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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은 과연 내 생각일까?

by 제이티

매 순간 머릿속을 떠도는 것. 창 밖의 내리는 비를 쳐다보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것. 노래를 듣거나 드라마를 볼 때 책을 읽을 때 달리면서도 운전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생각" 바로 그것에 대해 말을 해보고 싶다.


사실, 글을 쓸 때도 어떤 글을 써야지라고 계획을 세우고 쓰기보다는 키보드가 손가락에 의해 두들김을 당할 때 타닥타닥 소리에 맞춰서 문득문득 다음 문장이 떠오른다. 내가 글짓기를 정통으로 배워본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어떤 주제에 관해 글을 써서 내려가다 보면 처음의 생각과 글을 쓰고 있는 도 중의 생각이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무엇인가 말로는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의 기분과 느낌인데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면서, 문득 나는 어떤 생각으로 글을 쓰는지 궁금해졌다. 작가의 가치관과 성향 관점에 따라서 글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의 가치관은 어디서 왔을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알기가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괜히 소크라테스 할아버지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을 한 게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남의 얘기를 들어야 하는데, 남들은 대체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나를 판단할까?


나의 말투는 본디 서울 사람이 아니라 지방 사투리가 심하고 억양이 여기 사람과 사뭇 다르다. 마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릴리 펀트 소인국 사람들처럼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하물며 나는 내 머리가 크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티브이에 나오는 조그마한 머리들 때문에 커 보인다. 먹는 음식도 바닷가에서 자라서 인지 해산물을 좋아하고 순대를 먹을 때도 초장에 찍어 먹는데 그것이 여간 이상하게 보이나 보다. 뭐 먹는 음식이나 말투 등은 지역에 따라서 얼마든 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이 정도의 다름은 누구나 인정할 수가 있다. 머리 좀 크고 말투 좀 특이하고 식습관이 다르다고 해서 그렇게 이상한 놈 취급을 받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기해서 호기심을 유발할 수도 있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얼굴은 몰라도 쉽게 적이 될 수 있다. 네이버 기사의 댓글 창을 보면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가 생길 정도로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못 잡아서 먹어서 혈안이다. 매일 매 순간 새로운 이슈가 실시간 검색어와 기삿거리로 업데이트되지만 댓글을 보면 뭐 대통령을 욕하거나, 정부를 욕하거나, 특정인을 혐오하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져 놓는다. 심지어 일기예보의 댓글인데 전혀 상관없는 비하와 혐오성 댓글이 판을 친다. 더군다나, 유명 연예인이 음주운전 혹은 인성 논란에 관한 사소한 잘못에도 득달처럼 달려들어서 욕을 해대기 바쁘고, 처벌을 해달라니 청원에 댓글이 수십만 개씩 달린다. 코로나 확진자가 우리 동네에 나와도 신상 털기는 물론이거니와 무차별적인 공격과 혐오의 발언을 쏟아 낸다. 소통의 창구라는 말이 무색하게 인터넷 공간은 욕받이 창구가 되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좋아요와 추천이 꼭 그런 댓글이 많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과연 기사를 읽기나 하는 것일까? 아니면 댓글만 보고 위에 있는 거부터 읽는 것일까? 과연 내 생각과 같아서 좋아요를 누르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누르니까 누르는 것일까? 사람들의 생각은 분단된 우리나라처럼 찬성 아니면 반대 두 개 밖에 없는 것일까? 생각이 다 다르지만 또 괜히 다른 생각을 주장했다가 사람들의 공격을 받을까 봐 숨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좋아요가 많이 달린 글이 사람들의 공감을 받은 글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글은 아님에 분명하다. 매 순간 수억 개의 사진과 글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내 입맛에 딱 맞는 것만 골라먹기는 힘들다. 소고기를 먹고 싶다고 도축장에 가서 직접 소를 보고 1인분 고기를 떼어 올 순 없다. 어쩔 수 없이 소매상을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소매상들 중에는 이른바 '사'짜들 이 많이 있어서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도 쉽지가 않다. 나에게 생각을 팔았던 소매상은 다른 소매상이 와서 장사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내 입맛은 우리 동네에 있는 정육점에 따라 길들여진다. 그런데 이 입맛이란 놈은 한 번 길들여지면 바뀌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밖에서 음식을 사 먹어도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 집밥이 생각나는 것처럼 매일 먹어본 그 맛은 나이가 먹어도 바뀌지 않는다.



결국 내 생각은 누군가의 생각일 뿐이다. 내 생각은 나에게 그 생각을 팔았던 소매상의 생각이다. 그 소매상이 부모가 될 수도 있고 책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즐겨보는 유튜브 추천 동영상이 될 수도 있다. 소매상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손님의 입맛이 까딸스러운 게 여간 장사하기 힘들다. 어떤 손님은 비계 없는 살코기만 좋아하고, 또 누구는 두껍게 썰어 놓은 고기만 먹는다면 얼마나 피곤한가. 손님들의 입맛이 통일되면 얼마나 빨리 팔아먹을 수 있겠는가? 단체 주문할 때 괜히 짜장면으로 통일하는 게 아니다.




입맛이 길들여지기 전에 나에게 들어왔던 그 입맛 '생각'



오랫동안 한 동네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 입맛은 변할 수가 없다. 늘 보고 먹는 게 같기 때문이다. 늘 보던 사람들만 만났던 사람도 생각이 변할 수가 없다. 하물며 우리는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갈 때도 김치와 라면을 찾는다. 굳이 평소에 먹던 것을 왜 고국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곳까지 와서 먹어야만 할까? 김치와 라면 먹으려고 비행기표를 사진 않았을 텐데 왜 호텔 조식으로 만족을 못하는 것일까?

그만큼 입맛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엄마가 해준 밥이 제일 맛있는 게 아니라, 제일 먼저 먹어봤던 맛일 뿐이다. 세상엔 맛있는 음식이 얼마든지 있다. 돈만 있으면..



그럼에도 낯선 음식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하다. 냄새도 역하고 씹는 식감도 여간 불편하다. 그렇게 징그럽고 헛구역질이 난다. 또한 우리랑 조금 다르게 생긴 사람이 우리 동네로 이사 오면 사사건건 신경이 쓰인다. 괜히 시끄러운 것 같고, 걸음걸이는 다르고, 아무데서 쓰레기 버리고 교통질서도 안 지키는 것 같다. 쳐다보는 표정도 찝찝하다. 영화 '곡성'에서 나오는 그 일본 사람처럼 말이다. 결국 그는 사람을 죽인 범인이 된다. 아니 범인이 되어야만 했다. 다수가 일본놈이 사람을 죽인게 분명하다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이라는 것은 위험하다. 그 위험한 생각에 믿음까지 더해지면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믿음은 내 주변 사람이 내 생각과 같을 때 온다. 우리는 같은 소매상에서 생각을 사 먹은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 소매상 주인장은 어디서 고기를 떼어왔는지 말하지 않는다. 원산지가 확실해야 되는데, 그저 알아서 제일 맛있고 좋은 놈으로 줬다고 하니.. 당최 확인할 방법이 있나?





네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다.


물론 네 생각이 틀리지는 않지만 내 생각이 더 좋아 보인다.


우리 동네 정육점이 더 맛있으니까.. 물론 다른 동네는 가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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