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개념의 성숙과 시간—'사회의 사법화' 논의를 계기로

생각의 서고 58화

by 소는영

I. 서론: 문제의 발견

1.

2026년 1월 28일, 법률신문에 게재된 임재성 변호사의 칼럼 "공동체 흔드는 '사회의 사법화'"는 한국 법학계에 중요한 개념적 제안을 던졌다. 그는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한 '사법화' 경향을 충분히 담아내기 위해서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라는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며, '사회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society)라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치의 사법화'는 국가의 주요 정책이 사법부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을 뜻하는 개념으로, 정치(선출된 대의기구)가 판단해야 할 정책적 문제를 소수 사법 엘리트의 판단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이 삼권분립과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4년 헌법재판소가 행정수도 이전 관련 법률을 '관습헌법'이라는 법리로 무효화한 사건을 계기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20년간 이 개념은 본래 의미를 벗어나 남용되었다. 정권의 검찰 남용, 사회갈등의 사법절차 유입 등 성격이 다른 현상들이 모두 '정치의 사법화'로 통칭되면서 개념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2.

임재성은 이러한 혼란을 정리하고, 사법절차를 모사한 절차가 사회 전반에 과잉되는 현상을 온전히 명명하기 위해 '사회의 사법화'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는 스웨덴 정치학자 토르비에른 발린데르와 독일 법사회학자 귄터 토이브너의 논의에 계보를 두고, 무·유죄나 권리관계 존부를 따지는 사법의 좁은 판단방식이 사회 곳곳에 침투하면서 공동체의 자정 능력을 잠식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엄벌주의 경향과 교육 영역에서의 사법화—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아동학대죄 등—를 구체적 사례로 제시한다.


3.

필자는 임재성의 문제의식과 개념적 제안에 동의한다. '사회의 사법화'는 현재 한국 사회의 병리를 정확히 포착하는 개념이며, 이를 통해 비로소 산발적으로 논의되던 여러 현상들—학폭위의 문제, 엄벌주의 입법, 역사부정죄 등—을 관통하는 구조적 문제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필자는 이 개념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왜 토이브너가 1987년에 이미 진단한 문제가 2026년 한국에서 반복되고 있는가? 40년 전의 경고는 왜 작동하지 않았는가?


둘째, 왜 '사회의 사법화'라는 개념이 한국에서는 2026년에야 제안되는가? 이 시간적 지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셋째, 이 개념이 단순한 진단을 넘어 실효를 갖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4.

이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필자는 언어의 시간성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임재성이 칼럼 말미에서 "언어는 세계이자, 인식의 경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듯, 적절한 개념 없이는 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개념의 도입, 공유, 정련, 내면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판례가 변경되기 위해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학계의 비판 축적이 필요하듯, 법관이 시대 속에 있으면서도 시대를 성찰해야 하듯, 법개념도 시간 속에서 성숙한다. 이 글은 '사회의 사법화' 개념을 계기로, 법학에서 언어가 갖는 시간성의 문제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먼저 토이브너의 1987년 진단을 검토하고, 그것이 현재 한국에서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 살펴본다(II). 다음으로 사법화가 왜 부적절한지, 즉 사법의 논리가 다른 사회 영역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분석한다(III). 그 후 이 글의 핵심인 '언어의 시간성' 개념을 정립하고, 판례의 시간성 및 법관의 시간성과의 유비를 통해 법개념이 성숙하는 조건을 탐구한다(IV). 마지막으로 '사회의 사법화' 개념이 실효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한다(V).




II. 토이브너의 진단과 그 반복


5.

독일 법사회학자 귄터 토이브너(Gunther Teubner)는 1987년 "사회영역의 사법화"(Verrechtlichung von Gesellschaftsbereichen)라는 논문에서 법적 권리와 의무의 논리가 사회 곳곳에 침투하면서 발생하는 세 가지 위기를 진단했다.



