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 유튜브를 뜨겁게 달궜던 콘텐츠가 있다. '가짜 사나이' 100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고, 연일 화제성과 숱한 논란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던 프로그램. 다소 강압적인 훈련 방식, 출연진들의 사생활 논란, 그리고 비인격적인(?) 태도로 도마 위에 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연진들은 불평과 불만보다는 만족한다는 답변과 인터뷰가 많았다. '보는' 사람에게는 불편한 장면이지만 '하는' 사람은 그렇지가 않았나 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매력이 있었길래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을까?
코로나로 연일 지쳐있고 저마다의 이유로 삶에 지쳐있을 때 강력한 동기부여를 원하는 대중의 입맛 어쩌면 시대의 흐름과 읽었다고 해야겠다. 불가능할 것 같은 미션을 수행하면서 출연자들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조금씩 진짜 사나이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도 '하면 된다'의 군대식 마인드를 새기게 된다. 그런데 꼭 소리치는 교관이 있어야만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는 이 모진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인가?
군 복무 시절, 키 190이 넘고 100킬로가 넘는 우리의 소대장 써 전리라고 불리는 남자가 있었다. NFL 선수의 피지컬과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카리스마 그리고 엄청난 손크기 거기에 흑인 특유의 운율이 섞인 갈굼까지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우리 부대는 모두가 하나였다. 그만 빼고... 영화 300을 좋아했는지 그 중사는 우리에게 매일 피티를 두 번에서 많으면 세 번까지 시켰다. 모래 사대를 메고 달리고, 산을 뛰고 말도 안 되는 푸시업 1000개에 3마일을 계속 달리고 한 명이라도 낙오하면 처음부터 다시 기억나는 건 계속 달렸다.
"suffer!! suffer like a man! do it man." 3초에 한 번씩 들리는 저 메아리..
우리는 하늘보다 땅을 많이 보고 있었다. 계속 엎드리고 있어야만 했으니까 무릎이 멀쩡하게 남아있는 병사가 없었다. 물론 우리 부대는 체력 시합에 최우수부대로 선정됐지만 영광의 상처는 컸다. 그런데 부상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가끔 그가 그립다는 것이다. 기억은 간사하게 조작되어 그는 적어도 열정적이었고 최선을 다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가끔 운동할 때 한계치에 다달을 때 그의 고함이 그리운 건 내가 변태라서 그럴까?
유튜브에 없는 게 없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학원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몇 번 핸드폰으로 까딱하면 다 나오지만, 멀쩡한 집 나 두고 독서실이나 도서관을 찾는다. 다이어트는 사실 혼자 굶으면 되는데, 굶기 위해 약을 먹고 단식원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신기한 건 바쁘다고 귀찮다고 핑계를 대면서 친한 친구와의 약속을 미루지만 그렇게 가기 싫은 직장은 매일 눈뜨면 가게 돼있다. 이쯤 되면, 인간이 자유를 원한다는 말을 잘못된 것 같다. 나약하고 게으른 인간은 누군가의 따끔한 채찍이 필요한 존재일까?
자유를 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은 왜 그럴까? 그리고 어디서 왔을까?
플라톤은 세상 만물이 모든 게 원인이 있다고 했다. 곰돌이 푸가 꿀을 보면 "저 꿀은 왜 존재할까? 아! 내가 먹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태양이 뜨고 비가 내리고 날이 저무는 것 모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제작자' '형상' '질료'
요리를 만들 때 요리사(제작자)와 레시피(형상) 재료(질료)가 필요하듯이 이 세상을 만들 때 기본 3가지는 필수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음식을 만들어 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셰프의 경력과 솜씨일까? 아니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레시피일까? 아니면 신선한 재료일까? 흔히 우리는 같은 재료와 레시피가 있어도 음식의 맛을 낼 수 없는 것은 요리사의 실력 차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플라톤의 생각은 달랐다. 바로 레시피라 할 수 있는 형상이 중요했다. 요리사도 레시피 자체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쉽게 예를 들어 스타벅스의 커피맛은 어딜 가든 비슷하다. 만드는 사람은 다르지만 말이다. 프랜차이즈라 부르는 식당을 가면 맛이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은 같은 레시피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슷한 맛을 내려면 다 바뀌어도 레시피는 영원불멸해야 한다. 코카콜라 맛이 같은 이유는 지역과 사람이 달라도 원액의 비율의 조합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콜라 맛은 몇십 년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같다. 변하지 않는 '본질'에 대한 집착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어딜 가나 맛집을 따질 때 '원조'라는 간판과 몇십 년의 정통을 내세운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맛 얼핏 들으면 근사한 말일 수 있으나 사람 입맛은 그렇지가 않다. 김치 맛은 예전보다 더욱 매워졌고, 전통의 평양냉면 맛은 지금 사람에게는 밍밍한 맛일 뿐이다.
바로 여기서 플라톤의 문제가 나온다.
세상에 변하지 않은 게 있어야 하니 지켜야 한다면 이미 세상에서 내가 나와서 할 일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예전 (고) 신해철 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힘든 일을 안 하는 이유가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다고
흘린 땀방울이 성장과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면 당연히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젊은 세대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가 결정돼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 기성세대의 잘 못이라고 지적한 그의 말을 보면 그는 이미 플라톤의 문제점을 보았던 것이다.
나는 쉬는 날에도 잘 쉬지 못한다. 이내 불안한 마음이 들어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하곤 한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무기력이라는 단어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 이따금씩 '번아웃'이 온다. 그럴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몸을 너무 혹사해서 그런다며 쉬는 것을 당부하지만, 나는 사실 쉬는 게 제일 고통스럽다. 무언가 몰입하지 않고 있으면 시간이 흘러가버리는 게 너무 아깝기도 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나 자신을 견딜 수가 없다. 아이러니 한건 바쁘게 살면 살수록 더 무기력한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무언가 하지 않는 순간 다시 말해 공백이 있을 때 라디오에서 2초 이상 말이 없는 방송사고 같은 그런 진공의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오늘도 진공이 싫어서 강아지랑 산책을 한 바퀴 더 돌리고 왔다.
사실 나는 두렵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나에게 어떠한 일이 생길지.. 일어난 일을 담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복잡하고 우연적인 사건의 마주침을 피하기 위해 생활을 '루틴'처럼 만들어서 보내고 있는 듯하다. 아침에 요가나 달리기를 하지 않으면 왠지 모를 찜찜함이 몰려오고, 책을 읽지 않고 수업에 들어가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이 것이 아니면 다른 것을 하면 되는데 새로운 '마주침'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 누군가 마치 나에게 루틴을 강요하는 것처럼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일이 없는 휴일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플라톤과 달리 들뢰즈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새로운 마주침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텐데 말이다.
아는 게 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니..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