴이 그려진 커버로 유명한 로린 힐(Lauryn Hill)의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앨범은 서로에게 인생 명반으로 남아있었다. 힙합과 알앤비/소울을 넘나들고, 남성이 대다수인 힙합 장르에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그 장르적 미학을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동경의 대상이자 목표가 되어 힙합에 본격적인 꿈을 갖게 했다. 그녀가 다시는 앨범을 내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고, 우리가 꿈을 이루면 반드시 끈질기게 할머니가 될 때까지 활동해나가기로 약속했다. 물론 우리는 그 외에도 미씨 엘리엇(Missy Elliott)의 《Supa Dupa Fly》를 비롯한 앨범들과 니키 미나즈(Nicki Minaj)의 전복적 이미지로 거머쥔 성공, 카디 비(Cardi B)의 당당함, 그리고 랩소디(Rapsody)와 노네임(Noname)을 비롯한 블랙 페미니스트 등의 여성 힙합 아티스트를 함께 동경했다.

미희는 고등학교 입학 후 거의 격월로 연예기획사 오디션에 나갔다. 가진 악기라고는 통기타가 전부였다. 그것도 본래 교회 소예배당에 방치된 주인 없는 기타를 빌려 쓰는 것이었다. 유년기부터 다닌 교회인데, 청소년부 찬양단 입단을 계기로 처음에는 눈치 보며, 날이 갈수록 당당하게 기타를 사유화했다. 사실 엄연히 교회 비품이었지만 크게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라고 인식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하루는 미희네 교회의 청소년 찬양 집회에 나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그녀가 찬양단의 리더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호기심에 큰맘 먹고 참석했다. 거기서 충격받은 점이 크게 세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TV 자료화면에서나 보던 광신적인 통성기도의 모습이 그대로 사방에서 재현됐다는 것이고, 둘은 거기서 불리는 찬양이 소울 가스펠적인 면모가 싸그리 거세된 평평한 히키가타리 그룹 사운드만 남았다는 점이며, 마지막으로 셋 다시 기역은 그 가운데서도 미희의 카리스마는 프로급으로 빛났다는 것, 셋 다시 니은은 그녀가 거기서 읊조리듯 노래한 목소리가 ‘1.wav’ 샘플에서 듣던 그 목소리와 똑같다는 것이다.

 


-iv-


유현이는 소중한 만큼이나 쉽게 좁히기 힘든 거리감이 있다. 서로에게 침범이 될까 봐. 유현이는 열정과 능력을 겸비하고 있고, 지나치게 겸손하다. “아하하….”하고 어색하게 웃는 모습에 세상 모를 착함이 깃들어 있다. 키는 큰데 행동이 어찌나 조그맣고 조심스러운지.

그런 모습은 귀여웠지만, 최근에는 유난히 답답하게 다가왔다. 평소에도 시선을 잘 못 맞추는 그녀지만, 일부러 시선을 회피하거나 아예 마주치지도 못하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때가 늘었다. 교회에 괜히 불렀나. 그럴 만했다. 아무리 어릴 적 다니던 경험이 있다고 한들 그 분위기는 솔직히 외부인 입장에서는 섞여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어색함이 감돌기 시작한 건 몇 주 전 하굣길, 유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쓰러진 채 나타난 그날부터였다. 갑자기 웬 외제 차가 나타나 ‘예상 표절’을 주장했다는 말은, 쉽게 믿기지는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유현이는 거짓말하면 티가 나니까. 지금 나를 애써 피하는 것처럼.

아니, 정말로 피하고 있는 건 그녀 앞에서 실없는 소리나 하고 있던 나일지도 모른다.


“언니, 사장님 언제 돌아오는지 알아?”

연습실 옆 지나치게 조촐한 사무실에 홀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는 홍혜림 대리에게 물었다.

“몰~라! 전화도 안 받아~! 평생 돌아오지 마라~!”

“언니가 전화를 안 건 게 아니고?”

“시끄러!”

그러고는 “오!빠~는 네-가 너무 밉!다~”[3]는 가사를 흥얼거리는 홍 대리.

