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서윤
이 문제는 어쩌면 신의 영역을 탐하는 것일수도, 우리가 다가가선 안되는 금기의 것들을 건드리는 것일수도 있다. 선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굳건히 믿어져왔던 사상이었으며, 이황과 이이같은 학자들에게 다각도적으로 검토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한유진이라는 이름의 아이는 어쩌면 유전자를 조작당한 '잘못된 아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해진이를 죽이고, 유민이를 죽이고, 엄마와 이모까지 죽였을 때의 그 태연함과 인간 본성의 추악함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유진의 성격을 보았듯,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앞에 선보이고 싶지 않아한다. 한유진은 어쩌면 그것 때문에 자신의 예민한 성향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어머니와 이모의 살인 소식을 해진이에게 들키기 전까지 끝까지 숨겨왔던 걸지도 모른다. 약을 통해 심신을 안정시키며 사람들을 뒤에서 남몰래 죽여왔던 한유진의 몸에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상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신은 한유진에게 선을 만들 수 있는 약과, 악을 만들 수 있는 포식자의 본성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황, 그는 인간의 본성은 도덕적이고 선한 방향으로 타고났으며, 이러한 도덕적 기질이 외부 자극에 의해 ‘칠정’이라는 감정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보았다. 서양에 근거에 비교하면 성선설을 믿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으며, 벤담과 조금 비슷할 수 있다고 본다. 결과를 추구하는 면에서는 다르지만, 이러한 선하고 원래 착하다는 도덕적 기질은 좋은 결과는 인간이 모두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으나, 환경적인, 인위적인 개조로 인하여 사람이 결과적으로 바뀐다는 것이 일부 비슷하다. 반면,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기보다는 서로의 상호작용에 주목하였다. 이이는 이러한 면에서는 칸트와 비슷하다. 결과를 추구하는 벤담보다는 그 과정에 주목하는 칸트의 본성은 도덕적 상호작용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성질보다는 그 안에서의 인간의 주도적인 판단이 오히려 이러한 도덕의 새로운 개혁에 따옴표를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다 판단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념들을 비교해보았을때, 두 개념은 인간은 선을 가지고 태어나되, 이황은 감정으로 그것이 드러날 수 있고, 이이는 그것이 도덕적인 판단으로 인해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유진은 원래 착했던 아이였는가?"
그러한 이야기에 대해서 제임스 펠런 하버드대 교수는 자신의 TED 강연에서 사이코패스와 관련된 성향이 단순히 환경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전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MAO-A 유전자의 발현이 그들에게 폭력적 성향을 유발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유전자는 유년기에 그들이 폭력적인 성향과 장면들을 만들게 하는 역할을 하며, 한유진 역시 어릴 때 그런 것들 때문에 이런 것이 생물학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러한 과정들은 남성들에게 더욱 잘 발현되고, 어머니의 유전자를 받는 것으로 드러났는데, 그렇다면, 한유진은 이것을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어쩌면, 어머니가 일기를 썼던 이유는 자신의 의도적인 기억상실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기록이었으며, 자신의 아들이 이것을 반복하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진심으로 사랑하고 좋아하고, 유전자적 경향을 함께 나누었지만,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유전자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던 것이 고통스러웠지는 않았을까. 마치 난독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어난 아이가 똑같이 난독증을 가지고 있어서 절망스러웠던 것처럼.
뜬금없지만, 약한 사람이 오히려 더욱 악하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보통 강한 사람들 대표들이 회사 직원들을 갈구는 악의 모습과 편의점에서 대놓고 깽판을 부리는 진상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악을 일상생활에서 대입해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우리는 앞서 말했던 예시가 선과 악의 분해된 속성의 일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하지 악의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기준을 가진다면 인간의 선의 기준은 저하되며, 서로의 신뢰성과 감정들은 더욱 냉소적이고 냉정적으로 바뀌는 현상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는 발작이라는 요소를 추가적으로 겪을 수 있을 것이다. 발작이란 것은 정말 심한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범위를 조금 더 넓히자면 발작을 하는 것이 우리의 자아를 분출한다는 것과도 연관될 수 있다. 한유진이 세상에 무해하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또 유해하다고도 말할 수 없듯이, 우리도 모두 발작이라는 요소를 가지면서 살아가며, 우리가 정의하는 "그 약"이라는 것들로 조용해지고 숙연해지는 순간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서도 언제나 시끄러운 반 아이들을 선생님이 간식이나 시간을 일찍 마치어주는 현상으로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내면의 현상을 잠재우곤 한다. 한유진은 이것을 리모트로 승화시켰고, 잔인한 부작용에 시달리면서 고통스러워하였다. 이것은 유전자적 특성이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환경적인 영향에 달려 있을수도 있다. 그런데, 당신도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한유진은 "남들과 다른 특성"을, 포식자의 특성을 정의하고 괴로워하고, 핏자국을 아무런 내색 없이 지워가면서, 인간이라는 것의 특성은 조금은 지켜가며 모든 일들을 처리해갔지만, 우리는 자신도 사이코패스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자신은 정말 순수한 척 행동한다. "누가 말하던가. 인간은 생의 1/3을 몽상하는 데 쓰고 꿈을 꿀 때에는 깨어 있을 때 감춰두었던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음의 극장에서는 헛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온갖 소망이 실현된다고." 우리도 같은 마음과 추악하고 더러운 욕망, 예를 들어 원망하는 사람들을 죽인다던가, 그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빼앗아가고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던가, 차마 말도 하지 못할 욕망들을 기꺼이 상상하며 나만의 극장을 만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진실이자, 현실이자, 불신할 존재들을 세상에 모아놓은 신의 잘못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면서, 착한 척 가식을 부리고, 정작 그 영역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사람들을 "사이코패스"라며 낙인을 찍는 인간의 천하고 없어 보이며 짜증나는 기울림 있는 특징들이 더욱 우릴 강하고 냉철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특징을 가진 것을 "의도적으로 지우고, 삭제하고, 없애버린다."
한유진은 심장의 빛 내림을 받았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많이 본 피라는 요소를 온몸에 두르고 태어난 첫 순간, 지원에게 그의 존재는 "특별한 아이"였을 수도 있지만, "문제아"라는 사회의 비판적인 시선과 비평가 정신에 헌신하는 미치광이 정신과 의사에 의해서 결국은 사람을 4명이나 죽인 "살인자"로 도태되었다. 이황과 이이에게 난 묻고 싶다. "당신들은 사람들의 본성이 착하고 이러한 결과물로 사람들이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한유진의 모순된 해리성 기억 상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그런데, 글의 마지막에 다다르고 나서 우리가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어쩌면 잘못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본성을 전부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것들에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충격에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이코패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자아를 소유하고 있었고, 니체의 3단계에서 아직 낙타의 단계밖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까지 너무 많은 성격과 가면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다중인격적 성격을 탓하지는 않고, 문제가 우연히 도태된 "남들과 조금 다른 아이"라는 글의 제목을 인위적으로 "남들과 많이 다른 아이"로 바꾸는 것은 아닐까. 선을 중시하는 우리의 사회에서, 이황과 이이의 주장도, 사람들의 성격도, 모든 사람들의 말도 믿을 수 없게 된 것. 소년이 온다에서 과거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미 겪었고, 그로 인해 온 다리를 휘드르며 저항하게 된 것이 그 이유이다. 이러한 현실들을 모두가 깨닫게 된다면, 여러 인격 중에서 가장 좋은 인격을 골라 행동하는 당신에게 부끄러움이 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