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도토리 묵이 먹고 싶다. 이를 어쩌지...
내가 일하는 치과는 조그마한 공원처럼 조성된 하나의 단지(여기서는 campus라고 한다)에 자리 잡은 4층 건물이다. 하나의 상업용 단독 건물을 짓고 그 주변에 원래부터 그 땅에 있었던 참나무와 새롭게 심은 몇몇 단풍나무들로 조경을 한 듯한데, 세월이 많이 흘러 조용한 숲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지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들은 30미터가 넘고, 한가운데 자리 잡은 오크트리(참나무, 또는 상수리나무)들도 키와 덩치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한여름에도 새어 나오는 햇빛이 별로 없을 정도로 나뭇잎이 하늘을 빼곡히 덮고 있다.
주차장 쪽에 둘러선 소나무들은 봄이면 송진가루를 날려서 주차한 모든 차의 페인트를 노란색으로 바꾸고, 가을이면 낱개로 떨어진 빗자루 날개 같은 솔잎들이 자동차 위에 소복이 내려앉는다.
그래도 그냥 그런가 보다, 가을인가 보다 그랬다.
오늘 오후에 일을 마치고 주차된 차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데 누가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누군가가 실수로 내게 물건을 던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이 단지 안에는 나밖에 없는 것이다. 있다면 내 머리 위 한참 위에 상수리나무 정도? 아뿔싸, 도토리가 떨어졌구나.
상수리나무의 키가 20미터쯤 되다 보니 손가락 마디 하나만 한 도토리가 자유 낙하하며 그만한 힘을 가지게 됐나 보다. 도토리 열매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 주변의 마른 잎과 작은 나뭇가지들도 같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제법 묵직한 덩어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치과에서는 처음 맞는 가을이지만 예전에 살던 집 앞에 몇십 년 된 상수리나무가 있어놔서 가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익숙하기는 했다. 사진에서 바닥에 보이는 동그란 아이들이 모두 도토리인데 오늘만 해도 누군가 한차례 청소를 하고 난 다음이고(청소라고 해야 인도에 있는 아이들을 흙더미 쪽으로 비질하여 올렸으리라) 하루만 지나면 몇 배로 떨어져 쌓여 도토리가 없는 지면을 밟기 힘들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저 조용한 숲에 부지락 부지락, 도토리 터지며 밟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알맹이와 껍데기 사이의 거리가 한참 먼 호두를 부술 때와는 달리 도토리는 껍질이 두껍지 않고 과실 전체가 실해서 한 발자국 내디딜 때 몸체가 모두 어그러진다. 한국에 계신 친정 부모님은 이 도토리를 잘 모아서 방앗간에 가져다주고 여러 단계의 도토리 가루를 만들어 수시로 맛있는 묵을 쒀 드신다. 전화로 그 말씀을 듣고부터는 임자 없이 여기저기 바닥에 나뒹구는 가을의 도토리가 그리 아까울 수가 없다.
지역 한인사회에 도토리가루 만들어주는 방앗간이 있다면 아마 나는 매일 도토리를 주우러 들로 산으로 출몰할지도 모른다. 이번 주말에는 집에 있는 도토리가루로 묵을 한번 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