힘겹게 들어간 연예기획사로 한 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올라가고 있다. 사장은 작곡가이기도 해서, 올라갈 때마다 그가 주는 디렉션대로 여러 번 녹음했다. 디렉팅이 상당히 섬세하고 자기주장이 강해, 같은 소절을 두 달 이상 거의 몇백 테이크를 찍은 끝에 데뷔곡이 겨우 완성되었다. 문제는 콘셉트 스타일링부터 시작해 사진에 무대 컨펌까지 다 마치고 영상 촬영을 앞두고 갑자기 데뷔 일정이 엎어지고 사장이 잠수했다는 것인데, 실종 날짜가 유현이 앞에 외제 차가 나타났다는 그날과 일치한다.

“꺼저라~ 꺼져인마~”

“혜림 언니.”

“?”

“내가 부른 그거, 한국에서 정말 뜰 것 같애?”

“아니. 절대. 네버. 표절이고 자시고 한국에서 비요크(Björk) 짭스러운 곡이 어떻게 뜨냐.”

“언니, 지금 월급은 나와?”

“음… 퇴사해야겠지?”

“나가도 꼭 연락해.”


유현이가 작곡한 곡과 멜로디가 겹쳐 데뷔가 불발한 신인이 나라는 사실을 알면 그 애 성격상 자기 책임이 아닌데도 무척 미안해할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불편해 미리 함구하고 있었지만, 사실 나 스스로 속인 핑계 아닐까? 나도 그것이 그 애 잘못이 아닌 줄 알고서도 괜히 질투했던 게 아닐까? 유현이는 자꾸 자기가 재능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있는 건 그 애다.

사장이 유현이에게 가서 나에 대한 죄책감을 주는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유현이는 그 사실을 안 것 같고, 내가 처음 취했던 모호한 태도 때문에 더 괴로워하고 있다면, 결국 답은 내가 당당해지는 것밖에 없다. 질투를 드러내되, 복수의 대상은 분명히. 그 대상은 당연히―

 


-5-

 

빈틈없는 원곡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툭 빼내어 그루브의 파도에 해방하고 싶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내 나름의 속죄 의식이다―

뻥이다.

DJ 스크루(DJ Screw)가 창시한 샘플링 기법인 ‘찹드 앤 스크루드(Chopped & Screwed)’는 그 은근한 경박함과 주술성이 함께 깃들어 멋지다. 보컬 샘플을 길게 늘여 피치를 낮추면서 미국 남부식 느릿느릿하고 끈적한 춤곡을 만들어내, 왜곡된 목소리의 주술성이 경박한 춤사위에 녹아버린다.

미희의 미성(美聲)이 들어간 녹음물을 조각내면서, 나는 배에서부터 들끓는 흥분을 느꼈다. 샘플은 노예다. 원래 환경에서 유리돼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타인의 이윤과 명망에 봉사하는[4].

나는 감히 미희와 함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 열등감에 기반한 혼란을 아예 불경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로 마음먹은 건, 우정과 질투와 죄책감 사이에 끼인 감정이 정리 안 된 채 폭주해버렸기 때문이다. “Jesus walks with me”라고 찬양하다가도 어느새 스스로 “I am a God”이라고 선언해버리는, 지극히 칸예(Kanye West)스러운 방법론이기도 하다.

샘플 원곡은 완벽한 만큼 갑갑했다. 미희는 완벽한 음악을 보조하는 기능적 역할일 뿐이었다. 그것이 나쁘단 건 아니고 오히려 근래 나오는 수많은 곡과 비교해서 월등히 뛰어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참여할 기회를 얻은 미희가 질투 났다. 그러나 내가 봐온 미희는, 뭐랄까, 좀 더 자유로운 존재다. 과장 좀 보태서 미희 랩은 제이지(Jay-Z) 같은 면이 있다. 어떠한 리듬에서도 자기만의 정직한 목소리로 유려하게 헤엄쳐나가는. 미희의 자유는 그루브에서 나오고, 그루브는 어긋남에서 비롯된다.

―나 같은 것 때문에 미희의 데뷔 기회가 날아갔나?

