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유토피아” 리포트 번역•수정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와 같은 세계상을 공유한다. 이들을 구획하는 경계는 성의 자기결정권 존중과 기성 범주를 넘어서는 상상력 실천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서로 상반되는 듯 보여도 그 근간에 있는 이미지는 그리 다르지 않다. 『멋진 신세계』 『1984』 등에서 나타나는 통제사회가 대중적인 디스토피아 상과 가깝다고 볼 때, 토머스 모어가 제창한 『유토피아』도 마찬가지로 개인의 경계를 없앤, 중앙통제가 이뤄지는 집단사회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상과 초기 기독교인 집단생활 향수에 의한 유토피아-상을 다루는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저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려지는 결혼제도에는 ‘사랑’이라는 개인의 레이어와 ‘생식•번영’이라는 사회•국가의 레이어가 함께 겹친다. 이 속성은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양자•이성애규범에서 탈각한 삼자혼 형태로 나타나는 데 있다. 이는 배타적 양자관계를 넘어선 보편적 우애사회 구조를 상징하는 것으로 분석되면서, 개인에서 공동체로 정체성이 이행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그에 비해, 강경한 크리스천이자 여성해방운동 등에 부정적이던 레프 톨스토이가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초기 기독교부인 사도 바울의 제언—“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전서 7:1 中 KLB)—을 인용하는 것은 흥미롭다. 톨스토이가 당대 교회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을 고려하더라도 애초에 인용문 자체가 구약 성서에서 “너희는 많은 자녀를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창세기 1:28 中 KLB)라고 첫 인류에게 고하는 신의 명령과 모순되고, 그 위에서 그리스도의 도래가 해석되는 것을 고려할 때, 결혼 제도에 강하게 반대하는 해당 작품의 메시지가 과연 기독교 사상과 합치하는가 의문이 들곤 한다. 그러나 아무튼 결혼 제도가 성적 억압책으로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꿰뚫어보고 그 폭력성을 거부하는 핵심 메시지는 그리스도가 백성을 율법으로부터 해방하는 구도와 겹쳐 볼 수 있다.
이상 두 작품의 대비는 성애를 종속하는 이성애 결혼 제도를 타파하는 비전을 가리킨다. 그리고 동시에 그 방법이 전자의 경우는 성의 사유를 포기하여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을 상징하는 다자혼, 후자는 애초에 성의 통제책으로 기능하는 결혼 제도 그 자체의 폐기를 촉구하는 듯한 모양으로 차이를 보이며, 제도 탈각 이후의 비전이 좀체 합일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다. 전복 다음에 올 이상향-상에 대한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무라타 사야카 저 『소멸세계』에서 나타나는 모녀간 가치관 갈등상에서도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양면성을 읽어낼 수 있고, 미래의 합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그녀들은 성애•생식•가족이 분리된 동일한 세계에 사는데, 그 가치 판단은 극단적으로 나뉜다. (애초에 현실에서도 일치하는 쪽이 더 드물 테다.) 생각해보면 『멋진 신세계』는 그 이름 그대로 누군가에게는 ‘멋진’ 것이다. 구체제가 붕괴하는 것으로 일어나는 사회갈등을 세대와 계급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지금까지 성 이분법 이데올로기 바깥에서 배제되어 온 시민이 사회권을 비로소 쟁취할 가능성이기도 한 것을 『소멸세계』는 가리킨다.
하지만 현상을 보면 통제의 강화로부터는 더한 디스토피아를 가속하는 미래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동성애를 포함하는 ‘비전통적인 성적 관계’ 선전을 금지하거나(러시아), 탈레반에 의한 여성 권리 제한(아프가니스탄), 인공임신중절 위헌판결(미국) 등. 이러한 사회 제도가 결정•실행된 것은 2010년대 이후다. 이처럼 후근대기의 성을 둘러싼 권리가 개인의 것으로 수렴될 줄 알았던 비전에도 불구하고 이성애 가정 이념에 기반한 사회 권력의 통제욕은 다시금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연애의 발명으로 인해 성애가 개인 영역이 되었다는 담론을 고려할 때, 현대 사회에 있어 성의 통제 권력은 각 사회구성원들의 마지막 사적 영역의 조종간을 쥐여주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술한 유토피아-상의 최대 레퍼런스일 예수 그리스도가 혼인 제도에 관해 언급한 바를 보자. “부활하면 장가도 시집도 안 가고 다만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된다.”(마태복음 22:30 KLB) 그리스도가 가리키는 하늘나라 또한 ‘신’이 통치하는 세계다. 민중은 예수 그리스도한테서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랐지만, 예수가 가리킨 길은 그 희망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결국 민중은 그를 십자가에 내건다. 유토피아로의 험난한 길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나는 통제 감시 사회에서 비롯된 디스토피아와 마찬가지로 통제가 성립되지 않아 사회가 붕괴된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대한 공포가 있다. 사회를 이루는 합의가 되도록 적극적인 평등이 되기를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의 구조를 인지하여 이를 넘어설 발걸음이 필요한 것, 그리고 사회 구성축에 대한 꾸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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