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음을 명심해
엄마가 밤하늘 위를 흐르던 눈을 창가에서 바라본다.
"얘들아~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_</"
엄마는 골목길에 눈이 쌓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안방 창가에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한다. 그 모습을 카메라를 들이대며 기록하는 내가 있다. 서른살 넘은 장성한 자식이 앞으로 몇 해나 더 본가에서 살까? 앞으로 며칠이나 부모와 연말을 함께 보낼까? 그런 날은 이제 많아 봐야 다섯 손가락안에 꼽을 거 같다. 인구학적 통계자료를 뽑으면 더 실감난다. 환갑을 넘긴 부모의 기대수명은 길어야 앞으로 20년이다. 조혈모 세포이식을 앞둔 엄마는 까딱 잘못하면 10년도 아슬아슬하다. 올해 병원 안 옮겼으면, 올해 크리스마스도 이리 평온하지 못했겠지.
요즘 들어 부쩍 생명의 유한함을 절감한다. 세상만사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엄마는 아빠를 만나 나를 낳았고 동생을 낳았다. 엄마한테는 아빠가 있는데, 나는 없잖아. 우리 가족 지금은 딱 좋은데, 앞으로는 어찌하리오. 아들이나 딸이나 이제 부모없음의 삶도 슬슬 준비해야하는 것 아니오? 어미가 주고 아비가 배푼 그 사랑. 어떤 자비,연민,환대 기타 등등...부모가 물려준 것의 무언가를 긍정하면서 사는 녀석들이 요즘 거의 없어서 나랑 동생이 지닌 심성은 엄청 유니크함. 귀함. 이건 돈으로도 못사는 거임. 자식들 나름대로 이어가야 마땅하리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혼자 사는 게 재밌을 팔자가 아니다.
애인과 친구는 별개. 내 삶도 그것과 온전히 분리. 빚지는 거 없이 취향 기반 소비에 몰두해서 사는... 예컨대 백화점에서 수백만원짜리 북유럽 가구가 모셔진 쇼룸을 구경하는 게 진심으로 즐거울 순 있어도, 그걸 집에 모셔두고 안온하고 무해한 환경을 조성하며 마냥 오래오래 행복해 할 팔자는 아닌 거다. 안온하고 무해하다는 말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 말을 잘 믿지도 않는다. 너무 말끔한 사람들 속에서 표백된 세계를 추구하는 건 좀 지루하지 않나? 아무튼.
책임질 수 있는 혼돈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순환을 부르지 않을까? 나는 올 해 외갓집 큰사촌누나의 돌잡이 아기를 품에 안고 젖병을 물렸을 때 느꼈다. 젖병을 세차게 빠는 젖먹이의 숨소리와 심장고동같은 걸 느끼면서 이 자체가 내게 자연으로 다가왔다. 머리로는 안다. 내가 맡은 건 24시간의 24초도 안된다는 걸. 생명을 이 땅 위에 탄생시켜 기르는 건 터무니 없이 어려운 일이란 걸. 고단한 책임감이 뒤따른다는 걸. 특히 내가 그런 걸 갖기엔 자원이 모자른 편이란 걸 통렬하게 인식했다. 남들의 몇배나 되는 노력과 뒤따르는 세월이 필요할지도.
그럼에도 주어진 팔자 안에서 사랑을 발명해야 한다.
사랑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책임지는 삶.
이것이 내 인생에 결정적인 의미일 거라는 확신.
달콤한 경험만 하며 살지 않았다. 어처구니 없는 일도 많이 겪었다.
이 확신은 내게 주어진 경험을 경유하며 얻어낸 것이다.
이것이 나의 사랑을 점점 구체적이게 만든다. 강하게도 만든다.
나의 사랑은 퇴근길에 타코집이나 김밥집 간판을 바라보고 잘 먹는 식구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나의 사랑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와서 사랑하는 이를 케이크 앞으로 부르는 것이다.
나의 사랑은 사랑하는 이가 거기에 촛불을 붙이며 손뼉치게 만드는 것이다.
나의 사랑은 건강검진을 앞둔 이의 보호자가 되어 개인비서일을 도맡는 것이다.
나의 사랑은 튀김을 즐겨먹지 않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새우튀김이라며 엄지를 치켜들게 만드는 것이다
나의 사랑은 당신이 먹어본 돈까스보다 더 맛있을 수도 있는 돈까스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나의 사랑은 대통령도 일정을 째고 먹으러 온다는 북어국집에 당신을 데려와 내일 먹을 거리를 미리 포장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은 작년에 당신과 함께 본 백화점 앞 눈요깃거리를 올해 또 보러가는 것이다.
요즘 엄마를 향해 배푸는 사랑이 요즘 연배도 맞고 뜻이 맞는 여성들이 욕망하는 것과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올바르게 살고 있으면, 인연이 온다. 곧.
내겐 요즘 보기드문 사랑이 있다. 알고 지내거나 새로 사귀는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이식하는 것이 내년에도 계속 이어진다. 거듭 선언하고 있지만, "식구들이 건강하고, 매일밤 안부 물으며 서로 품에 쏙 안길 사람만 있으면 요즘 완벽하다." 직장에서 쏟는 에너지소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남는 여력으로 내게 가장 절실한 사랑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나의 결여를 해소하는 참된 길이라는 것.
내게 절실한 결여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차근차근 대응에 나서면, 결국 세상이 알아주더라. 니가 뭔데 그런 말을 하냐구요? 16년차 베테랑 디자이너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프로게이머 사진을 잘 찍는 사진작가도. 반년만에 수십만명 구독자를 만든 인플루언서도. 그렇게 말하던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