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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예 May 12. 2020

9. 웅녀

웅녀


그렇게나 보름달이 뜰 때마다 제발 행복하게, 제대로 살게 해달라고 웅녀처럼 빌고 또 빌었는데, 항상 불행은 내 뒤통수를 치고 잽싸게 달아난다.


원래 불행은 항상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우연히 교회에서 받게 된 치매 검진에서, 어느 날 랜섬웨어에 감염되어 버린 노트북으로부터, 아무 생각 없이 내리던 인스타 피드 속에서, 또 여느 날과 같은 퇴근길에서.


불행은 그리도 짜릿하고 흥분되는 일이라 쉽게 사람들을 잠식시킨다.


돼지


본원에 다시 오면서부터 생긴 왼쪽 무릎과 왼쪽 팔의 멍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불과 지지난턴에 응급실 인턴이었을 때는 피골이 상접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살이 빠졌었는데, 불과 두 달만에 살이 너무 불어버려서 꼴사나운 모습이 되었다. 나는 피둥해진 무릎과 팔꿈치 부위에 시퍼렇게 생긴 멍 자국을 보면서 흡사 도축 당한 돼지가 된 느낌마저 들었다. 가방끈 긴 돼-지. 몸 쓰는 일이라고는 하지 않고 있는데 허둥대느라 항상 이런 상처들이 생긴다. 나는 모든 걸 허겁지겁 하려고 들어서 계속 날이 서 있었다. 매일 피곤하지만, 매일 잠이 잘 오지 않고, 헛된 생각을 했다. 나라는 인간은 참으로 쉬워졌는데, 하루하루 버텨내는 건 어렵게 느껴졌다.


다들 말턴이 되면서 - 전편을 참조 - 레지던트가 될 생각에 조금을 들떠 보이기까지 하는데, 나만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지원하는 정신건강의학과는 경쟁이 꽤나 센 편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불합격 통보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의대에 진학하는 순간부터 정신과 의사가 되는 것 외에 다른 진로는 생각해  본 일이 없어서 더욱이나 걱정스러웠다.


솔직히 그 시절에 나는 티는 안 냈지만, 확실히 우울했다. 정신과 의사가 될 인간이 우울증에 빠진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계속 모른 했지만, 나는 반복되는 일상과 부족한 잠, 복잡한 인간관계들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밤이 되면 맥주 한 캔이라도 마셔야 했고, 알코올 없이는 잠들기가 어려웠다. 그런 아주 상처받기 좋은 상태로 평이 안 좋은 과에 가려니 나는 걱정부터 앞섰다.


아, 다 때려치고 싶다.


나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밤늦게 일을 끝내고 젖은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잠이 쏟아져서 베개 위에 수건을 놓은 채로 고개를 뉘이며 중얼거렸다.


힘든 건 싫어..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정말 나를 힘들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까짓 수면 부족이나 밀려드는 일들이 아니라는 것을.


결국 내가 마음 졸이다가, 얼굴을 붉혔다가, 끝내는 눈물을 터뜨리게 만드는 건, 사람이었다.


닮은 사람


인턴이 과를 옮기거나, 전공의들이 타병원에 파견을 가는 것을 로테이션이라고 한다. 말그대로 순환 근무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악명 높은 과에 로테이션을 한 첫 날부터 잔뜩 긴장했다. 그 과에는 내가 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지만 썩 친하지 않은 선배들이 몇 명 있었고, 말 한 번 섞지 않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이 못 되는 나로서는, 어줍잖게 얼굴만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윗년차로 있다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주말 내내 인턴 job들을 처리해두고 월요일에 첫 출근을 해서는 쭈뼛거리며 전공의 선생님들에게 인사했다. 나중에 그에게 들었지만, 내가 스무 살 예과 1학년 때부터 보였던 의례 그 어색할 때 짓는 웃음이었다고 한다. 내가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와 이미 알고 있던 선배들은 내게 퍽이나 친절하고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나답지 않게 긴장의 끈을 조금 놓았던 것 같다. 나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나를 어려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는 내 좋지 않은 첫인상 때문일 거라고,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늘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내가 그와 친해질 수 있었던 건, 내게 있어서도 아주 예외적이고 우스운 일이었다. 다른 것을 다 떠나, 그 동안 들어왔던 그에 대한 평판이나 이야기와는 별개로 그와 나는 전공의와 인턴으로서도 쿵짝이 잘 맞았다. 그 동안 접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와 나는 학번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고,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공통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는 내 동기들로부터 그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들을 주워 들은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다지 바람직한 내용의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의 평생을 황당한 소문들의 피해자로 살아온 나로서는, 그와 몇 마디를 나누자마자 알아챘다.


아, 이 사람, 드러나는 게 전부가 아니구나.


난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성적으로가 아니라, 그라는 인간이 마음에 들었다. 나 자신을 감추는 데 능숙한 사람은 비슷한 사람들을 잘도 알아본다. 그리고 마음 속에 비밀이 있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아주 매력적이라, 누구든 그 껍질을 한 꺼풀 벗겨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 마련이다.


그는 거울을 자주 봤다. 나는 그게 좀 웃겼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왔거나 가까이 지낸 남자들은 외모를 크게 가꾸거나 신경쓰지 않았고, 애석하게도 청결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항상 깔끔하게 다려진 무채색의 옷을 입고, 머리카락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재빨리 정돈을 하는 그의 모습이 신기했다. 그는 확실히 결벽이 있었다.


J를 비롯하여 그 과를 거쳐간 인턴들은 그가 좀 예민한 편이라고 말을 했는데, 내가 보기에 그는 그냥 애같았다. 기껏해야 열 여섯, 잘 봐줘야 열 여덟 살쯤? 분명히 본인은 감춘다고 감추는 것 같은데,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면 입가가 비틀리는 게 눈에 보였다. 가끔은 듣기 민망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도 했는데, 나는 그냥 그런 점이 좀 귀엽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는 또 아주 짜증나는 구석이 있어서, 내가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시덥잖은 장난을 치거나 귀찮게 굴기도 했다. 또 내게 아주, 아주, 아주 많은 일들을 시켰는데 나는 밤 늦게까지 그가 남긴 일들을 하다가 기어코 코피를 쏟고는 했다. 그리고 그 많은 일들을 시키고는 타자기를 타닥거리는 내 옆에 서서 야, 빨리 해 빨리 해, 얼른 해, 야, 야, 라고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그러면 나는 아주 신경질이 났지만 차마 윗년차에게 화를 낼 수는 없어서 특유의 무표정을 더욱 굳힌 채로 일에만 몰두했다.


나는 가끔 그를 훔쳐 보았다. 왜냐하면 그가 일하는 모습이 이따금 아주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일을 할 면 거의 항상 덴탈 마스크를 썼는데, 그러면 그의 눈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속눈썹 길다..'


나는 그 옆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하고는 했다. 그는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긴 축에 속했는데, 내게 늘 보이는 그 장난스러운 태도 때문에 나는 그걸 자주 잊었다. 그러다가도 그가 입을 꾹 다문 채로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 새삼 그 끝이 둥그런 눈매라든지, 그 위로 흩어져 있는 길다란 속눈썹이라든지, 하얗고 깨끗한 피부 위에 수 놓은 듯한 눈썹결이나 이런 것들이, 참 잘도 생겼다, 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외모와는 관계 없이 그가 어린 아이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는데, 이로 인해서 사실 아주 방심하고 있었다.


그 날이 있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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