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59화
필자는 이전에 '시간과 판례의 변경'이라는 주제로 연구한 적이 있다. 판례가 변경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단순히 "기존 판례가 틀렸다"는 지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법원은 자신의 판단을 쉽게 번복하지 않는다. 법적 안정성, 신뢰 보호, 예측 가능성—이 모든 가치가 판례의 지속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판례는 언제 변경되는가?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여러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기존 판례가 더 이상 사회의 법감정과 맞지 않는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둘째, 학계의 지속적 비판이 축적되어야 한다. 법학자들이 논문을 통해 기존 판례의 법리적 문제를 지속적으로 지적해야 한다.
셋째, 하급심 판결들의 축적이 필요하다. 하급심 법관들이 대법원 판례에 불편함을 느끼고, 사안을 구별하거나 제한 해석을 시도하는 판결들이 쌓여야 한다.
넷째, 다른 판례들과의 긴장이나 모순이 드러나야 한다. 기존 판례가 법체계 내에서 조화롭게 작동하지 않고, 다른 법리들과 충돌한다는 것이 명백해져야 한다.
다섯째, 때로는 입법적 대응이 판례 변경을 촉발한다. 국회가 법률을 개정함으로써 대법원에 판례 재검토의 기회를 준다.
이 모든 조건이 갖춰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관습법에 관한 대법원 판례를 생각해보자. 오랫동안 대법원은 관습법의 성립 요건을 엄격히 보았다. 그러다가 2005년 호주제 사건에서 헌법재판소가 호주제를 위헌으로 판단하자, 대법원도 점차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수십 년간의 학계 비판, 여성운동의 사회적 압력, 하급심의 다양한 시도들이 축적된 결과다.
혼인빙자간음죄에 관한 판례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형법학계는 이 죄를 비판했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여성을 보호의 객체로만 본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판례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2013년에 와서야 대법원은 혼인빙자간음죄 조항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을 받아들였다. 수십 년의 비판이 축적된 후였다.
판례 변경의 이 시간성은 법개념 변화의 시간성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정치의 사법화'에서 '사회의 사법화'로의 개념 전환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기존 개념의 한계가 누적적으로 인식되고(✓), 새로운 개념의 이론적 기초가 마련되고(토이브너, 발린데르 등), 학계에서 논의가 시작되고(지금 진행 중), 실무에서 활용되기 시작하고(앞으로), 마침내 일반적으로 수용된다(더 먼 미래).
판례 변경이 그러하듯, 개념의 변화도 인위적으로 앞당길 수 없다. 성급한 판례 변경은 법적 불안정성을 초래한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준비 없이 새로운 개념을 강제로 도입하면 혼란만 가중된다. 개념도 성숙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적시의 제안은 중요하다. 그리스어로 '카이로스'(kairos)—적절한 시점, 기회의 순간—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너무 이르면 받아들여지지 않고, 너무 늦으면 이미 의미가 없다. 판례 변경도 적절한 시점이 있듯, 개념 도입도 적절한 시점이 있다. 임재성의 '사회의 사법화' 제안은 바로 그 카이로스를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가 20년간 사법화를 경험했고, '정치의 사법화' 개념의 한계가 명확해진 지금, 새로운 개념이 필요한 시점이다.
판례의 시간성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인내다. 옳은 법리라고 해서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논증하고, 설득하고,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사법화'라는 개념도 제시되었다고 해서 내일 당장 모든 사람이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법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비판되고, 정련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실무가들이 이 개념을 내면화하고, 정책입안자들이 이것을 고려하고, 법관들이 판결에서 참조하기까지는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비관적 전망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변화의 필연성을 보여준다. 판례도 변한다. 아무리 확고해 보이는 대법원 판례도,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 왜냐하면 사회가 변하고, 법감정이 변하고, 학계의 비판이 축적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개념도 변한다. '정치의 사법화'가 20년간 지배적 개념이었지만, 이제 '사회의 사법화'로 전환되고 있다. 개념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시간 속에서 진화한다.