첫째는 적합성 위기(Adequacy Crisis). 법의 논리가 경제나 교육 등의 영역 고유의 논리와 맞지 않아 현장에서 겉도는 현상이다. 법은 권리와 의무, 유무죄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작동하지만, 교육은 반성과 성장이라는 시간적 과정을 필요로 하고, 경제는 효율과 혁신이라는 역동성을 요구한다. 법적 규제가 이러한 고유 논리를 무시할 때, 규범은 존재하지만 실효성을 잃는다. 토이브너는 노동법이 노사관계의 역동성을 경직시키거나, 환경법이 생태계의 복잡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사례를 들었다.


둘째는 과잉규제 위기(Overregulation Crisis). 법이 너무 촘촘해져서 해당 분야의 자율성을 완전히 죽여버리는 현상이다. 법률은 명확성을 추구하기에 점점 더 세밀한 규정을 만들어내지만, 그 결과 현장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판단보다 법조문을 먼저 찾게 된다. 의료, 교육, 연구 같은 전문 영역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규제가 늘어날수록 혁신과 창의성은 위축되고, 형식적 준수만이 남는다.


셋째는 법의 자기파괴 위기(Self-Destruction of Law). 법이 개입하면 할수록 오히려 갈등이 증폭되어 법 자체의 권위가 떨어지는 현상이다. 법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개입하지만, 법적 절차 자체가 새로운 갈등을 낳고, 법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 토이브너는 이를 법의 역설이라고 불렀다. 법에 의존하면 할수록 법은 무력해진다.


토이브너와 같은 맥락에서, 스웨덴 정치학자 토르비에른 발린데르(Torbjörn Vallinder)는 사법적 절차가 사회 전반의 분쟁 해결을 대체하는 현상을 경고했다. 그는 사법화가 단순히 법원의 권한 확대를 넘어, 사회의 모든 의사결정 과정이 사법적 절차—증거제시, 변론, 제3자 판단—를 모방하게 되는 광범위한 현상임을 지적했다.



6.

토이브너의 논문이 나온 지 거의 40년이 지났다. 그 사이 법사회학은 발전했고, 많은 법학자들이 그의 통찰을 인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6년 한국에서 임재성은 거의 동일한 문제를 지적해야 했다. 왜 같은 진단이 반복되는가?


한 가지 이유는 토이브너의 경고가 주로 유럽, 특히 독일의 맥락에서 논의되었고, 한국 법학계에 충분히 수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념의 지리적 이동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법화가 일종의 구조적 유혹이라는 점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갈등이 증가할 때, 법은 가장 손쉬운 해결책처럼 보인다. 명확한 기준, 강제력, 제3자의 권위—이 모든 것이 불확실성을 줄여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사법화 경향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한국의 경우, 이 유혹은 특별히 강력하다. 그 이유는 제도 신뢰의 전면적 붕괴라는 맥락에 있다. 정치는 오랫동안 국민의 신뢰를 잃었고, 행정은 무능하거나 부패한 것으로 인식되며, 교육과 의료조차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법은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진다. 검찰과 법원이 정의를 실현해줄 것이라는, 혹은 최소한 명확한 판단을 내려줄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된다.



7.

그러나 역설적으로, 비사법 영역의 신뢰 붕괴가 사법에 대한 의존을 키울수록, 사법 자체도 무너진다. 다음과 같은 악순환이 형성된다.



* 1단계: 비사법 영역의 신뢰 붕괴 → 사법 의존 증가

정치가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법원에 호소한다. 학교가 교육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학부모는 경찰에 신고한다. 기업 내부의 윤리 문제는 내부 절차보다 고소·고발로 이어진다. 모든 갈등이 사법절차로 쏟아져 들어온다.


* 2단계: 사법 과부하 → 문제 미해결

법원과 검찰은 본래 자신들이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들을 떠안게 된다. 교육적 판단, 정책적 판단, 윤리적 판단을 법적 판단으로 환원하려 하지만, 법의 논리는 이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토이브너가 말한 적합성 위기가 발생한다. 판결은 나오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 3단계: 사법 신뢰 하락 → 더 강한 법 요구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사람들은 "법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처벌이 약하고, 규제가 느슨하고, 법원이 무능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더 강한 법, 더 엄한 처벌을 요구한다. 엄벌주의가 대두된다.


