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번에 그리다 -알라 프리마-

by 제이티

그림 속 말을 보면 당당함과 넘치는 기품을 느낄 수 있다. 말의 인대 하나하나, 작은 털 끝도 놓치지 않는 묘사는 절로 감탄이 나온다. 하지만 이렇게 세밀한 묘사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다. 어떻게 하면 보다 빨리 그리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이 기법은 개성 넘치는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다가, 이후에는 특정 상황에서 보완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역사상 최고의 그림은 무엇인가?

1985년 영국 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서 화가와 비평가들에게 설문투표를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은 무엇인가?”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아니고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 화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그 위대한 그림은 무엇일까? 바로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 <시녀들>이었다. 의외의 결과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전문가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 그림을 대단하게 평가한 걸까?


주인공은 가운데 있는 어린 소녀인데 그녀는 마르가리타 공주다. 그 옆으로 두 명의 시녀와 난쟁이들 그리고 개가 있다. 왼쪽 캔버스 뒤로 붓과 팔레트를 든 남자가 보인다. 그가 바로 벨라스케스다. 화가를 보는 순간 그림의 편견이 깨진다. 거울을 보면서 공주를 그리는 줄 알았는데 멀리 뒤에 있는 작은 거울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울 속에 두 인물이 보이는데 바로 왕과 왕비다. 관람객이 있는 자리에 왕과 왕비가 있고 화가는 공주가 아니라 이들을 그리는 중이었다. 한창 그림을 그리는 중 지루해진 공주가 엄마 아빠에게 뛰어오는 것으로 보인다. 놀랍고도 참신한 구도와 기획이다. 화가와 문인 철학자들은 그림과 관람자의 관계를 비튼 이런 구도에 놀라운 영감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직업은 ‘궁정화가’다. 끊임없이 초상화를 그려야만 했다. 사진관이 흥하려면 모델의 마음에 들어야 하듯 벨라스케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이러한 제약에 만족하지 못했고 남는 시간에 궁정에 있는 것들을 실험적으로 그렸다. 초상화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면 남는 시간에 그리는 그림은 그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에는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꼼꼼히 그릴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힌다. 붓을 들고 색을 칠하고 마를 때까지 기다리고 또 한 겹 한 겹 칠하고 기다리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그릴 때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었다. 운동인 취미인 사람과 직업인 사람이 역량이 다른 점은 ‘시간’에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취미를 보다 즐기고 싶었던 벨라스케스는 한 가지 묘수를 떠올린다. 바로 한 겹만 칠하는 방법. ‘마르기 전에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알라 프리마’

프로스레로 왕자 VS 시녀들

빠르게 그렸음에도 뛰어난 생동감이 주목할 만하다. <프로스페로 왕자>의 개를 보자. 북슬북슬한 털이 붓질 몇 번으로 그려낸 물감의 얼룩인데 생생하다. 흰색일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붉은색과 푸른색이 눈에 띈다.

<시녀들>에서도 머리장식과 소매가 몇 번의 붓질로 물감이 뭉개져 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가까이 보면 얼룩진 물감 범벅인데 뒤로 물러서 보면 눈으로 본 것과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마치 기적처럼 말이다.”

한정된 시간 내에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탁월한 능력으로 그리는 방법을 새롭게 바꾸어내었다. 이 ‘알라 프리마’를 통해 후배 화가들은 새로운 미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알라 프리마 기법은 미술의 역사를 바꾸었는데 그 시기가 바로 인상주의 시대다. 알라 프리마가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시기로 가보자.


인상주의 시기는 산업혁명의 상징인 철도와 튜브 물감의 발달로 밖에서 그림을 그리는 풍경화가 유행한 시기이기도 했다. 스케치는 야외에서도 가능했지만 채색은 스튜디오로 돌아와 할 수밖에 없었다. 기술적인 한계와 시간이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제약을 없애준 게 알라 프리마 기법이고 이를 가장 완벽히 실현한 화가가 ‘모네’다.

모네가 즐겨 그렸던 <수련>을 보면 눈을 살짝 뜨고 그림의 가운데 밝은 부분을 따라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시선을 옮겨 보자. 마치 물결이 춤을 추듯이 연꽃이 떠다니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지 않은가?

<파라솔을 든 여인>을 보면 파라솔의 색과 드레스의 색이 마치 바람에 휘날리듯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색깔이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이러한 흐르는 색감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거실 벽에 그림을 걸고 싶지 않은가?


알라 프리마 : ‘단번에 그리다’라는 뜻으로 물감이 마르기 전에 그 위에 물감을 칠하는 기법


인상주의 시기는 애석하게도 화가들이 가장 위기감을 느꼈을 시기이기도 하다. 바로 카메라가 보급화된 것이다. 아무리 세밀 묘사를 해봤자 사진보다 더 정확히 그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먹고 살길이 없어진 화가들은 또 다른 생존의 전략을 짜야했다. 그렇다면 카메라가 할 수 없는 건 무엇일까? 보이는 대로 정확히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못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문장을 뒤집어 보면 ‘정확하지’ 않게 사진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여기에 더불어 또 다른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바로 철도의 보급과 튜브 물감의 대량생산이다. 이제 화가들은 캔버스를 들고 철도를 타고 아름다운 곳을 찾아 떠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거기에 ‘알라 프리마’ 기법도 나오면서 이제 채색까지 밖에서 할 수 있었다. 비로소 논스톱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공간의 제약을 없앤 철도 시간의 제약을 없앤 물감과 알라 프리마

다시 조지 스텁스의 <말>와 마네의 <킹 찰스 스패니얼>의 그림을 보자.


정통식 유화는 섬세함과 정교함 그리고 시간과 정성이 만든 작품이다. 한 땀 한 땀 그리다 보니 시간은 오래 걸리고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었다. 알라 프리마 기법으로 그린 오른쪽 그림은 비교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렸지만 더욱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왼쪽 말도 기품이 넘치지만 오른쪽의 개도 충분히 아름다워 보인다.


거기에 하나 더 왼쪽은 그림일까? 사진일까? 분명한 건 오른쪽은 그림이 확실하다.

바로 클래식 고전 미술의 패러다임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https://youtu.be/vAhJXSQy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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