필자는 이전에 '법관의 시간성'에 관해서도 연구했다. 특히 극단 상황에서 법관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뤘다. 독일의 라드브루흐 공식—극단적으로 부정의한 법은 법이 아니다—을 둘러싼 논쟁, 한국의 12·12 사태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법적 판단, 최근의 계엄 사태에 대한 법관의 책임 문제. 이 모든 것이 법관의 시간성과 관련된다.
법관의 시간성이란 무엇인가? 법관은 자신의 시대를 넘어설 수 없다. 법관도 특정 시대에 살고, 그 시대의 가치관과 법감정 속에서 교육받았으며, 그 시대의 언어로 사유한다. 법관이 초시대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법관은 역사적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법관은 시대에 완전히 포획되어서도 안 된다. 법관의 역할은 단순히 현재의 다수 의견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법관은 법의 정신, 헌법의 가치, 인권의 보편성을 수호해야 한다. 때로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고, 다수의 광기에 맞서야 한다. 법관은 시대 속에 있으면서도 시대를 성찰해야 하는 이중적 존재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해석학적 순환 개념과 연결된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에서 "선이해"(Vorverständnis)의 개념을 제시한다. 우리는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이미 선입견과 기대를 가지고 접근한다.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텍스트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지평 속에서 텍스트를 만난다.
그러나 해석은 단순히 선이해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텍스트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의 선이해 자체가 변화한다. 텍스트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하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킨다. 이것이 해석학적 순환이다. 이해는 순환적 과정이며, 이 순환을 통해 우리의 지평이 확장된다.
법관의 법해석도 마찬가지다. 법관은 자신의 선이해—시대의 법감정, 개인적 가치관, 법학 교육에서 배운 법리—를 가지고 사건에 접근한다. 그러나 사건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법관의 선이해도 변화한다. 어려운 사건일수록, 법관은 자신의 전제를 의심하고, 다른 관점을 고려하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법적 이해를 심화시킨다.
법개념의 변화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사회의 사법화'라는 개념이 제시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이 개념의 영향 아래 들어간다. 우리의 선이해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학폭위를 볼 때, 엄벌주의 입법을 평가할 때, 이제 우리는 "이것이 사회의 사법화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개념이 우리의 인식을 재구성한다.
그러나 개념이 완전히 내면화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법관들이 '사회의 사법화' 개념으로 자신의 판결을 성찰하게 되기까지, 입법자들이 이 개념을 고려하며 법안을 만들게 되기까지, 시민들이 이 언어로 사회 문제를 논의하게 되기까지. 이것은 점진적 과정이다.
법관의 시간성이 가르쳐주는 것은 성찰의 필요성이다. 법관은 자신이 시대 속에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자신의 판단이 시대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을 통해, 시대를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한다.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지만, 노력 자체가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법학자는 자신이 특정 개념 체계 속에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정치의 사법화'라는 개념으로 20년간 사유해왔다면, 그 개념이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고 있을 수 있다. '사회의 사법화'라는 새로운 개념은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볼 것을 요청한다. 이 요청에 응답하는 것, 개념을 갱신하려는 노력 자체가 법학의 발전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념의 도입과 지연, 판례 변경의 시간성, 법관의 시간성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것들을 종합하여 언어의 시간성이라는 개념을 정립할 수 있다.
언어의 시간성이란, 새로운 법개념이 제시된 후 그것이 법학계에 수용되고, 논쟁을 거쳐 정련되며, 실무에 영향을 미치고, 최종적으로 법적 판단의 틀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뜻한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의 경과가 아니라, 의미 있는 변화가 축적되는 과정이다.
언어의 시간성은 세 층위로 구성된다.
첫째는 판례의 시간성이다. 법개념이 변화하면, 궁극적으로 판례도 변한다. 그러나 이것은 즉각적이지 않다. 학계의 비판이 축적되고, 하급심 판결이 쌓이고, 사회적 인식이 변해야 한다. 판례가 변경되는 데 걸리는 시간.