―1위 곡 프로듀서로서 얻게 된 위치가 정말로 정당한가?

―그렇다면 다음 곡이 정말로 정당하게 1위를 거머쥘 수 있나? 그 남자는 그때까지 계속 따라다닐까?

이 몇 달 사이, 정말 많은 것이 어긋났다. 그루비하게 완성해줄 네가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 곡을 건넬 아티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헐]

[내가 할 말]

[표절당함]

미희의 왜곡된 목소리 위에, 다시 미희의 목소리가 올라갈 것이다.



-n-

 

언젠가는 찾아올 줄 알았던 그와 재회한 건 어느 겨울날, 래퍼 미키(miki)의 신보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촬영 중에 한숨 돌리러 스튜디오 밖에 나갔을 때였다. 촬영이 길어져 바깥은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이 새까맸고, 패딩 아래로 입은 협찬 청바지에는 방한 대책을 하나도 강구 하지 않아 다리가 저절로 오들오들 떨렸다. 컨테이너 뒤편에서 뜨거운 캔커피를 양손에 쥐고, 조금이라도 몸에 열을 내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헤드라이트가 번쩍. 빛은 점점 커지고 눈이 부시기 시작했다. 현장에 어울리지 않는, 외제 차 한 대가 요란하게 스퀴즈하고, 익숙한 긴 기럭지에 흰 수트를 걸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오랜만이로군.”

사실 좀 반가웠다. 아무래도 학창 시절의 추억이니까. 너무도 뜬금없는 해프닝에 이게 실제 일어난 게 맞는지도 의심스러운 기억이니까.

“또 제가… 무슨 미래를… 훔쳐버렸나요?”

내가 먼저 안부를 묻자 남자는 여전한 연극 톤으로 껄껄 웃어댔다.

“당돌해진 모습, 보기 나쁘지 않군.”

“아하하하…. 이왕 좀 더 멋 냈을 때 오지….”

그와의 조우 이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미희랑 나는 예의 싱글 이후 이를 앨범 단위 프로젝트로 발전시켰는데, 비-자본 독립 앨범이었음에도 가시적인 반향이 있었다. 미희는 고3 여름방학에 힙합/알앤비 장르의 저명한 레이블의 오디션에서 계약을 맺었고, 그 앨범이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훗날 전해 들었다.

그와 함께, 내가 같이 보낸 데모 음원이 감사하게도 그녀의 데뷔곡으로 채택되면서 여태 받아본 적 없는 액수의 곡비를 받았고, 장르씬뿐만 아니라 가요계에서도 유명인사인 그 레이블 대표가 직접 피처링을 맡아, 그 마케팅 덕분인지, 역시 일전 1위 곡에서도 받아본 적 없는 액수의 정산이 첫 달에 들어왔다. 다만 실제로 그 트랙이 1위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자네는 내가 왜 다시 왔는지 알고 있겠지?”

“아니요….”

“약속에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지. 바로…”

“… 실시간 차트… 폐지 때문에?”

플래시백. “차트 정상에 오르지 않는다면, 스트리밍 사재기 의혹을 언론에 폭로하겠네.” 그는 말했고, 어쨌든 나와 미희는 유통사를 찾아 그해 기말고사를 앞두고 발매했다―미희가 아는 언니의 새 회사라고 했다. 사실 그 약속이란 게 무슨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니고, 솔직히 발매 자체에 신경 쓰다 보니 그 이후는 깊이 생각 안 했다. 게다가 발매 기한만 정했을 뿐, 그것이 언제까지 1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말도 없었고. 게다가 그새 인기 발라드곡을 위시한 음원 사재기 의혹은 언론에 무더기로 제보돼 입방아에 오른 상태였다. 그 회사는 이후 드문드문 전화를 받았고, 〈그것이 알고 싶다〉 음원 사재기 편에서 익숙한 사무실이 블러 처리된 채 등장했다. 보도 이후 얼마 안 가서 음원사이트 실시간 차트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자네한테도 계약 제안이 들어온 줄 아는데, 노미희 양만 들어가게 된 사연이 있나?”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안대.