* 4단계: 엄벌주의 → 과잉규제와 법의 자기파괴

형량은 높아지고, 새로운 범죄가 만들어지고, 규제는 촘촘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토이브너가 말한 과잉규제와 법의 자기파괴를 초래한다. 법에 대한 실망은 더 깊어지고, 사람들은 다시 1단계로 돌아간다. 악순환이 완성된다.



8.

이 악순환은 두 영역에서 특히 선명하게 나타난다.



첫째, 엄벌주의다. 한국은 최근 비유럽권 최초로 역사부정처벌죄를 도입했다. 5·18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표현을 처벌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역사 해석의 문제를 형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역사 왜곡은 분명 문제지만, 그것을 처벌로 대응하는 것이 적절한가? 교육, 기억의 정치, 시민사회의 비판이라는 대안은 왜 고려되지 않았는가? 음주운전과 같은 기존 범죄에 대해서도 처벌을 지나치게 강화하는 입법이 이어져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나오고 있다. 형량을 높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가? 음주문화, 대중교통 인프라, 음주운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런 맥락은 무시된 채, 오직 "처벌 한길"만이 제시된다.


둘째, 교육 영역의 사법화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는 학교 안 법정으로 설계되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고, 증거를 제시하고, 제3자가 판단하는 사법적 절차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의 논리와 충돌한다. 교육은 반성과 사과, 화해와 성장을 지향하지만, 학폭위는 유무죄 판단과 처벌에 집중한다. 그 결과 교사의 교육적 개입은 차단되고, 변호사의 논리가 교실에 횡행한다. 학생들은 서로를 고소할 대상으로 보게 되고, 신뢰는 무너진다. 아동학대죄도 마찬가지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분쟁이 '아동학대죄' 여부로 치환되면서, 교육적 관계 자체가 파괴된다. 임재성이 지적했듯, "사법화가 공동체의 신뢰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서글픈 모습이 지금 우리의 학교다."


이 모든 현상은 검찰과 법원의 권한을 강화한다. 점점 더 많은 영역에서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하고, 법원이 최종 결정을 내린다. 정책적 대안은 사라지고, 사법적 판단만이 남는다. 토이브너가 1987년에 경고한 바로 그 문제가, 2026년 한국에서 반복되고 있다.




III. 사법화의 부적절성: 언어와 영역의 부정합


9.

사법의 논리는 명확한 구조를 갖는다.


첫째, 이분법적 판단이다. 유죄 또는 무죄, 합법 또는 위법, 권리의 존재 또는 부존재. 사법은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회색은 존재하지 않고, 흑과 백만이 있다. 이것은 법적 안정성을 위해 필수적이다. 판결은 명확해야 하고, 집행 가능해야 한다.


둘째, 권리와 의무의 논리다. 사법은 누가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권리),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의무)를 판단한다. 이것은 차가운 논리다. 관계의 맥락, 감정, 공동체의 역사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법률상 권리관계의 존부다.


셋째, 과거 행위에 대한 판단이다. 사법은 이미 일어난 일을 다룬다. 범죄가 저질러졌는가? 계약이 위반되었는가? 불법행위가 있었는가? 사법의 시선은 과거를 향한다. 물론 장래의 분쟁 예방이라는 목적도 있지만, 사법 판단 자체는 항상 과거의 사실에 기초한다.


넷째, 제3자의 권위적 판단이다. 당사자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제3자인 법관이 최종적으로 판단한다. 이 판단은 국가의 강제력으로 뒷받침된다. 따라서 사법 판단은 대화나 협상이 아니라 명령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사법이 본래 기능—권리 보호, 분쟁 해결, 법질서 유지—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 논리가 다른 사회 영역에 침투할 때 발생한다.



10.

