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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Dec 28. 2024

작고 작은 발자국-유토피아

백은서



우리는 정말로 더 나은 사회를 꿈꾸고 있을까? 아니, 우리는 꿈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다만 언어로만 존재하는 허상이다. 오래된 꿈처럼 뚜렷하게 기억되는 듯하면서도 손끝에 닿지 않는, 결국 실체 없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 더 나은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만, 그 말이 지닌 폭력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상처를 덮기 위해 말이 필요할 뿐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따로 있다. 그것은 우리가 꿈꾸는 자유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는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지 않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우리가 외치는 자유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모른다고 믿는 자유일 것이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불빛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그 자유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을 선택하는 강제된 자유다. 네온사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알고리즘의 목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찾아 헤매던 정보들이 내 손끝에서 스며드는 순간, 우리는 자유롭지 않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간다고 믿지만, 사실 그 길은 이미 누군가의 손길 속에서 정해져 있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유를 느끼고, 그 감정에 잠시 취해 있을 뿐이다.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밖에 없다.


푸코가 말했다. "우리는 자유를 믿지만, 사실 자유는 선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미 정해져 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가 사실은 사회적 구조 속에서 구속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자유'는 권력의 망에 걸린 우리의 마지막 저항처럼 보인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자유를 찾고자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속에 갇히지 않기를, 그저 그 속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를 원할 뿐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꿈꾸는 자유다.


 이 자유에 대한 착각은, 우리가 말하는 평등의 정의를 왜곡시킨다. 평등은 단지 나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평등은 누구든지 다 똑같아야 한다는 허울뿐인 말일 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평등은 단지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나와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그 속에서 내가 원하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차이를 받아들인다고 말하지만, 그 차이가 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결국 그 차이는 나에게 불편함을 안겨준다. 우리는 타인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말을 하고, 사실은 그 다름이 내 세계를 위협하지 않도록 만드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를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그 차이를 편안하게 만드는 방식만을 선택하려 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 차이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이해는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장 자크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경고한 것처럼, 평등은 다만 이상적인 구호일 뿐, 그것이 현실에서 실제로 적용될 때면 그 평등이 단지 우리의 욕망을 위한 장치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 속에서 자유가 보장된다고 믿지만, 그 자유 역시 사회의 계약 속에서 형성된 규칙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정한 평등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평등,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평등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나'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잣대 삼아 판단하려 한다. 평등을 말하지만,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난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름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갈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기 전에 우리는 그 다름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우리는 다름을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그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깊은 사유는 부족하다. 우리가 말하는 존중이란 사실, 서로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존중하자는 말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다름을 표면적으로 인정하며, 그 다름이 내 삶에 불편함을 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과, 그 다름을 소화해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존재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존재를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서 결국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도 감춰지게 된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을 고백하려고 시도하지만, 그 과정에서 결국 우리는 자신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해조차도 결국 우리가 만든 틀 속에 갇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결국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그 이해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시 디자인된 이해에 불과하다. 진정한 이해는 고통스럽다. 진정한 이해는 나를 부수고, 타인을 완전히 들여다보려는 욕망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 고통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이러면 이러지만 저렇게도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질문은 결국 우리가 답을 찾기 싫어하는 마음의 방어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감옥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신화를 믿고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안주하려는 욕망이 강하게 작용하는 세상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고, 평등하다고 믿으며, 존중받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 속에서 우리는 점차 더 깊은 구덩이로 떨어져 간다. 우리는 그 믿음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싶은 유토피아는 무엇일까? 나는 더 이상 과거의 형식적인 자유나 평등에 집착하지 않고 싶다.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해를 기반으로 한 사회다. 그것은 고정된 틀 속에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선택들,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범위 속에서 허울만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타인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란, 모든 사람이 편안히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다. 내가 사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다름이 나의 불편함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다름이 나를 풍요롭게 만드는 그런 세상 말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고, 그 차이는 결코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다르게 느끼며, 다르게 행동한다. 하지만 그 다름을 존중하는 것은 단지 표면적인 배려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싶은 유토피아에서는 진정으로 서로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서로를 다르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다름을 아프고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 다름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그로 인해 진정한 성찰과 자아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서로의 다름 속에서, 우리는 나의 부족함을 보고, 타인의 강점을 배우며,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끊임없이 진동하며 진화하는, 살아 숨 쉬는 세상.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다름 속에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간다. 각자의 다른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혼돈 속에서 조화롭게 춤추듯, 서로를 비추며 자기 자신을 완성해 나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더 이상 규칙에 갇히지 않으며, 강요된 정의에 의해 묶이지도 않는다. 그곳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그 자유는 타인을 억누르지 않으며, 누구도 무시하지 않고, 모두가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우리가 꿈꾸던 나와 우리의 경계는 사라지고, 단 하나의 진실만 남는다. 우리는 함께, 진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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