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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Nov 07. 2024

- 사회라는 음악 -

<자유학기제 문제>


정서윤



6학년때의 해졌던 내 마음은 남김없이 태워지고 우리 집 식물처럼 푸르른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음, 사실 행복할 줄 알았고, 가장 기대하는 것이 자유학기제였죠." 그렇지만, 앞서 말한 나의 속마음과는 다르게 그 문장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게으른 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비판하는 예술가적 성질을 가진 베르테르같은 선생님들이 날,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찬란한 미래는 걱정하지 않는 듯 현생을 살며 녹슨 철처럼 변질된 자신의 자아 성질을 믿고 싶지 않았던 듯 하다. 보편적인 가치를 실천하지 않으며 야성과 이성을 잃은 듯 흐느적대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들의 마음의 추를 더 깊게 깊게 끌어당겼다. 다정한 말로 우릴 죽여놓고 수업하시는 선생님들로 인해 저절로 숙연해지는 현실에 찌든 범생이들과는 달리 "그들"만, 내가 그렇게 구별하고 싶은 "그들"만, 제발 나와 똑같이 않기를 바라면서 선생님에게 꾸중을 받기를 바라고, 그들이 벌점을 받기를 바랬다. 그래서 난 선생님들에게 모범생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었고, 상을 휩쓸어가는 아이로 기억될 수 있었고, 아무튼 조금 "특별한 아이"로 기억될 수 있었다. 난 어쩌면, "범생이"라는 집단에 나를 구겨넣고서는 이성을 잃고 흐느적대는 "문제아"들의 무리를 향해 야유를 보내고 있진 않나 싶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어야 한다는 이분법적 생각은 나에게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연스러운 샤덴프로이데의 결말을 만들었을 것이다.


학부모들의 걱정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학교의 상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는 선생님들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지요, 현실을 되돌리기 위해 수없이 막힌 벽을 손이 아플 때 까지 주먹으로 쾅, 쾅, 두드리며 내 안에서 울리는 그 공허하고 은밀한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려 해본 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가시 돋친 바보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자주 해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오히려 그들을 더욱 응원하는 꽤 이상한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들이 내 모습 그대로 좋아해주기에는 한 선생님이 들어가는 수업의 시수는 너무 많았고, 그 안에서 모든 아이들의 이름을 천재가 아닌 이상 외울 수 없었다. 집에 있는 거울을 사랑하듯 선생님들도 사랑하는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겠지만, 선생님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문제아를 잠재우는 방법"이었고, 문제아가 들어가있는 반에 내가 있어야 나는 비로소 "정서윤"이라는 나 자신 그대로의 존재로 기억될 수 있었다. 난 극단적이지도 않고, 오로지 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걱정하는 부모님과 여러 유형의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으니까.


