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피의 기쁨과 슬픔
#별 게 아니지만 아주 별 거인
브랜드 전략실의 디자이너 김수윤 피디(이하 쑤디)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고 나서 내가 쑤디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근데 진짜 별 거 없다, 난 할 얘기가 별로 없다’였다. 이유는 본인 인생이 너무 평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급기야 할 말이 진짜 없다면서 인터뷰를 서면으로 해도 되지 않겠냐는 농담을 던질 정도였으나, 역시 모든 일은 까보기 전까진 모른다고. 카페 소파에 앉기 전까지도 별 거 없다고 손사레를 치던 쑤디는 소파에 앉자마자 자신의 소소하고 작았던 기쁨과 슬픔을 모두 털어냈다.
<유.기.슬>을 연재하면서 아직 알아가야 할 유피들의 이야기가 많지만 쑤디의 기쁨과 슬픔은 여태까지 들은 것 중에는 가장 귀엽고 아련한 일화임이 분명하다(아주 본인 다웠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이 귀엽고도 마음 아픈 서사의 주인공은 바로 쑤디의 강아지, 아롱이다. 아롱이를 처음 만났던 날은 시간을 약18년 전으로 돌려, 쑤디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 마음은 갖고 있다만, 대개 부모님의 반대라는 한계에 부딪힌다. 나 역시도 그랬다. 집에 동물을 들인 적이라고는 어렸을 때 임시 보호 차원에서 2주 정도 강아지를 데리고 온 게 전부니까.
여기서 잠깐 눈을 감고 상상해보자. (아니지. 눈 감으면 글을 못 읽으니까 하여튼 알아서 머리에 그려보자.) 9살, 초등학생인 당신… 세상에 강아지라는 귀여운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두어해 동안 간절히 강아지를 키우자고 부모님께 졸랐지만 늘상 거절당해왔다. 밖에는 눈이 오고 내일은 크리스마스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조용한 집에서 그냥 저냥 누워 있었는데 전화가 온다. 부모님이 1층으로 내려오라고 하신다. 선물이 있다는 말과 함께. 열심히 내려갔더니 귀여운 아기 요크셔가 부모님 손에 들려있다. 이제부터 우리 집에서 같이 살 거란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면서. 어떤 감정이 느껴지는가.
직접적으로 경험한 상황이 아닐지라도 그 때의 행복과 기쁨이 초등학생 쑤디에게 얼마나 크게 다가 왔을지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누군가에겐 그다지 거창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가장 벅차고 기뻤던 순간으로 기억될 만 하다. 사실 되고도 남는다. 유년에 그렇게 큰 선물을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받았는데, 이보다 더 영화 같고 동화 같은 일이 어디 있을까.
쑤디네 집에서 아롱이는 무럭무럭 자라 새끼들도 낳고 건강하게 십년을 컸다. 앞서 말했듯 난 반려동물을 키운적 없어 그 기분을 잘 모르지만 대강 이해는 하고 있다. 반려 동물의 존재가 곧 가족이나 다름 없다는 걸 알고 있단 뜻이다.
이런 사실을 증명하듯 쑤디의 슬픔도 아롱이의 마지막과 맞닿아있다. 조금 슬픈 이야기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게 좋겠다. 쑤디가 서울에 올라와있고, 부모님은 해외에 나가 계실 때 아롱이는 친척 누나 분에게 맡겨졌다. 문을 잠깐 열어놨던 사이에 밖으로 뛰쳐나간 아롱이는 차에 부딪혔고, 숨이 붙어있긴 했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쑤디는 이 상황을 아주 차분하고 덤덤하게 설명하면서도 건강했을 때 떠나 마음 아팠고, 가족들이 그 곁을 오래 지키지 못해 더 미안했다고 했다. 가족들도, 쑤디 본인도 많이 울어서 자신의 기억 중 가장 큰 슬픔이었단다.
평생을 함께 해온 반려동물을 잃은 기분은 어떨까. 슬픔과 헤어짐을 아주아주 싫어하는 나에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감정이라 쑤디의 모든 마음을 헤아릴순 없었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쁨도 슬픔도 사실 참 별 게 없구나. 어쩌면 쑤디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에겐 늘 함께해줬던 반려동물을 처음 만나고 떠나 보냈던 순간이 기쁨과 슬픔에 가장 가까이 있으니. 진짜 별 거 없지만 한편으로는 더없이 크고 무게감이 있는게 각자의 기쁨이고 슬픔이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이 글을 다 완성해갈 때 즈음 나는 더 열심히 섬세하게 유피들을 들여다 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별 게 아니지만 아주 별 거인 각자의 이야기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열심히 듣고 또 써봐야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