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민
강남으로 이사를 처음 한 것은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이였다. 물론 2년도 채우지 못하고 중국으로 떠나야만 했던 짧은 집이란 공간이라 따듯함이나 애착 같은 건 그다지 와닿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사를 한 이유는 뻔하고 지루하다. 그 여느 이들처럼 대치의 학원가를 이용하기 위함이였고 나의 가장 친한 친구도 함께 거주지를 옮겼다. 참 당당하고 밝은 아이로써 나는 그 곳을 경험했다. 사실 당시엔 학구열의 끔찍함 따윈 따로 의식하지 못했다. 나의 잠재력을 굳게 믿었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언니가 화려하고 바쁜 전교회장과 으뜸으로 살아가는 동안 근심 없고 상대적으로 널널한 생활을 하였다. 무대의 각광을 받는 것에서 어리다는 이름을 핑계로써 여태 살아온 나는 관대히 밀려났고 각박함은 주위에서 일어났지만 이를 어색치 않게 여기면서도 정작 나는 그의 한 부분이지 않았다. 함께 이사를 온 친구는 황소란 학원에 합격 했다. 시험 당일날엔 도로가 아이를 태우고 온 학부모들의 차로 꽉 차 개미 한마리도 낄 자리가 없었다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광기 서린 그 자리 속 부모들은 조금은 기괴하기도, 그들의 집착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날부터 친구는 수학을 잘 하는 아이가 되었다. 아니, 어떻든 모두들 그리 믿고 치켜 세워 주더라. 초등학교 3학년의 나이부터 누구는 공부를 잘 하는 아이가 되었고 누구는 잘 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이사 후 친구의 엄마는 직장인으로써 집에 카메라를 설치 하였다 들었다. 그러곤 친구가 숙제를 하지 않고 놀고 있다면 전화를 걸곤 했다지. 이를 전해 들은 3학년 짜리 꼬마는 이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이를 알려주는 엄마의 목소리에서는 만일 엄마가 회사에 다녔다면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는 듯한 암시가 들어있는 듯 느껴졌던 것 같다.
지난 3년 반 동안 여행을 하지 않으면 한국에 들어와 대치동의 학원을 다녔다. 그 곳, 수학 학원에서 그때 나의 친구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작은 아이를 보았다. 아이의 목소리는 참 어리고 얇았다. 순수하고 간지러운 그 목소리로 아이는 힘들다는 무겁고 가슴 메어지는 단어를 밷었다. 아이의 방에도 카메라가 있었다. 강아지를 확인하는 펫캠처럼 그 카메라는 아이의 모든 동작, 모든 순간을 감시하겠지.
그렇게 부모들 가운데 자식을 더욱 자신의 것으로 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아이를 더욱 소유 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출발선은 다르다. 이들은 높은 질의 교육과 동시에 압박에서 시작한다. 한국의 괴이한 교육 문화는 한 지역으로, 한 도시로, 한 동네로 쏠림 효과를 초래한다. 롤스는 이를 비판한다. 누군가는 더욱 소유되고 있고 누군가는 더욱 소홀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필연적인 평등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원초적 입장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대치동에 살아야만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공식이 그릇하다는 것을 검증하기 위해서, 모두들 점차 동조하는 괴이한 집착에 함께하지 않아도, 환경의 제약에 무관한 평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 것도 없는, 부도 조명도 갖지도 받지도 못하는 여유치 못한 이들을 위햐 그리 만들어진 개념이 바로 ‘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의 법칙’ 이다. 네가 그리 시험장에 몰린 부대낀 인파 속 한 명이 아니더래도 과연 패배자가, 실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무지의 베일이란 마치 커튼이나 안개로 내 정체가 가려져 있는 것 처럼 나의 사회적 위치를 비롯한 환경에 있어 무지한 상태에서 이 세상의 법과 제도를 만들 수 있다면 하는 질문을 묻는 재미있는 롤스의 비유이다. 그는 그 어느 조건도 알지 못해야 우리가 고른 규칙들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될 것, 너무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가 우리 현사회를 운영하는 방도가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상적인 롤스가 주장하는 건강한 사회를 비판하는 학자로 노직이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정직하게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면 그 결과는 그 사람의 것이며 마땅히 인정받아야 한다.” 가 그의 철학이고 이의 반대되는 롤스의 정의관과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근거로써 재분배가 사회를 무기력 하게 만드는 점, 즉 복지가 당신을 떠먹여 준다면 노력을 하는 자도 성취를 위해 달리는 자도 발전하는 세상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꼽는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주장이라 볼 수 있다. 쉽게 표현 한다면 ‘내돈내산’ 을 말하는 셈이기 때문에 말이다. 서양에선 매우 흔한 기여입학제도가 노직의 주장에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다시 롤스의 입장으로 받아치자면 이는 학교라는 교육기관의 학습과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중심으로 하는 본질을 흐리는 제도로 우리 사회를 유한 계급의 놀이터로 삼는 비리와도 다를 바 없을 것이라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슬픈 점이 있다면 이는 양심과 죄책감을 앗아 간다는 것일 것이다. 돈이 곧 힘이고 권력인 구조 안에서 부는 무엇이든 정당화 하는 것이고 만물과 내면의 가치들을 모두 밑으로 내친다는 것이다.
한 어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학원 건물을 매일 찾아오는 모습은 괜히 불편해 지게도 비정상적이였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자라 사교육을 발판으로 명문대에 진학 하여 사회인이 되는 일은 지극히 정상적이라 불리겠지. ‘정상’ 이란 단어의 정의가 재정비 되어야 하는 나날들이 해가 뜨는 매일의 아침과 함께 오고 변화 없이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