선생님들은 우리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학생들도 배우는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자유학기제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사실 별로 없었고, "이러한 것들이 정말 세상에 도움이 될지 궁금하다" 라는 생각이 점점 나를 속박이라는 키워드와 가까워지게 하고 있었다. 봄바람 날리던 새학기의 벛꽃이 지나가고 난 뒤로는 싱그러운 여름 풀향기가 나를 반기는 시절에 우리 학교는 "문제아 소탕"이라는 이유와 명분으로 벌점을 받는 아이들과 규정이 힘들어져서 고충을 가지게 된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아름다운 땀 냄새와 습기 있는 공기를 만끽하기에는 세상은 그리 기다려주지 않는 동물농장의 나폴레옹 같은 존재였다. 급한 성격이었고, 자신에게서 모두를 떨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아름다운 땀 냄새와 우릴 날아오르게 해주었던 새학기를 모방한 밝은 햇살들은 제외시켰지만. 사람들과 숨결을 나누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성격과 나의 성격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학교 자체의 문제인 것인지, 선생님들의 게으른 성격을 비판하는 열정적인 성격이 문제인 것인지, 학부모들의 우려로 인한 그들의 정확하지 못한 판단으로 의미 없는 시간 소비를 한 것인지는 우리 모두가 정답을 알 것이라고 믿는다. "1등"이라는 키워드를 입에 달고 살면서부터 내 존재의 강화와 내 존재의 정화는 동시에 필요한 요소였다. 그로 인해 앞으로의 내 대학이 결정되고, 수능과 모든 순간들이 스쳐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남김없이 생각을 태우면서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첫 번째 가치를 실천하려면 '문제아'라는 요소가 필요했고, 두 번째 요소를 선택하려면 난 내 삶에서 그 요소를 없애야 했다. 난 그 둘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심미적 갈등을 겪고 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혼의 통찰을 하면 무언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나 시도때도 없이 자라나는 선택의 갈림길 속에서 오래토록 고민해본다. 표정은 밝게 웃는데도 슬픈 듯한 나의 뒷모습에 "미안해 내 말이 다 맞아" 라면서 나의 순결한 선택을 존중해보기로 하였지만, 여전히 정화와 강화에 관한 선택을 하지는 못했다. 난 베르테르처럼 떼어낼 수 없는 의무적인 유혹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소년이 온다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행동해야 했으며, 투정도 고집도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정의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렇게 선택했더라면, "정화"를 선택해야 했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계엄군에게 맞서는 사람들도 미래의 "민주화"라는 불확실한 키워드만 바라보고 겁탈하는 계엄군들에게 서슴없이 성큼 다가갔으니까. 그렇지만 몸으로는 "강화"를 원했다.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내가 조금 더 유명해지지는 않을지 궁금하다는 마음에 매혹되어 어쩔 수 없이 강화를 향해 끌려다는 듯 하다가도, 다시 공부를 위해 '범생이'라는 이름의 이미지를 연명해나가야 한다는 이성적인 생각에 이끌려 정화를 향해 나아가는 듯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나는 그 상황에서 "문제아가 있는 반의 못난이"라고 추앙받을 수 있었지만, 아무렴 그것이 궁금해서라도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유학기제라는 주제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나의 평판과 이미지만 생각하는 나의 행동에 대해 지금의 나는 한심함을 느껴본다. 늘 뻔한 레시피, 착한 아이처럼 조용히 공부를 하는 나에게 그들의 존재는 치명타를 입히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드러낸 적 없던 마음이 이곳에서는 파티에 온 것처럼 솔직하게 빛나지만, 이러한 내 글을 보고 학부모들의 자유학기제에 관한 고민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유난히 선명한 그들의 주장 중 일부는 꽤 그럴 듯 하지만, 대체로 학생들의 "자유학기제는 사고방식을 늘릴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다" 라는 의견과 학부모들의 "이러한 의미 없는 행동을 하기 보다는 암기 과목이나 공부를 하는 것이 더 낫다"라는 의견의 갈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세상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자유학기제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앞쪽 문단에서 묘사하고 두려워했던 그것들이 아닌, 진정한 재미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도, 사회에서도 오로지 암기라는 과목들이 나를 붙잡았기에 사고나 창의를 키울 시간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학교에서도 "문제아"라는 구별짓기와 여러 가지 행동들이 결과적으로 총체적 난국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앞에서 했던 의미없던 신세한탄은 "문제아"들을 바꾸자는, 그들의 본성에 관해 지적한 나의 사심과 견해일 수 있겠지만, 사회적인 의견으로서는 "자유학기제의 본질"을 바꾸어야 한다라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유학기제의 취지를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광주의 민주화 운동을 우리가 필사적으로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 것 처럼, 그들의 숭고한 의지와 노력이 그곳에 적히고 이어져야 하는 것이 사회의 리듬이기에, 마치 온대기후였던 세상의 날씨가 간빙기가 이어지는 차가운 공백이 시작되면 안되었기 때문에. 자유학기제를 오로지 재밌어서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회의 리드미컬한 음악을 깨는 삑사리처럼, 버퍼링 표시처럼 그런 식으로 나의 이미지를 강화시키고 싶지는 않다. 우린, 이러한 견해를 내보내며 네티즌들끼리 서로 싸울 시간에, '사회'라는 제목의 음악을 이어갈 자연스러운 악보와 음표들을 써내려야가지 않을까. "영원히 이어질 순 없겠지만, 언젠가 시작의 해로 다시 돌아가겠지만, 시간에 따라 다다른 그 소중한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학습지들과 종이 꾸러미들은 적어도 우리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옆에 계속 있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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