교육의 고유한 논리는 무엇인가? 교육은 관계와 시간의 과정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신뢰, 학생들 사이의 우정, 공동체의 규범이 교육의 토대다. 그리고 교육은 본질적으로 미래지향적이다. 과거의 잘못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딛고 성장하는 것이 목표다. 반성, 사과, 화해는 단순히 잘못을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사법의 논리가 이 영역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를 보자. 학폭위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구분한다. 이분법이다. 누가 잘못했고, 누가 피해를 입었는가? 그러나 학교의 많은 갈등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A가 B를 괴롭혔지만, B도 C를 괴롭혔고, C는 다시 A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 있다. 관계는 복잡하고, 책임은 얽혀 있다. 그런데 학폭위는 명확한 가해자를 찾아내야 한다.


학폭위는 증거를 요구한다. 목격자 진술서, 문자 메시지 캡처, 녹음 파일. 학생들은 서로를 고발할 증거를 수집한다. 변호사가 개입하고, 법률적 논리가 전개된다. "이것은 학교폭력법상 '폭력'에 해당하는가?" "고의가 있었는가?" 교사는 이 과정에서 무력하다. 교육적 판단—이 학생에게는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 어떻게 하면 이들이 다시 함께 생활할 수 있는가—은 설 자리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폭위는 처벌을 전제한다. 서면사과, 접촉금지, 전학 등의 조치가 내려진다. 그리고 이것은 학생부에 기재되어 평생 따라다닌다. 이것은 사법의 논리다. 잘못에 대한 응보. 그러나 교육은 응보가 아니라 교정을 지향한다. 처벌이 아니라 성장을 목표로 한다.

결과적으로, 교육적 관계는 법적 관계로 전환된다. 학생들은 서로를 잠재적 피고와 원고로 본다. 교사는 교육자가 아니라 조사관이 된다. 신뢰는 무너지고, 학교는 법정이 된다. 토이브너가 말한 적합성 위기가 여기 있다. 사법의 논리가 교육 현장에서 겉돈다.


아동학대죄도 같은 문제를 낳는다. 교사가 학생을 훈육하는 과정에서 신체 접촉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동학대죄'인가? 법은 명확한 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교육적 맥락에서 이것은 단순히 유무죄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교사의 의도, 학생의 상황, 학교의 문화, 교육적 필요성—이 모든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데 일단 형사사건이 되면, 이 모든 맥락은 사라진다. "객관적으로 신체적 고통을 가했는가?"만 남는다.


교사들은 두려워한다. 학생을 제대로 가르치다가 아동학대죄로 고소당할 수 있다는 공포. 그래서 많은 교사들이 적극적 교육을 포기한다. 관계는 단절되고, 교실은 냉각된다. 법이 개입할수록 교육은 위축된다. 토이브너가 말한 과잉규제와 법의 자기파괴가 동시에 일어난다.



11.

정치와 정책의 고유한 논리는 무엇인가? 정치는 타협과 협상의 과정이다. 완벽한 정답은 없고, 다양한 가치와 이익이 충돌한다. 정치는 이것들을 조율하고, 최선이 아닌 차선을 찾아간다. 그리고 정책은 본질적으로 미래지향적이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정책은 실험이고, 수정 가능하며, 평가를 통해 개선된다.


사법의 논리가 이 영역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2004년 행정수도 이전 사건을 보자. 국회는 여야 합의로 수도 이전 법률을 통과시켰다. 대통령은 이것을 최우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국민의 대표기관이 정책을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이 법률을 위헌으로 판단했다. "관습헌법"이라는 법리를 동원해서,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헌법적 가치이므로 법률로 변경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사법은 정책 판단을 법적 판단으로 환원했다. "수도를 이전해도 되는가"라는 정치적 질문을, "수도 이전이 합헌인가"라는 법적 질문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정책의 문제다. 수도 이전의 장단점, 국토 균형 발전, 재정 부담, 국민 여론—이것들은 정치가 판단해야 할 사안이다. 법원이 "옳고 그름"을 선언할 문제가 아니다.



12.

사법화가 정책 영역에 침투하면, 정치적 토론의 공간이 사라진다. 모든 정책이 법률로 만들어지고, 모든 법률은 헌법재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 정치인들은 무엇을 하는가? 정책을 논의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헌법재판소의 눈치를 본다. "이 법안이 헌재를 통과할 수 있을까?" 정치는 법률 기술자의 영역이 되고, 민주적 토론은 위축된다.


