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호
아비투스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책 속에서는 ‘과시하지 않음으로써 과시한다’는 카운터 시그널링으로 볼 수 있다. 흔히 TV 프로나 예능 및 개인 사상활에서 연예인 혹 유명인들이 스타벅스에 가서 검소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던가,편의점 앞을 나가는데 반팔 한벌에 슬리퍼를 찍찍 끌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서 우리들은 칭찬을 한다. 이는 연예인들은 너무나도 유명하고 지적이며 총량과 깊이가 있는 인간이기에 과시 하지 않는 모습이 더욱더 멋져 보인다라는 뜻인 것이다. 이런 가사가 있다. ‘3만원 있는 사람 마신 소주는 불쌍해 반면 3억 있는 사람 마신 소주는 겸손해’라는 QM의 가사처럼 이런 아비투스는 인간을 고귀하게 만든다.
책 ‘튜브’에서 김성곤 안드레아는 고귀 하지 못한 인물이다. 사업을 5번 대차게 말아 먹어 50대를 바라 보는 그에게는 품위도 경제도 신체도 사회도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당장 오늘을 바라 보면서 살아간다. 작 중 이런 말이 나온다. “너무 큰 목표를 바라 보지 않고 작은 거부터 하나씩 하겠다고” 말이다. 나에게는 이가 품격 없는 인간이 발버둥 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는 그는 어떤 아비투스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는 건 심리 자본 하나뿐이였지만 사람들이 최고로 쳐주는 건 마인드따위가 아니라 인맥과 돈 그리고 학력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에게 그 어떤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아비투스는 인간으로 하여금 소위 ‘급’을 맞추게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도 그렇다시피 어른들과 똑같이 지식,경제,신체 세개를 주로 따진다. 지식과 신체는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학창 시절 인간의 급을 나눌 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머무를 최소 조건이 되기도 한다. 내 친구들은 학교에서 모두 하나 같이 상위권인 애들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는 평균이 80점대가 간당간당 하다는 말을 듣고서 언제부턴가 연락을 끊었다. 사실 끊었다라는 말도 애매모호 하다. 기말을 본 후 친구가 내게 “너 몇점이야?”라고 했을 때 9.. 라는 숫자가 내 입에서 나오자마자 짜게 식어 버린 듯한 그 얘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를 보면 내 친구도 나와의 연락을 끊겠다라는 확고한 다짐이 생긴 듯 했다. 또한 소위 일진이라고 말하는 잘 나고 멋진 애들은 대부분 큰 키와 멀끔한 외관을 하고 있다. 책 ‘아비투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진짜 중요한 내면 세계를 제대로 전달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종종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우리 대신 옷과 외모가 우리에 대해 말해줄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깊은 내면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지금.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인류는 너무나도 겉만 번지르르하게 변질되어 버렸다. 나는 이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음을 믿는다. 총량과 깊이를 가장 얕은 곳에서 찾는다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 행태인가.
괄시. 무언가에 대해서 업신 여겨 하찮게 대하는 자세. 현 사회는 이런 모습들이 만연해 있다. 성적이 낮다고 무시 받는 친구. 얼굴이 못 생기고 넙치 같다며 비난 받는 나. 혹은 돈이 없다고 무리에 끼워주지 않는 친구.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골프채 살 돈이 없다고 같이 라운딩을 뛰어주지 않는 친구와 어찌저찌 저가형 모델의 골프채를 사오면 다음번에는 골프 모자가 없다고 파토를 내는 관계. 40대 모임에서 50대처럼 생겼다고 반려 당하는 어른. 고급진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싸보인다며 팽 당하는 어른. 모두가 이런 괄시 속에서 살고 있다. 무참히 난도질 당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 꽤나 참혹하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괄시가 만연해진 것은 아비투스를 골고루 보지 않고 편애해서 평가하기 때문이다. 돈 명예 외모 학력만 평가 대상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깊이를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 ‘카운터 시그널링‘이라는 과시 하지 않음으로써 과시하는 아비투스가 충분한 인간들에 대한 잣대가 낮아졌다라는 생각을 한다. 영국에서 신사로 대우 받을 수 있는 조건은 우월한 신체조건과 정작을 매일 입을 수 있는 경제력,출신 성분과 왕실과 연이 있는지 없는지,얼마나 고급진 문화 생활을 즐기고 있는지,그가 화장실을 간다라고 하 때 ‘toilet’이라고 하는지와 ‘lavatory’라고 하는지에 따라 평가 받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건 얼마나 매너 있고 젠틀한지 말 그대로 신사다운 심리와 생각또한 중요한 판단 요소 중에 하나였지만 요즘의 신사는 그저 정작을 입고 돈이 많으면 대부분 신사라고 말한다. 이게 나는 아비투스의 악한 면모인 것 같다. ‘진짜’들이 뽐 내는 아우라는 인정하는 부분이나,사람들은 아비투스의 자본들을 종합하여 바라 보지 않고 특정 부분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결정 짓으며 스스로 인간 관계 간의 위계 질서를 만들어 서로가 서로를 괄시하게 된다.
이런 아비투스의 문제점은 대부분의 가십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삼성과 엔비디아를 다루는 뉴스에서 뉴스의 패널은 이런 말을 했다. “삼성은 엔비디아에 비해서 시스템 반도체를 너무 못 만들어서요. 하하. 아무래도 삼성이 엔비디아에게 진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였으나 ‘졌다’라는 워딩은 내 심기를 건드리긴 충분했다. 물론 삼성이 시스템 반도체를 못 만드는 것은 사실이나,그 패널은 엔비디아와 삼성간의 취약점과 강점에 대해서 말한다는 느낌보다는 엔비디아를 아비투스가 충만한 기업으로 묘사하며 삼성을 깎아 내린다라는 생각에 도달 했다.
책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의 사랑은 개츠비가 겨우 겨우 싸구려 셔츠 한벌을 사줄 수 있다란 이유만으로 그를 거절한다. 근데 나는 이를 보면서 어쩌면 그냥 개츠비가 싫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 해보았다. 개츠비의 사랑은 한 남자에게 ‘돈이 많다’라는 경제적 자본으로 인간을 평가하여 품격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놓은 뒤에 개츠비를 이에 비하면 한 없이 낮고 미천한 존재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것. 이것이 아비투스의 특정 자본에 대한 편애의 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