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겨울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이 계절만 되면 매일 아침에 일어나는 것조차 버겁다. 학창 시절부터 겨울은 한 학년이 끝나고 그다음 학년을 준비하는 시기였고, 나는 새롭게 만나게 될 친구들 사이에 제대로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것인지, 반이 바뀌어도 지금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또한 코 앞으로 다가온 수능은 제대로 치를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로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유난히 추웠던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상한 연어를 먹고 일주일을 꼬박 앓았다. 학원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거의 흘러내릴 듯이 버스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팠다. 그 뒤로도 자주 아팠지만 그때만큼 서럽게 아파했던 경험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난 겨우 집 현관문을 열고 내 방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불속에 웅크려서는 내 몸에서 나는 병자의 냄새를 킁킁거리면서 약 기운에 몽롱한 채로 수학 문제집 진도를 걱정했다.
나는 유난히 손발이 차다. 어렸을 적부터 엄마는 내 침대로 슬그머니 들어와 발을 갖다 대곤 소스라치게 놀라고는 했다. 너 왜 그렇게 발이 차니. 스물여섯 막바지가 되도록 나는 단 한 번도 따듯한 손발을 가진 적이 없는데 엄마는 항상 놀랐다. 너 그렇게 발이 차서 어떻게 하니, 양말이라도 신어라. 그러나 나는 양말을 신는 것이 싫다. 손발이 시려서 나는 때때로 겨울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추웠지만 이 점에 대해 걱정해 본 적은 없었다. 내 손을 잡아주던 사람들은 항상 뻔한 레퍼토리로 나를 위로했다. 걱정 마, 나는 겨울에도 손이 따뜻하거든.
사실은 상관없었다. 손 따위야 장갑을 끼면 그만이었다. 손이 차고 말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집으로 돌아와 차디찬 손끝으로 옷을 벗어낼 때, 건조한 맨 살에 그것이 닿으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쓸쓸함이 느껴진다는 것이, 그런 것이 문제였다.
외로움은 뿌리가 깊어서
나는 거의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더 자주 마셨다. 나는 의대 동아리 중에서도 술을 많이 마시기로 유명한 동아리 둘에 속했었는데, 그 두 동아리 모임에서 바톤터치하듯 이어지는 술자리에 참여하느라 나는 일찍이 술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오히려 친한 친구들과 만나면 술 대신 커피를 마셨다. 동아리 술자리에만 익숙해진 나는 내 의지로 술을 마음껏 퍼먹을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누군가 내 술잔을 계속해서 채우고 어서 먹어, 씁, 밑잔을 깔면 쓰나,라고 말하며 술잔을 부딪쳐주지 않는 한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취할 수 없었다.
초겨울의 어느 날 나는 내과 인턴 중에 어렵게 시간 맞춰 나온 오프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태원에서 녹사평으로 넘어가는 언덕길에 위치한 맥주집에서 친구들과 샘플러를 홀짝거리며 지난 연애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썸만 타다가 흐지부지 되어버린 3년 전 일에 대해서 - 하얗고 미끌미끌한 남자에 대해서 - 계속해서 떠들어댔고, 친구들은 아직까지도 그렇게 난리를 칠 거면 차라리 연락을 해보라고 했다. 나는 호기롭게 아 알았어 알았어하면 되지 하면, 이라고 말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를 원하고, 보고 싶고, 같이 하고 싶은 것보다 상처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훨씬 더 컸다. 연락을 했을 때 내가 바라던 반응이 없다면, 그 후에 내가 느끼게 될 거절감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내 마음은 그렇게나 연약한 살결을 가져서, 외로움이 지나칠 때마다 잔뜩 흠집이 났다.
나는 완전히 고삐가 풀려서 배가 거북해질 때까지 안주를 집어 먹었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술버릇이 먹는 거야.."
친구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의대 동기들 모임이었다면 나는 포기하지 않고 한 마디 덧붙였을 것이다.
"나 frontal(전두엽)이 나갔나봐.."
전두엽이 손상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 종종 병원 내에서의 가십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주로 누가 누구랑 잤다느니, 누가 누구랑 바람을 피웠다느니, 누가 윗년차에게 욕을 했다느니 그런 이야기들- 의대 동기들과 나는 어머어머, 웬일이야, frontal 나갔나 봐,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술에 아무리 취해도 놓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건 나의 id(이드)만큼이나 강해서 술에 취해 전 남자 친구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도, 아무 남자나 붙잡고 하룻밤 같이 보내고 싶은 마음도 이겨냈다. 난 무엇보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항상 몸을 동그랗게 만 아마딜로처럼 잔뜩 웅크려서는 누가 누가 내게 상처를 줄 것인지 감시하며, 두 눈만 도록도록 굴렸다.
더부룩한 배를 쥔 채로 올라탄 택시에서 기사 아저씨가 라디오 볼륨을 줄이며 뭐라 뭐라 말을 걸었다. 나는 너무 취해서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기사 아저씨가 약간 빈정 상한 듯한 말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술을 마시는 것조차 누군가 옆에 있어줘야 한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아직 겨울이 미처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이미 손이 잔뜩 차가워진 느낌이었다. 그 어떤 누가 손을 잡아준대도 곱은 손을 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차디찬 맥주 때문인 양, 손에서 병맥주를 놓지 않은 채 쿨한 여자 행세를 하며 지냈다.