더 심각한 것은, 사법 판단이 정책 문제를 "종결"시켜버린다는 점이다. 정책은 계속 논의되고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정책은 폐기하고, 새로운 정책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헌법재판소가 "위헌"이라고 판단하면, 그 문제는 닫힌다. 더 이상 논의할 여지가 없다. 헌법이 답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질식시킨다.



13.

나아가 각 사회 영역은 고유한 언어와 논리를 갖는다. 교육의 언어는 성장과 관계이고, 정치의 언어는 타협과 비전이며, 경제의 언어는 효율과 혁신이다. 사법의 언어는 권리와 의무, 합법과 위법이다. 이 언어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적합하고 필요하다(자세한 내용은 기존의 글로 갈음한다)


타인을 향한 최소한의 배려, 그것이 곧 우리 자신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각 영역의 언어를 존중하는 것이, 결국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지키는 길이다. 사법화는 이 다양성을 단일화하고, 풍요로움을 빈곤하게 만든다. 이것을 인식하고, 각 도메인의 고유한 언어를 회복하는 것—이것이 사회의 사법화에 대한 첫 번째 대응이다.



IV. 언어의 시간성: 개념의 성숙과 변화의 조건


14.

임재성은 칼럼 말미에서 이렇게 썼다. "언어는 세계이자, 인식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 간결한 진술은 법학에서 언어가 갖는 의미를 정확히 포착한다. 언어는 단순히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사유 그 자체를 구성한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세계를 분절한다. 언어 밖에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법학에서 이것은 특히 중요하다. 법은 본질적으로 언어로 구성된다. 법률은 문장으로 쓰여 있고, 판례는 언어로 논증되며, 법리는 개념으로 정립된다. 다른 학문 분야—예컨대 수학이나 자연과학—는 언어를 넘어서는 표현 수단을 갖는다. 수식, 그래프, 실험 데이터. 그러나 법학은 언어를 떠날 수 없다. 법학자는 궁극적으로 언어로만 작업한다.


이것은 필자가 이전에 쓴 에세이에서 다룬 주제이기도 하다. 불교의 '뗏목 비유'—깨달음에 이른 후에는 가르침(법, dharma)을 버려야 한다는—를 떠올리며, 나는 법학자의 딜레마를 성찰했다. 다른 학문은 자신의 도구를 버릴 수 있다. 물리학자는 수학을 도구로 쓰지만, 궁극적으로 물리적 실재를 탐구한다. 그러나 법학자는 언어를 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법 자체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법학자가 언어를 버리는 순간, 법은 사라진다.



15.

그렇다면 법학에서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념은 복잡한 현실을 포착하고 정리하는 언어적 도구다. "사회의 사법화"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학폭위의 문제, 엄벌주의 경향, 역사부정죄, 교육의 위축—이 모든 현상들을 개별적으로 인식했다. 각각이 문제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들을 관통하는 구조적 문제를 포착할 언어가 없었다.


'정치의 사법화'라는 개념도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개념은 법원의 정책결정을 비판하기 위해 고안되었고, 사회 전반의 사법화 현상을 담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20년간 남용되면서 개념적 혼란만 가중시켰다. 그래서 임재성은 새로운 개념—'사회의 사법화'—를 제안했다. 이 개념이 생기는 순간, 산발적이던 현상들이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된다. 이제 우리는 문제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언어와 인식의 관계다. 적절한 개념 없이는 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개념이 생기면,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 임재성의 칼럼은 단순히 현상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현상을 명명함으로써 그것을 가시화했다. 명명은 창조다. 개념은 세계를 만든다.



