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꼭 해야만 하는 이유
무엇 때문에 연애를 하고 싶은 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까요?
우리 마음속에는 날때부터 부모님의 존재가 단단하게 차지하고 있는 안전과 사랑에 대한 영역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주시는 사랑, 나를 안전하게 지키시는 돌봄의 영역 속에서 우리는 사랑스럽고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지요. 어느 순간 그 영역에서 부모님의 존재가 희미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한 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감정이지요. 이 영역을 부모님 대신 채워줄 대상으로 우리는 이성을 생각합니다. 그 한 사람이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주면 어릴 때처럼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장성한 성인이 ‘두 사람’에 대한 욕구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인생을 좀더 심원하게 생각해볼 때는 배우자가 있어도 '외로움'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 다른 종류의 외로움이며 나의 창조와 존재성에 관련된 문제이므로 지금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는 외로움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외로움은 각 사람마다 저마다의 이유로 날이 갈수록 커져가거나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만듭니다. 샤워하고 나와서 뽀얗고 예쁜 나를 거울 속에서 발견했을 때, 이런 나를 보여줄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슬픈 날이 찾아옵니다. 늙고 병들었어도 서로 사랑하고 손잡아주는 커플을 볼 때면 이제 나는 내 젊은 날을 기억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갈 수 없겠구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맛있고 재미있고 가슴 뛰는 것들을 공유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날까지 함께 나누던 친구도, 나와 평행선을 그리며 살아가는 또 하나의 남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인생 자체가 한 묶음이 되어버리는 내 짝, 내 곁이 아니라요.
이 외로움이 추구하는 '한 사람'이 그저 연애의 대상인지 결혼까지 포함된 의미인지는 여기서 나누어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의 필요를 돌보고 책임을 지는 것처럼 그의 필요를 돌보고 책임지는 것이며, 어느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상대방과 나의 삶이 하나의 운명에 속박당하는 삶의 형태는 현대 사회에서 결혼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연애는 가능하지만 결혼은 안된다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위에서 우리가 말한 외로움을 충족하는 사랑은 아닐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외로움을 만들어 낼 소지를 담고 있기 마련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 마음에 결정된 것들을 구체적인 말로 꺼내 볼까요.
나는 멋있는 이성을 만나서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하기를 바라고 있다. 몇 십년 동안 다른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니 처음에는 많은 것을 맞춰가야 하겠지만 언젠가는 나에게 동화속의 왕자님 같은, 아니 그 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어 나를 지지하고 사랑하며 내편이 되어 줄 것이다. 또 그만큼 나도 노력할 것이다. 그 괜찮은 이성을 만나기 위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나의 행동과 말을 바꾸고 적극적으로 그가 사랑할 만한 사람의 역할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자,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나를 바꾸어야 할 차례입니다.
이 부분이 어쩌면 모태솔로 인 분들에게는 가장 힘든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태솔로의 대부분은 자기애가 강한 편이어서 자신의 그 무엇이든 쉽게 바꾸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있는 선택과 결정을 해온 모태솔로 들이기 때문에 자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듯한 이런 행위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 니가 뭔데 나를 바꾸려 하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둘이 될 가능성은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둘이 되려면 일종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입사시험 보는 것처럼, 한 번은 통과해야 하는, 나를 증명하고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그 수많은 이력서와 인터뷰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우리’였나요? 그리고 만약 그렇게 솔직했다면 성공확률이 높았을까요? 실상은 각 지원하는 기업체가 원하는 인재상에 우리 자신을 구겨 넣어 그 관문을 통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력서는 사실에 기반했지만 가능성과 거짓말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이것이 정말로 나인지를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모종의 검증을 받고 들어간 직장에서 우리는 한번도 인터뷰나 이력서에서 우리가 연기한 인간상이 왜 아니냐는 힐난을 받지는 않지요. 오히려 그 수고로움을 열정으로 인정받고 애사심으로 승화시킬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나요? 우리가 원하는 업체에 드디어 합격해서 일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자기를 드러내며 누릴 것은 누리고 또, 열심히 일해서 능력을 키우려고 하지 않았나요?
연애와 결혼도 그런 면에서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괜찮은 남성과 로맨틱하면서도 진지한 관계를 만들려고 할 때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의 감정에만 호소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사랑이 모든 관계의 전제조건인 것은 맞습니다. 다만 사랑조차도 내가 이성의 호감대상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남성들은 어찌 보면 매우 천편일률적인 이상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처럼 말입니다. 관공서나 사기업체, 언론사 등 각 기업이 원하는 약간씩 다른 인재상은 있을 수 있지만 어차피 그들을 다 아우를 수 있는 대통합형 인재상도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그것이 바로 제가 앞으로 설명드릴 '그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