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감상문
책을 붙잡고 눈이 동그래져서는 홀린 듯이 책장을 넘겼던 것 같다. 1초라도 빨리 다음 이야기를 읽고 싶은 마음과 단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음미하고 싶은 마음이 씨름했다. 그래서 급하게 책장을 넘기다 말고는 다시 앞 장으로 돌아와 문장을 곱씹는 일을 자꾸 해야만 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서사는 그만큼 흥미로웠고, 그걸 살리는 문장은 그만큼 풍성했다. 1독을 마치고 1년 6개월 만에 2독을 마쳤다. 전자책이 아닌 종이책으로 읽는 느낌은 새로웠다. 충격적인 전개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더 여유 있게 글을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만 같던 여운에 휩싸여 아무 감상도 남기지 못했던 1년 6개월 전과 달리, 조금의 감상을 남길 수 있는 만큼이 된 것 같다.
1. 본격 사랑 소설
박민규라는 작가를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박민규를 관통하는 키워드라면 아무래도 '약자'와 '유쾌함'일 것이다.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박민규의 철학은 결국 '약자에 대한 사랑'이다. 지구영웅전설에서는 강대국의 논리에 치여 사는 약소국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는 자본주의 사회 경쟁에서 뒤처진 패배자들이 '약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전작 소설에서는 강자의 모순된 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통찰로, 혹은 약자들이 강자들에게 소소하게나마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통쾌함의 모습으로 약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래서 마치 탈춤의 탈이 활짝 웃고 있듯, 전반적으로 유쾌한 글투를 유지하는 게 박민규의 스타일이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과감하게 유쾌함을 잘라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유쾌하지 않다. 시니컬하지도 않다.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를 묵묵하게 받아들이고 이겨낸다.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상처가 덧날까 봐 불안해하지도, 상처를 덮어놓고 외면하지도 않는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서술 덕에 그런 쿨하고 무심한 주인공의 색채가 글 전반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덕분에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얌전하게 진행된다. 약간의 유머나 시니컬함은 요한이 담당한다. 퍽퍽해질 수 있는 진행에 요한을 양념 삼아 소설은 힘 있게 나아간다. 그렇게 소설에는 '사랑' 특히 '약자에 대한 사랑'만이 진하게 남는다.
못생긴 그녀, 잘난 외모의 남편에게 배신당한 주인공의 어머니 등, 외모지상주의 사회의 적자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못생긴 패배자들은 이 소설에서 약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단순히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당해야 했던 수많은 못난이들의 아픔을 섬세하게 어루만진다. 특히 그녀가 주인공에게 보낸 30페이지가량의 편지 전문은 압권이다. 여섯 살 때 또래 친구에게 놀림을 당하며 처음으로 격리를 경험하고, 못생긴 애가 꾸미면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일까 봐 화장도 못하고 살아왔던, 사랑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살았기 때문에 사랑으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삶을 작가가 직접 살아본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30페이지를 통해 소설은,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무심코 하고 있을 숱한 언어폭력들을 고발하고, 그 언어폭력들이 당사자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2. 현실은 무엇인가, 현실적인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상상력 없이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돈도 결국 모든 인간이 똑같은 상상을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가치이다. 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종이 쪼가리이지만 어떠한 가치가 있다고 모두가 믿기 때문에 가치가 생긴다.
모든 현실은 상상의 결과이다. 대부분의 가치는 그것이 가치 있다고 믿는 상상력의 결과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금과, 다이아몬드가 그러하다. 사람들은 그러나 이런 가치를 좇는 것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가정을 꾸리고, 좋은 것들을 먹고 마시며 사는 삶을 꿈꾸는 사람을 보고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그게 모두 인간이 가치 있다고 다 같이 믿는 '상상력'의 결과임은 간과하기 쉽다.
예쁘다는 것도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별로 대표적인 미인의 상은 천차만별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쁘다고 믿으면 예쁜 것이 되고 예쁜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을 예뻐할 거라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여러 매력적인 표정, 몸짓, 말투 등을 추가적으로 갖게 된다.
본문에서는 ‘빛이 들어오면 유리의 윤곽이나 모양은 모두 사라지고 빛만이 보여. 결국 어떤 못난 전구도 빛이 들어온다면 어느 불 꺼진 전구보다 아름다워져’라고 표현한다. 사람들의 생각이 그 사람을 빛나게 한다.
‘예쁜 사람은 사랑받는다.’는 사실 ‘사람은 사랑받아야 예뻐진다.’ 였다는 것이다.
모두 함께 '이게 예쁜 거야.'라고 상상하고,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그 불빛 때문에 마침내 비로소 예뻐다. 불 꺼진 전구가 아무리 예뻐도 빛나는 전구보다는 예쁘기 어렵다.
3. 사랑은 꿈인가 현실인가
사랑은 꿈같다. 꿈처럼 달콤하고 꿈처럼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가능하게 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못생긴 사람도 예뻐 보이게 하고, 내 전부를 다 버리고서라도 희생하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그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주는 거'라는 본문의 대사처럼 사랑은 그 사람이 사랑받을만하기 때문에 하는 등가 교환의 거래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상상하고 그 상상이 현실을 바꾸는 현상이다.
상상이기 때문에,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이 가치가 없다고 오독해서는 안된다. 소설에서는 그 상상이 결국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역설한다. 결국 상상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아름다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돈, 명예, 남들만큼은 살고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은 인생을 살면서 꼭 필요한 느낌은 아니다. 그게 꼭 필요한 것들이라고 '상상'할 뿐이다. 정작 가장 중요한 상상은, 지금 내 옆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상상'해주는 일이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약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건, 못생긴 사람들이 아니라 잘못된 '상상'을 하며 헐떡대며 살아가는, 그래서 내 애인보다 더 돈 많고 예쁜 사람에게 흔들리는, 대부분의 '우리' 보통 사람들이 아닐까.
4. 2독째임에도 불구하고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책장 넘기는 속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누가 죽었고, 누구랑 누가 결혼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걸 다 알고 있는데도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버틸 수가 없었다.
책에 깊이 공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의 못생긴 추녀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 돈도, 명예도, 능력도 없는 사람을 사랑할 자신이 없다. 위선자가 된 기분이지만 그래도 인생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는 없다.
지금 내 애인은 예쁘고, 능력 있고, 자신감이 넘치고,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안다. 입은 상처보다는 치료해줄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책 속의 주인공처럼 눈에 띌 정도의 추녀가 돼본 적은커녕,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사랑하고, 시시해지지 않도록 상상해줄 것이다. 나이가 들고 지금 갖고 있는 모든 게 시들어도 절대 시시해지지 않도록 끝없이 사랑해주고 사랑받아야겠다. 부족한 나에게 주어진 과분한 이 선물이 빛을 잃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뿐이지 않을까 싶다.
아마 이 책은 3년 뒤, 10년 뒤, 30년 뒤쯤 한 번씩 더 꺼내서 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