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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지 못했던 죄

by 제이티

류호림




<해리 포터>에서 해리 포터와 론, 헤르미온느가 마법의 돌과 그에 관한 진실을 밝히려 제한 구역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몸을 웅크렸다. ‘제발 들어가지 마라, 제발 들어가지 마라’, 그들이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적발되었을 시의 사람들의 시선, 그들이 가질 감점을 생각하니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그 일은 누군가가 언젠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공이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가 되는 것이 싫었다.



나의 용기는 여기까지일까? 선생님들의 이쁨이나 받는 그깟 ‘모범생’의 이미지 때문에, 선생님들의 꾸짖음 몇 마디에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치는 이유는 그저 내가 여리고 사회에 너무 적합한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인간 능력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니체는 “오직 자신만이 정하고, 망가뜨릴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몰락과 파괴의 차이점인데, 몰락이란 복구할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하는 실패라면, 파괴 즉 파멸은 다신 되돌릴 수 없는, 기회조차 없어지는 실패를 말한다. 그는 파멸의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한계를 만들어나가는 폭 좁은 인간들을 비판한다. 그 폭 좁은 인간이 나일까, 마음 한 켠이 부르르 떨리기도 하고 따끔거리기도 한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난 나를 그저 조심성이 많은 아이라고 화려하게 포장했던 나날들은 그저 방구석에서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쪼다들과 다름없었을지도 모른다.



<데미안>에서는 상대방과 그 상황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이유는 상대방과 자신이 모든 면에서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바꾸어 설명하면 자기 자신을 모르기에 나의 마음 속 미지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무서워하고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미안에서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인생에서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부여한다. <데미안>에서 말하는 ‘표지’라는 것은, 책을 그림과 몇 문장으로 소개하는 표지처럼 우리만의 표지, 나 자신을 완벽하게 요약하고 강조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표지를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것과 개별적인 것,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의지를 계속해서 구현시키고 발전시키는 반면, 표지가 없는 사람들은 현상 유지의 의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요즘 민희진과 뉴진스, 그리고 하이브 사이의 갈등이 정말 이슈가 되고 있는데, 여기서 나는 뉴진스가 ‘표지’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안정적으로 하이브를 선택해 몇 년동안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길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들의 선택을 믿고 나아갈 수 있었다. 의대 열풍과 탕후루 열풍처럼 남들이 다 하니까, 남들도 다 패소했으니까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닌, 경제적 이익으로 인한 마음의 착각을 떨쳐내고 정말로 그들이 원하는 선택을 한 것 같아 인상 깊었다.



용감히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에선 우리는 분명히 성장하고 성취감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가끔씩 이러한 의구심이 든다. 과연 알을 다 깨고 나온다면 어떨까? 정탄 선생님은 내가 처음으로 본 알을 깨고 나오신 분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같다. 선생님은 ‘교사’라는 편안하고 안정적인 직업의 알을 깨고 오직 그의 원하는 교육 방식을 위해 사교육 시장에 뛰어드셨다. 결국 수많은 노력 끝에 성공하셨지만 선생님은 종종 외롭고 공허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요즘 날씨로 감정을 표현해볼 수 있을 것같다. 요란히 눈보라가 치는 요즘, 코끝이 얼어붙는 듯한 추위에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가면 온기가 내 몸을 훅 감싼다. 내 귀는 시뻘게지고, 왜일까 귀가 뜨거우면서도 아리고, 따갑기도 한다. 우리가 알을 깨고 나온 후, 눈보라같은 고난의 길을 모두 거쳐 성공이라는 따뜻함에 이르렀을 때,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성공의 섬이 미친 듯이 따뜻하고 화려하더라도 왠지 모를 이 불쾌한 기분은 떠나려 하지 않는다. 나 자신을 너무 제대로 알고, 그에 따라 성공을 향해 달려오다 보면, 우리는 소중한 것을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가끔씩은 내 행동에 대한 포장이 필요한 것도 같다. 나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에, 자신을 무자비하게 채찍질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인간다움을 잃는 것 같다. 인간이란,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임으로, 우리는 항상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나 자신을 너무 잘 알더라도 가끔은 눈 감고 내 행동을 합리화시켜줄 필요도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귀가 아리고 따가운 듯한 그 불쾌한 기분은, 어쩌면 인간답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신의 벌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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