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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폰더 Feb 20. 2023

꿈에 기웃거리기

    오래전에 철학자 강신주 작가가 한 강연에서 '꿈'이라는 건 아주 무서운 거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꿈은 한 번 가지면 그걸 이룰 때까지 마치 귀신처럼 그 주변을 평생 어슬렁 거리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이루고 나야 마침내 그만두든 포기를 하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래도록 미련으로 그 주변을 맴돌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법고시를 몇 년째 준비하고 있는 고민남에게 일단 시험에 통과해서 그 일을 해보고 결정하라고 조언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확 끼쳤다. 그때까지 나는 꿈이 많았지만 실행력이 없었기 때문에 평생 어느 것도 이루지도 못하고 그 주변만 어슬렁 거리는 혼령이 될까 순간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여러 꿈 중에 내가 기억하는 가장 최근은 연구원이었다. 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시작해 학위 과정만 4년을 했고 석사, 박사 논문까지 하면 거의 5년이 넘는 시간을 연구에 매진했다. 10년 넘게 하던 강의 일도 파트로 전환하며 학업에 열중했다. 돈은 훨씬 적게 벌었지만 행복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주도적으로 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제대로 느꼈다. 학문의 세계는 넓고 방대해서 때론 길을 잃고 헤매지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제 곳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회귀성은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을 줬고 깊은 고독이 몸에 베인 내게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남들보다 빠르게 박사 학위를 받으며 연구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나는 당연히 교수나 연구원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바닥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연줄이 중요했고 학벌이 중요했다. 해외 유학도 다녀오지 않고 국내 학위로 영어학을 전공한 지방대 출신 나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심지어 10년도 더 전에 받은 학사 학위도 영향을 주었다. 강사법이 제정되면서 기존에 있던 시간 강사까지 다 정리되는 판국에 시기도 좋지 않아 서류는 말 그대로 '광탈'을 했다. 그 와중에 지도 교수님은 4-5년 더 공부하다 보면 기회가 오지 않겠냐는 말씀을 하시며 계속 연구하길 권하셨는데 나는 그게 마땅치 않았다. 이미 5년을 매몰했는데 5년을 더? 그러기엔 나는 이미 30대 후반이었고 장담할 수 없는 미래에 내 시간을 걸고 싶지 않았다.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자기 설득과 합리화의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수 도 없이 생각하고 상상했다.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니 목표는 이룬 거라고. 그리고 이 바닥의 생리는 나와 맞지 않다고. 지나치게 관습적이고 편협하고 수직적인 구조를 견딜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최선을 다 했고 어쨌든 결과를 냈으니 그걸로 된 거라고. 그러면서 그동안 쌓아온 자료와 노트, 전공 서적과 수집한 해외 서적들 모두 정리해서 버렸다. 다 내다 버려야 손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학위 증명서는 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먹고 다 정리한 후에 가끔 오는 교수님 연락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가끔 하이브레인넷(교수, 연구원, 강사 네트워크)을 들여다보긴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꿈을 맴도는 귀신'이 되지 않기 위해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연구와 작별했다. 새롭게 시작한 번역 일도 자료 조사나 내용 분석이 연구와 비슷한 면이 많아 나와 잘 맞다. 번역에 관한 많은 책을 참고하고 온라인 아카데미를 들으며 배움에 대한 갈망을 채웠다. 소논문이 쓰고 싶을 땐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면 된다. 어릴 적 여러 꿈 중 하나였던 프리랜서도 이루었으니 더할 나위 없다. 불규칙한 수입이 가끔 나의 숨통을 조여 오지만 자유와 시간을 얻는 대가이니 견딜만한 가치가 있다. 


    꿈을 갖는 건 무서운 일이지만 꿈을 포기하는 건 위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돌아봤을 때 후회가 없는 선에서 멈출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최선을 다 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다만 그 '멈춤 선'의 결정은 빠를수록 좋은 것 같다. 숙고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되 결정은 빨라야 미련을 덜 남기고 잘 이별할 수 있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사실 내 안에 꿈 주변을 맴도는 혼령이 몇 개쯤 더 있다. 인생은 새로운 꿈을 갖기에도 너무나 짧기에 살아가며 과거의 것은 하나씩 잘 이별해 주려고 한다. 어쩌면 그것이 세상과 타협하는 비겁한 방법 중 하나겠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나를 인정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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