“그… 아직 여기 완전히 매진하기보다는… 공부를 좀 해보려고요….”

“호오, 처음 볼 당시에는 현실에 꽤 불만족스러워했던 것 같은데, 의외의 선택이로군.”

“님 때문이에요….”

그는 물리적으로 고개를 30도 꺾어 갸우뚱하는 제스처를 지었다. 바로 이와 같은 (짜증 나지만) 세심한 연출력. 그런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소리에 (굴욕적이게도) 감동한 밤의 기억이 여전히 음악을 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공부를 병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당장의 계약은 오히려 공부에 걸림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절을 결정하기도 힘들었다. 집의 경제 상황도 안 좋은데, 더 안정된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린 것 아닌가.

“인생은… 길게 볼… 일이니까요.”

내가 배우려는 건 음악이 아니라, 경영이다.


음악은 독자적이지 않다. 그러나 음악을 창작하는 우리가 정작 그 산업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경험을 어린 나이에 겪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산업에서 내가 실제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주도권을 잡아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약속을 이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 사이 자네의 잠재성은 충분히 넘치도록 확인했네. 나는 그런 의미로 자네에게 새 계약을 제안하러 왔는데, 보아하니 쉽게 허락할 상황은 아닌가 보군.”

음악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보통 힘든 게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국내 힙합 명반 《누명》이 당시 현역 서울대 경제학과생에게서 나왔다는 일화를 떠올리곤 한다.

“나는 자네의 젊음을 예술적으로 빛낼 계획이 있네. 젊음은 한정돼있고, 예술은 영원을 꿈꿀 수 있지. 얼마 못 가는 청춘의 불씨를 역사에 화려하게 아로새길 힘이 있단 말일세.”

“어… 말씀은 감사한데… 미희를 버리셨잖아요. 저한테 피해망상 하시면서….”

정적이 찾아왔다. 아니, 컨테이너 너머로 여전히 분주한 현장의 소리가 그와 나 사이를 선명히 통과했다. 앰비언트(Ambient) 장르가 가지는 특유의 긴장감은, 무언가가 표현되어야 할 대목에서 그것이 침묵을 지키기 때문에 오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야 힙합 뮤지션. 처음으로 보인 그의 냉정해진 표정에 대고 펀치라인을.

“그냥 제가 하면 안 될까요?”

그는 아마 내가 앞으로도 계속 고통스럽게 존경해마지않을 예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벌써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을 호로록 마시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그와 나는 처음 만날 때부터 이미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도 나도 미희도, 그저 당당한 음악가일 뿐이다.

다시 플래시백. 우리가 꿈을 이루면 반드시 끈질기게 할머니가 될 때까지 활동해나가기로 약속했다. 문득 비틀스(The Beatles)의 〈When I’m Sixty-Four〉가 생각났다. 당대 록스타들의 청춘 예찬과 늙어감에 대한 혐오를 표하는 조류와 다르게, 오히려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축복하며, 세대를 넘나들어 음악으로 대화를 시도한다[5]. 젊음에서 벗어날 미래를 낙관할 힘. 그래서 그들은 올-타임 레전드였고, 나 역시 그때까지 서로 의지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그 친구가 주인공인 스튜디오로, 나도 이만 돌아가야겠다.




[1] 피에르 바야르, 『예상 표절』, 여름언덕, 2010

[2] Wall of Sound. 필 스펙터(Phil Spector)가 만든 음향 효과. 퍼블릭 에너미의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은 다층적 샘플 콜라주로 힙합 장르만의 ‘소리의 벽’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폴 에드워즈, 최경은 옮김, 『힙 투 더 합, 힙합!』, 한스미디어, 2015, 192쪽)

[3] 유키스(U-KISS), 〈시끄러!!〉, NH Media, 2010

[4] 사이먼 레이놀즈, 최성민 옮김, 『레트로 마니아』, 작업실유령, 2014, 305쪽에서 인용.

[5] 키스 니거스, 송화숙 외 옮김, 『대중음악이론: 문화산업론과 반문화론을 넘어서』, 마티, 2012, 244~255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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