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작은 엄마는 죄인?
성장클리닉의 키 작은 가짜 환자들
초등학교 1학년 첫 등교날, 난 우리 반에서 키가 가장 작은 여자아이였다. (지금은 말도 안 되지만) 그 시절에는 1학년 1학기 학급 반장, 부반장을 담임선생님이 정하셨었는데 키가 가장 큰 남자아이가 반장으로, 나는 반에서 키가 가장 작다는 이유로 부반장으로 선출되었다. 작다고 친구들한테 무시당하지 말고 부디 학교 생활 잘해달라는 의미로 뽑아주셨던 것 같다. 덕분에 쪼끄만 땅꼬마가 부반장 노릇한답시고 키가 한 뼘 이상 큰 친구들 앞에 나서서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한 결과, 나는 작지만 당찬 어린이로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에는 상황이 반전되었다. 나는 사춘기가 빨리 온 편이었고 반에서 남자아이들보다도 키가 꽤나 큰, 성숙함이 물씬 풍기는 여학생이 되어있었다. 정신적으로는 미성숙했지만 외적으로는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여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남학생들의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부푼 가슴이 부끄러워 그때부터 한껏 오그라든 두 어깨는 학창 시절 내내 어깨 통증의 근원이 되었고, 어른이 되고 나서야 겨우겨우 교정이 되었다. 이제와 보면 나는 '특발성 성조숙증'이었던 것 같다. 여름방학 동안에 키가 10cm나 자랐다고 몹시 자랑스러워했었는데 그때 내 키를 키운 것은 엄마가 지어온 키 크는 한약도 수영도 아닌, 정상보다 일찍 분비되기 시작한 성호르몬 때문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그 결과 나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전적 키보다도 한참 작은 '키 작은 어른'이 되었다.
다행히? 나는 여자였고 키와 상관없는 직업을 선택했기 때문에, 또 생김새가 그런대로 키에 어울리는 상이라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키에 불만을 갖거나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었다(물론 옷을 살 때마다 길이를 수선해야 하는 수고로움은 있었지만). 남편도 키 작은 나를 늘 귀여워해 줬다. 그러나, 내가 엄마가 되고 나니 '키 작은 부모'는 우리 사회에서 내 아이에게 죄인이었다.
전공의 시절 소아내분비과 성장클리닉에 들어가면, 크게 두 부류의 아이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진짜' 환자들로, 같은 또래에서 키가 3% 미만으로 계속 성장하거나 1년에 4cm 미만으로 자라 성장호르몬 결핍이 의심되는 아이들로 의학적 치료 대상이며 성장호르몬 자극검사에서 결핍으로 진단되는 경우에는 보험으로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을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교수님 왈) '가짜'환자들로, 키가 또래의 3%를 넘고 1년에 4cm 이상 정상적으로 크고 있지만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키가 작아 조금이라도 키를 키워주고 싶은 엄마 마음에 진료실까지 끌려온 아이들이었다. 그럴 때면 교수님은 '애는 문제없고 엄마가 문제'라며 엄마들을 혼내서 돌려보내셨다.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 성장호르몬은 그 자체로 값이 어마어마할 뿐 아니라, 효과를 보려면 장기간 투여해야 하는데 몸무게가 늘어날수록 비용도 천정부지로 늘어나게 된다. 게다가 성장호르몬 결핍이 없는 정상적인 아이에서의 주사 효과는 그 누구도 100% 장담할 수 없다. 돈만 버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 때문에 보호자가 아무리 원한다고 하더라고 의사의 양심을 걸고 불확실한 비싼 치료를 정상적인 친구들에게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키는 중요치 않아, 잘 먹고 건강하면 됐지."
맞는 말씀이다.
하지만,
또 한 명의 '키 작은 부모'인 나는 안타깝게 진료실을 떠나가는 엄마들의 뒷모습을 보며 때때로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성조숙증'으로 외래에 내원하는 아이들도 꽤 많았 는데, 물론 그들의 관심은 역시나 '키'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사춘기가 빨리 와서 최종 키가 작아질까 봐 걱정하는 부모들이 대부분이었다. 진짜(진성) 성조숙증은 여자 아이의 경우는 만 8세 이전에 가슴이 발달하거나,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만 9세 이전에 고환이 발달하는 경우에 의심해볼 수 있다. 그 보다 한참 많은 나이에(그럼 뼈 나이도 그만큼 진행했겠지?) 성조숙증 의심 증상으로 내원하는 아이들은 또 '가짜'환자들로, 사춘기가 빨리 오면 키가 작아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늦게라도 서둘러 성호르몬 억제 치료를 받으려고 온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꽃은 피울 때 피워야 한다. 무조건 꽃을 늦게 피우겠다고 이미 꽃봉오리가 진 나무를 햇볕 안 드는 차가운 곳에 놔둔다면, 나중에 꽃을 피우기는커녕 금방 시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다. 이미 뼈 나이가 한참 앞서간 아이에게 성호르몬 억제 주사는 극약이다. 성호르몬 억제 주사가 사춘기를 미뤄 천천히 오래 크게 만들어준다지만(오히려 성장 속도는 감소한다는 사실) 이미 뼈 나이가 진행했다면 오히려 최종 키에서는 손해를 보게 된다. 사춘기가 조금 빠르게 느껴질지라도 그런 아이일수록 오히려 분비되는 성호르몬의 도움을 받아 더 쑥쑥 잘 클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이를 의학적으로 우리는 '사춘기 급성장'이라고 한다.
우리 무이는 다행히 아직까지는 무럭무럭 자라주고 있다. 인생에서 신체적 급성장기는 총 두 번 찾아오는데 그중 한 번이 앞서 말한 사춘기 급성장이고, 또 다른 한 번이 바로 유아기다. 미숙아로 작게 태어난 아이들도 2살까지 따라잡기 성장만 잘한다면 얼마든지 크게 크게 자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무이가 엄마인 나를 닮았다면, 사춘기가 빨리 올 수도 있고 결국 키가 작을 수도 있겠지. '가짜'환자들은 의학적으로는 물론 정상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키 작은 어른'으로 성장한다면 과연 앞으로 이 사회에서 정말 아무 차별 없이 살 수 있을까. 직업을 선택할 때, 또는 배우자를 선택할 때 내가 물려준 유전자 때문에 고배를 마셔야 한다면?
아마도 나도 '가짜'환자의 문제 있는 엄마가 되길 자청할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사랑만 먹고도 키가 쑥쑥 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