16.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만약 개념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왜 토이브너가 1987년에 이미 진단한 문제를 우리는 2026년에야 '사회의 사법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가? 왜 40년이 걸렸는가? 개념의 필요성과 개념의 실제 도입 사이에는 왜 시간적 간극이 존재하는가? 귄터 토이브너의 논문 "사회영역의 사법화"(Verrechtlichung von Gesellschaftsbereichen)는 1987년에 출판되었다. 거의 40년 전이다. 토이브너는 이미 그때 적합성 위기, 과잉규제, 법의 자기파괴를 경고했다. 사법의 논리가 다른 사회 영역에 침투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을 명확히 진단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2026년에 와서야 이 논의가 본격화되는가?



첫 번째 이유는 지리적·언어적 거리다. 토이브너는 독일어로 썼고, 그의 논의는 주로 유럽, 특히 독일 법사회학의 맥락에서 전개되었다. 한국 법학계에 이 논의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번역의 문제, 학술적 관심의 문제, 문제의식의 차이. 개념의 국제적 이동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두 번째 이유는 경험적 축적의 필요성이다. 토이브너의 진단이 한국 사회에 절실하게 와닿으려면, 한국이 실제로 사법화를 경험해야 했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가 2004년 도입되고, 그것이 20년간 작동하면서 문제가 누적되어야 했다. 엄벌주의 입법이 쏟아지고,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는 일이 반복되어야 했다. 아동학대죄로 교사들이 위축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야, 토이브너의 추상적 이론이 구체적 현실로 다가온다.


세 번째 이유는 기존 개념의 포화와 한계 인식이다. 한국에서는 2004년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 이전 위헌 결정을 계기로 '정치의 사법화'라는 개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개념이 유용해 보였다. 법원이 정치적 결정을 좌우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도구였다. 그러나 이후 20년간 이 개념은 남용되었다.


정권이 검찰을 이용해 정적을 수사하는 것도 '정치의 사법화'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불법적 사법 무기화다. 사회갈등이 고소·고발로 쏟아지는 것도 '정치의 사법화'라고 했지만, 이것은 정치의 부재가 원인이지 사법부의 정책결정이 문제가 아니다. 개념이 너무 넓게, 부정확하게 사용되면서, 오히려 현상을 흐리게 만들었다. 개념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17.

이런 상황에서 임재성의 제안—'사회의 사법화'—은 적시에 나온 개념적 혁신이다. 이 개념은 '정치의 사법화'와 구별되며, 보다 광범위한 현상을 포착한다. 사법절차를 모사한 절차가 사회 전반에 과잉되는 현상. 유무죄 이분법이 다른 영역의 논리를 대체하는 현상. 이것을 명명할 언어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왜 2026년인가? 왜 2015년이나 2020년이 아니라 지금인가? 이것은 시간적 성숙의 문제다. 개념이 필요하다고 해서 즉각 제안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누적되고, 기존 개념의 한계가 명확해지고, 이론적 성찰이 깊어져야 한다. 2004년 학폭위 도입 후 20년의 경험, 엄벌주의 입법의 반복과 헌재 위헌결정, 교육 현장의 위축, 사법에 대한 실망—이 모든 것이 축적되어야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 축적된 경험을 하나의 개념으로 응축할 수 있어야 했다. 토이브너의 1987년 논의를 발견하고, 발린데르의 연구를 참조하며, 한국의 구체적 현실과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 임재성이 그 역할을 한 것이다. 개념은 진공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경험의 축적, 이론적 준비, 그리고 적절한 시점—이 모든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개념의 시간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개념이 태어나고 성숙하고 확산되는 데 걸리는 시간. 이 시간은 인위적으로 단축할 수 없다. 토이브너가 1987년에 개념을 제시했다고 해서, 그것이 즉시 한국에 이식될 수는 없었다. 한국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언어로, 이 개념을 다시 발견해야 했다. 그 과정이 40년 걸렸다.


물론 이것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40년이면 너무 긴 것 아닌가? 그 사이 얼마나 많은 문제가 방치되었는가? 그러나 이것이 언어와 인식의 숙명이다. 책에 쓰인 개념을 읽는다고 해서 즉시 내면화되지 않는다. 그 개념이 나의 경험과 만나고, 나의 사유 체계 안에 자리 잡고, 나의 언어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도 그러한데, 사회 전체는 오죽하겠는가.




2026. 1. 30.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