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
1944년 12월, 이곳은 프랑스 북부, 벨기에 남부의 산악지대다. 안개가 끼고 흐린 날씨에 미국의 압도적인 육군항공도 전력은 지상에 발이 묶였고, 취약한 아르덴 숲을 지키는 병력은 지속된 전투로 손실이 막심하고 정예병이 부족한 101 공사사단과 주로 신병들로 이루어진 99보병사단이었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합쳐저 공세를 시작할 최적의 시기라고 판단한 OKW(독일 국방군 총사령부)는 동부전선에서 차출한 정예병력과 기존 서부전선에 배치된 기갑부대들, 그리고 히틀러가 가장 아끼던 최정예 무장친위대 기갑사단들의 강철 전차들을 아르덴 숲으로 진격시켰다.
그러한 진격에 신병들로 이루어진 99 보병사단은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비록 수세에 몰리고 정예병들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히틀러가 가장 아끼던 부대들과 여러 전선의 정예부대들이 공세를 펼친 결과 미군의 전선은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고질적인 연료 부족 및 101 공수사단의 예상외의 질긴 항전으로 진격이 점차 돈좌되기 시작해간다. 점차 독일군 사령부의 마음은 조급해져 갔고 히틀러가 총애하던 무장친위대 기갑사단의 전차들도 점차 연료가 바닥나기 시작해, 공세 계획이 점차 틀어지고 있었던 상황이 바로 1944년 12월 말 서부전선의 상황이었다. 이렇게 점차 계획이 틀어지고 진격 속도가 느려지던 1944년이 끝나갈 무렵 무장친위대의 정예 중 정예인 제1SS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의 선봉부대는 한 무리의 미군 포로를 잡게 된다. 마음이 급해진 선봉대의 지휘관 요하임 파이퍼와 사단장 제프 디트리히는 공격 속도를 지체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고 결국 이 미군들은 집단 학살되어 눈 덮인 아르덴 숲에 싸늘한 시체로 버려지게 된다.
전쟁 중 포로를 사살하는 행위는 명백한 국제 교전규칙 위반이고 제네바 협약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전투 중 상대를 죽이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기 충분한데 저항하지 않는 그저 속해있는 공동체가 다른 동족을 한군데에 몰아넣고 MG-42 기관총으로 개미 죽이듯 죽이는 것은 얼마나 큰 죄책감이 따르는 일이었을까.
소설 <소년이 온다>에는 한 군인이 등장한다. 그 군인은 1979년 부마항쟁 진압작전에 투입되었으며 당시 상부에서 특별히 공격적으로 진압한 병력에게 포상을 주었다고 증언했다, 또 작중 묘사 및 실제 역사에서 5.18 민주화운동 기간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인원들은 도청 앞에서 애국가로 시민들의 주의를 끈 후, 조준사격으로 시민들을 공격하기도 했고 진압작전에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벙커를 불태우고 독일의 요새화된 지크프리트 선을 돌파하는데 사용했던 M2 화염방사기를 동원하기도 하는 등, 과연 인간이라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일들은 세계 곳곳에서, 역사 곳곳에서 일어난다.
어쩌면 인간성이라는 것은 다른 인간을 한곳에 몰아넣고 MG-42 기관총으로 쓸어버리는 것이나 도청 앞에서 오와 열을 맞춰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에게 M16A1 소총으로 조준사격을 가하고 확인사살까지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울기ㅏ 총을 들고 있지 않고 개구리색 특전사 위장복 말고 플로라 무장친위대 위장복을 입고 있지 않은 학살자들의 면은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무장친위대로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한 노병은 매일 슈냅스(독일의 독주)에 빠져지낸다. 한 언론사에서 그 노병을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외로운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영국군은 "우리는 유럽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히틀러라는 최악의 독재자에 맞서서 유럽을 구했어." 라며 거들먹거릴 수 있고, 심지어 소련군조차도 "어머니 조국을 침법하고 짓밟은 파시스트들과 싸웠고 연방을 지켜낸 후 끝끝내 베를린에 적기를 꽃아 유럽 전선을 마무리했다고 거들먹 거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뭐입니까? 우리는 살인자를 위해서 싸웠고 민간인을 죽이고 다른 인간을 죽였습니다. 그런 우리는 뭡니까?" 그는 항상 죽인 상대의 얼굴이 종전 후 40년동안 매일 밤 떠오르며 그 때를 후회한다고 한다. 우리가 경멸하는 살인자들에게도 그런 인간적인 모습은 있었다. 인간성은 무엇인가?
특별히 잔인하게, 광주에서 M16 소총으로 시민군을 쏘고 계엄군으로써 시민을 잔인하게 총검으로 찌른 사람은 맷값을 받았다. 하지만 그 살인자는 맷값으로 유흥과 쾌락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소주를 사고 독한 고량주를 샀다. 그것이 인간성이다. 살인자는 단순히 살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PTSD를 겪으며 맷값으로 그 기억을 잊기 위해 술을 사는 것이 인간성이다. 우리는 이중적이고 맷값을 벌기 위해 저지른 살인을 잊기 위해 쓰디쓴 소주를 마신다. 그것이 인간이다. 독일의 독주인 슈냅스는 과일을 증류하고 거기다가 설탕도 첨가한 달콤한 술이다. 하지만 늙은 독일 노병이 삼켰을 슈냅스는 달았을까. 분명 쓰디쓴 삼킴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맷값으로 산 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