둘째는 법관의 시간성이다. 법관은 시대 속에 있으면서도 시대를 성찰해야 한다. 새로운 개념이 제시되었을 때, 법관이 그것을 자신의 선이해로 받아들이고, 그 개념으로 사건을 다르게 보게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
셋째는 개념의 시간성 그 자체다. 개념이 태어나고, 논쟁되고, 정련되고, 확산되는 데 걸리는 시간. 이 세 층위는 서로 얽혀 있다. 개념이 변하면 법관의 사고가 변하고, 법관의 판결이 변하면 판례가 변한다. 그리고 판례가 변하면 다시 개념이 정련된다. 순환적 과정이다.
법학에서 언어의 시간성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법학이 다른 학문보다 언어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실험으로 이론을 검증할 수 있고, 경제학은 데이터로 모형을 테스트할 수 있다. 그러나 법학은 궁극적으로 언어로만 작업한다. 법개념이 변하면, 그것은 단순히 용어의 변화가 아니라 패러다임의 변화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철학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논했다. 과학자 공동체가 공유하는 전제, 방법, 문제의식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법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 '정치의 사법화'에서 '사회의 사법화'로의 전환은 단순히 개념 하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현상을 보는 방식, 문제를 진단하는 틀, 해법을 모색하는 방향이 모두 바뀐다.
'사회의 사법화' 개념이 정착되면, 입법이 달라질 수 있다. 새로운 형사처벌 규정을 만들 때, 입법자는 "이것이 사회의 사법화를 심화시키는 것은 아닌가?"라고 자문하게 될 것이다. 판결도 달라질 수 있다. 학폭위 조치에 대한 행정소송에서, 법원은 "학폭위 제도 자체가 교육 영역의 사법화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관점에서 판단할 수 있다. 정책도 달라질 수 있다. 교육부는 학폭위를 재검토하고, 교육적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즉각적이지 않다. 개념이 제시되었다고 해서 내일 당장 모든 것이 바뀌지 않는다. 언어의 시간성은 인내를 요구한다. 성급한 해법에 대한 경계를 요구한다. 언어가 성숙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 사이 계속된 논의와 비판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법학의 본령이다.
동시에, 언어의 시간성은 낙관의 근거이기도 하다. 시간이 걸리지만, 변화는 일어난다. 판례도 변하고, 개념도 변하고, 법학도 발전한다. '사회의 사법화'라는 개념이 지금은 새롭지만, 10년 후에는 상식이 될 수 있다. 20년 후에는 법학 교과서에 실릴 수 있다. 그리고 그때는 또 다른 새로운 개념이 필요할 것이다. 언어는 멈추지 않는다. 시간 속에서 계속 진화한다.
임재성이 "언어는 세계이자, 인식의 경계"라고 했을 때, 그것은 언어의 힘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본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언어의 한계를 말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언어 밖을 볼 수 없다. 그리고 언어는 시간 속에서만 변한다.
'사회의 사법화'라는 개념의 제시는 출발점이다. 이제 이 개념이 성숙하고, 논쟁되고, 정련되고, 확산되는 과정이 시작된다. 이것이 언어의 시간성이다. 우리는 이 시간을 존중해야 하며, 동시에 이 시간 속에서 능동적으로 개념을 발전시켜야 한다. 기다리되 게으르지 않게, 조급하지 않되 나태하지 않게. 이것이 법학자의 자세다.
이 글은 임재성 변호사의 '사회의 사법화' 개념 제안에서 출발했다. 이 개념은 현재 한국 사회의 병리를 정확히 포착한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엄벌주의 입법, 역사부정죄, 교육 현장의 위축—이 산발적으로 보이던 현상들이 사실은 하나의 구조적 문제, 즉 사법의 논리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의 징후들이었다. '정치의 사법화'라는 기존 개념으로는 이 광범위한 현상을 담아낼 수 없었다.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고, 그 언어가 제시되었다.