끝내고 시작하는 계절
그 겨울에 나는 가장 나답지 않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나다웠다. 나는 내가 반복한 실수를 또다시 저질렀다. 아주 바보 같고 끔찍한 실수를.
그건 사고였다. 그렇지만 명백한 내 과실이 있는 사고였다. 그 해 봄에 남자 친구와 헤어진 이후로 나는 몇 번의 소개팅과 몇 번의 가벼운 술자리들이 있었지만, 도통 아무런 의욕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그 시기에 나는 인기가 좋아서 카카오톡 대화창에 쉴 새 없이 빨간 새 메시지들이 도착했는데,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난 그저 마음 맞는 인턴 동기와 업무가 끝난 새벽에 인턴 휴게실에서 맥주 피처병과 아주 독한 증류소주를 두고 새우깡을 우적거리면서 술을 마셨다. 난 친구들이 걱정할 정도로 술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우스운 점은 술에서 깨고 나면 능률이 너무나도 좋아서 일을 하는 과마다 교수님들이 칭찬을 해주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 모든 상황들에 환멸이 났다. 내 가면이 갈수록 두터워지고, 아무도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 그 시기에 나는 불특정 다수에게 충분히 주지 않을 수 있던 상처들을 줬다.
내가 더 나빴던 것은 내가 상처 받은 체 했다는 점이다.
인턴들은 보통 4주 단위로 과에서 과를 옮겨 다닌다. 내가 그를 만나게 됐던 건 인턴의 막바지 중에서도 아주 막바지였다. 보통 그런 상태를 '말턴'이라고 부른다. 말턴과 인턴은 전혀 다르다. 말턴 때는 모든 과 곳곳에서 레임덕이 일어난다. 주치의가 오더를 내려도 몇 시간 째 인턴이 나타나지 않아 주치의가 대신 인턴 일들을 하고, 이런 나태함에 대해 혼쭐을 내주려고 연락을 해도, 인턴이 연락이 되지 않아 혼을 낼 수조차 없다. 우리 말턴들은 인턴 숙소에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의 핸드폰을 바구니 하나에 모아 두고, 가장 먼저 울리는 핸드폰의 주인이 그 날 하루 모든 콜들을 처리하는 내기를 하기도 했다. 인턴 초반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미 술기의 달인이 되어버린 우리들은 예전에는 1시간이 걸렸을 일들도 10분 안에 후딱 해치우고는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벌러덩 누워있고는 했다.
불량한 말턴 중 한 명이었던 나는 심드렁한 마음으로 인턴 숙소에서 짐을 쌌다. 우리 병원은 곳곳에 분원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분원으로 가야 했기에 짐이 아주 많았다. 게다가 내가 다음으로 가게 될 과는 다소 악명이 높은 곳이어서 말턴의 삶을 즐기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와 진짜 불쌍해."
내가 짐을 싸고 있었더니 친한 동기 언니가 커피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옆에서 화장솜과 크록스, 세면도구들을 같이 내 트렁크에 밀어 넣으면서 언니가 말했다.
"진짜 불쌍해."
"아, 왜."
나는 그렇게 말하며 언니를 툭 밀쳤다. 작은 체구의 언니가 옆으로 살짝 밀리더니 웃으면서 나를 다시 밀었다. 우리는 외모도, 성격도 비슷한 점이 많았는데 그래서 인턴 시절 내내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아니 거기 일 진짜 많대. 레지던트쌤들도 완전 빡세대."
"지금 그 말 오십 번째 들음."
"아니 진짜 장난 아니래."
언니는 특유의 '아니-'하고 시작하는 말투로 그 과가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안 좋고, 얼마나 일이 많은지에 대해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근데 특히 진짜 일 많이 시키는 사람이 있대."
"어 나도 들었어."
"J는 그것 때문에 우울증 올 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특히 같은 학번 동기 남자인 J는 그 과를 거쳐간 이후에 의사 생활 전반에 대한 회의감을 호소하고는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J는 그 과를 도는 4주 내내 제시간에 퇴근해 본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 와중에 윗년차였던 그 사람과 자주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나는 J와 아주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인턴 휴게실에서 J가 하소연하는 것을 한 동안 들어준 기억이 있었다.
"아 됐어 하라면 그냥 하면 돼. 대가리 박으라면 박는 거임."
"여윽시 꼰대 마인드."
나는 말투가 거칠었다. 그러면 언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나는 그런 점이 좋았다. 이제 다른 병원에 가게 돼서 언니와 헤어지는 점은 아쉬웠지만, 일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일이야 뭐, 하면 되는 거니까. 일은 그냥 시키면 하면 되는 거다. 나는 그런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나는 인턴 막바지에, 평화롭고 여유로워야 할 말턴에, 아주 안 좋은 일을 겪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