필자는 이 개념의 필요성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토이브너가 1987년에 경고한 세 가지 위기—적합성 위기, 과잉규제, 법의 자기파괴—는 2026년 한국에서 생생히 반복되고 있다. 사법의 논리는 교육의 논리, 정치의 논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무죄 이분법, 권리와 의무의 차가운 논리, 과거 행위에 대한 판단—이것들은 사법 고유의 영역에서는 적합하지만, 다른 영역에 침투할 때 문제를 낳는다.
더 근본적으로, 이것은 언어의 문제다. 각 사회 영역은 고유한 언어와 논리를 갖는다. 도메인마다 다른 화폐가 통용된다. 그런데 사법화는 사법의 언어를 유일한 통용 화폐로 만드는 과정이다. 다른 영역의 언어들은 평가절하되고, 사법의 언어만이 모든 거래를 매개하게 된다. 이것은 각 영역의 자율성을 파괴하고, 사회의 다양성을 획일화한다.
그러나 이 글은 단순히 문제를 진단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제기한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토이브너의 40년 전 경고가 지금 다시 반복되는가? 왜 '사회의 사법화' 개념이 2026년에야 한국에서 제안되는가? 개념의 필요성과 실제 도입 사이의 시간적 간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자는 언어의 시간성이라는 관점을 제시했다. 개념은 진공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경험이 축적되고, 이론적 준비가 이루어지고, 기존 개념의 한계가 명확해져야 한다. 그리고 적절한 시점—카이로스—에 누군가가 그 경험을 새로운 언어로 응축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판례 변경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인식의 변화, 학계의 비판 축적, 하급심의 시도, 입법적 대응—이 모든 것이 시간을 두고 성숙해야 판례가 변한다. 법관의 시간성도 마찬가지다. 법관은 시대 속에 있으면서도 시대를 성찰해야 하는데, 이 성찰적 거리를 확보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가다머가 말한 해석학적 순환처럼, 선이해와 이해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의 지평이 확장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법개념의 변화도 같은 구조를 갖는다. '사회의 사법화'라는 개념이 제시되었다고 해서, 내일 당장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 개념이 법학계에 수용되고, 논쟁되고, 정련되고, 실무에 영향을 미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을 우리는 언어의 시간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언어의 시간성 개념은 두 가지 함의를 갖는다. 첫째는 인내다. 우리는 성급한 해법을 경계해야 한다. "사회의 사법화가 문제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학폭위를 폐지하고, 엄벌주의 입법을 중단하고, 법원의 권한을 축소하자." 이런 식의 즉각적 처방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학폭위에도 문제가 있지만, 그것이 만들어진 배경—학교폭력의 심각성, 피해자 보호의 필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엄벌주의도 마찬가지다. 형량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처벌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진정한 변화는 점진적이다. 먼저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적절한 언어로 명명하고, 그 언어가 공유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사회의 사법화'라는 개념이 법학자, 법조실무가, 정책입안자, 시민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각자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구체적 상황에 적용되는 과정. 이것은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둘째로, 언어의 시간성은 낙관의 근거이기도 하다. 시간이 걸리지만, 변화는 일어난다. 판례도 변하고, 개념도 변하고, 법학도 발전한다. 20년 전에는 '정치의 사법화'가 새로운 개념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의 한계가 명확하다. 10년 후에는 '사회의 사법화'가 상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는 또 다른 새로운 개념이 필요할 것이다.
언어는 멈추지 않는다. 시간 속에서 계속 진화한다.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보지만, 언어 자체도 세계와의 대화를 통해 변한다. 법학은 이 언어의 진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기존 개념의 한계를 비판하고,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고, 그 개념을 논쟁을 통해 정련하는 것. 이것이 법학의 본령이다.
'사회의 사법화' 개념이 실효를 갖기 위해서는 법학계의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개념의 정교화다. 임재성은 개념의 윤곽을 제시했지만, 이것을 더 정교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회의 사법화는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정치의 사법화, 법의 지배, 법치주의와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어느 정도의 사법 개입은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과잉'인가? 이런 이론적 작업이 필요하다.
둘째, 경험적 연구다. 한국에서 사회의 사법화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학폭위, 엄벌주의 입법, 행정소송의 증가, 형사처벌의 확대—이런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분석해야 한다. 통계 자료, 사례 연구, 비교법적 고찰. 경험적 토대 위에서 개념이 더 견고해진다.
셋째, 실무와의 대화다. 법관, 검사, 변호사들이 일선에서 느끼는 문제의식을 경청해야 한다. 그들은 사법화의 최전선에 있다. 학폭위 사건을 다루는 판사, 엄벌주의 입법 하에서 구형을 고민하는 검사, 아동학대죄로 고소된 교사를 변호하는 변호사. 이들의 경험과 고민이 이론을 풍부하게 만든다.
넷째, 다른 학문과의 협업다. 사법화는 법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학자들은 학폭위가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사회학자들은 신뢰 붕괴와 사법 의존의 관계를 분석하며, 정치학자들은 사법부의 정치적 역할을 탐구한다. 학제간 대화를 통해, 우리는 문제를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다섯째, 정책 제안이다. 비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의 사법화가 문제라면, 대안은 무엇인가? 학폭위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엄벌주의를 넘어서는 형사정책은 무엇인가? 각 영역의 고유한 언어를 회복하기 위한 제도적 방안은? 법학은 실천적 학문이다. 이론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글을 마치며, 필자는 확정적 답변보다는 열린 질문을 남기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무엇을 법으로 다룰 수 있는가? 법의 영역과 비법의 영역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그을 수 있는가? 그 경계는 고정된 것인가, 아니면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는가? 역사 해석을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 교육적 훈육과 아동학대의 구별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질문들을 계속 던지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둘째, 법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법을 강화하는가, 약화시키는가?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법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법의 정당성을 높이는가? 필자는 후자라고 믿는다. 법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법은 더 강해진다. 법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때, 법은 본래 역할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다. 사법화를 비판하는 것은 법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법을 정당한 위치에 놓는 것이다.
셋째, 통용된 신뢰상태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사회의 사법화는 결국 신뢰의 문제다. 정치, 교육, 행정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에, 사람들은 사법에 의존한다. 그러나 사법도 과부하로 신뢰를 잃어간다.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각 영역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회복해야 한다. 정치는 정치답게, 교육은 교육답게 작동해야 한다. 그리고 각 도메인 간의 "통용된 신뢰상태"—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선의로 이해하고 조율할 수 있는 토대—를 재건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법학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넷째, 법학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법학자는 언어를 버릴 수 없다. 법 자체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학자의 책임은 무엇인가? 적절한 개념을 만들고, 부적절한 개념을 비판하고, 언어가 성숙할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그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 법학자는 언어의 정원사다.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고, 열매를 기다린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는다. 언어에는 자신의 시간이 있다.
임재성은 칼럼을 이렇게 끝맺었다. "이를 인식하는 것이 문제 해결 첫발이다." 필자도 같은 생각이다. '사회의 사법화'를 인식하는 것, 그것을 적절한 언어로 명명하는 것, 이것이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출발점일 뿐이다.
이제 이 개념이 성숙하고, 논쟁되고, 정련되고, 확산되는 과정이 시작된다. 이것은 언어의 시간성이다. 우리는 이 시간을 존중하되, 그 안에서 능동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기다리되 게으르지 않게, 조급하지 않되 나태하지 않게.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를 이렇게 끝맺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러나 법학자는 침묵할 수 없다. 법학자는 계속 말해야 한다. 언어의 한계를 의식하면서도,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회의 사법화'라는 언어가 주어졌다. 이제 이 언어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시간은 흐르고, 언어는 변하고, 법학은 발전한다. 우리는 이 흐름 속에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이, 변화의 첫걸음이다.
2026. 1. 31.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