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 칸트, 계몽철학

생각의 서고 60화

by 소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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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1. 탈진실 시대의 풍경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도 정확히 모르는 사건."



철학자 정제기는 그의 논문 「탈진실 시대의 비판철학의 요청 - 칸트의 계몽주의 정신과 희망철학을 중심으로」에서 세월호 참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 많은 증언과 기록, 조사와 보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진실인가"를 두고 싸운다. 어떤 이들은 "구조 시스템의 실패"라 말하고, 어떤 이들은 "선장 개인의 과실"이라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아예 "음모론"을 펼친다. 객관적 사실보다 각자의 정치적 신념과 감정이 먼저 작동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가 맞닥뜨린 '탈진실(Post-Truth)'의 풍경이다.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은 '탈진실'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사람들이 사실(fact)보다 감정과 신념에 더 많이 반응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접두사 'Post'는 시간 순서상 진실 '이후'가 아니라, 진실이 무의미할 정도로 '퇴색'되었다는 뜻이지, 진실이 사라진 건 아니다. 진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졌다는 것이다. 내 감정, 내 신념, 내가 지지하는 정치적 이념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이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다. 정치적 이념 갈등, 세대 간 혐오, 젠더 갈등. 우리는 끊임없이 "사실이 무엇인가"보다 "우리 편이 맞다"를 증명하려 애쓴다.



2. 칸트의 질문

그런데 250년 전, 한 철학자가 이미 이 문제를 예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임마누엘 칸트. 그가 1784년에 쓴 짧은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칸트는 왜 이 표어를 계몽의 정신이라 불렀을까? 그리고 이것이 탈진실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II. 본론, 우리는 왜 보고 싶은 것만 보는가

3. 반향실 효과와 필터버블

탈진실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정제기 교수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먼저,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이다. 페이스북이 2009년 '좋아요(Like)' 버튼을 도입한 이후, SNS 플랫폼들은 사용자가 선호하는 콘텐츠를 우선적으로 노출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요'를 누른 게시물과 유사한 콘텐츠가 계속 피드에 올라온다. 그렇게 반대의견은 점점 보이지 않는다.

이를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Effect)'라고 부른다. 내 목소리만 메아리치는 방 안에 갇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은 보수 성향의 뉴스만, 진보적인 사람은 진보 성향의 정보만 소비하게 된다. 그렇게 엘리 프레이저가 명명한 '필터 버블(Filter Bubble)'이 형성되는 것이다.



4. 인지편향의 근본성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인지심리학자 리 매킨타이어는 더 근본적인 원인을 지적한다. 바로 인지편향(cognitive bias)이다. 인간의 뇌는 태생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정보에 더 주목하고, 반대증거는 무시하거나 왜곡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 뇌의 진화적 산물이다.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말한다. "인지편향은 인간의 뇌에 근절 불가능하게 내재된 성향이다." 마치 칸트가 말한 '근본악(Radikale Böse)'처럼, 우리는 이 성향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을 자각하고 경계할 수 있을 뿐이다.



5. 한국 사회의 탈진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도 명확히 관찰된다. 당장 정치 뉴스 댓글창을 열어보라. 같은 사건을 두고 완전히 상반된 해석들이 충돌한다. 누군가에게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행위"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법 선동"으로 읽힌다. 객관적 사실관계를 확인하려는 노력보다, 자신의 진영을 옹호하려는 열정이 먼저다.


가짜 뉴스는 진실보다 빠르게 퍼진다. MIT 연구에 따르면, 트위터에서 거짓 정보는 진실보다 6배 빠르게 확산된다고 하는데, 이는 거짓 정보가 더 자극적이고, 우리의 감정을 더 강하게 건드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념을 강화해주는 정보를 원한다.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III. 칸트의 계몽철학


6. "감히 알려고 하라"

칸트는 1784년,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계몽이란 인간이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함(Unmündigkeit)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함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다. 이 미성숙함이 지성의 결여에서 기인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결단과 용기의 결여에서 기인하는 경우,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그러므로 감히 알려고 하라!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라! 이것이 계몽의 표어이다."



7. 용기의 부족,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미로운 점은, 칸트가 문제를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용기의 부족'으로 진단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성이 없는 게 아니다. 이성을 사용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8. 미성숙한 상태의 편안함

왜 용기가 필요한가? 칸트는 말한다. "미성숙한 상태로 있는 것은 매우 편안하기" 때문이다. 나를 대신해 생각해주는 책, 나를 대신해 양심을 가져주는 목사, 나를 대신해 식단을 짜주는 의사가 있다면, 나는 아무런 수고도 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 한 줄을 더할 수 있겠다. 나를 대신해 판단해주는 알고리즘, 나를 대신해 뉴스를 선별해주는 SNS 피드가 있다면, 나는 아무런 사고도 할 필요가 없다.

탈진실 시대는 어쩌면 '용기 없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용기, 내 신념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인정할 용기, 상대방의 주장을 진지하게 경청할 용기가 부족한 시대.




IV. 공적 이성과 사적 이성


9. 두가지 이성의 구분

그렇다면 어떻게 이성을 사용해야 하는가? 칸트는 흥미로운 구분을 제시한다. '사적 이성의 사용'과 '공적 이성의 사용'.


사적 이성의 사용이란, 자신이 맡은 공적 직무를 수행할 때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공무원은 법을 집행해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의견을 개진할 자리가 아니다.

반면 공적 이성의 사용이란, 학자로서, 시민으로서 공론장에서 자유롭게 비판할 권리다. 군인도 군복을 벗고서는 군사 정책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공무원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법 제도의 개선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구분은 얼핏 모순적으로 보인다. 직무 수행 중에는 복종하되, 공론장에서는 비판하라? 그러나 칸트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계몽된 사회의 조건이다. 사회시스템이 원활히 작동하려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동시에 그 시스템 자체를 개선하려면 자유로운 비판이 보장되어야 한다.



10. 복종의 역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사적 이성의 영역에서 '복종의무'는 개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표면적으로는 부담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내 생각과 다른 명령도 따라야 하니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복종의무는 매우 편안한 것이기도 하다. 왜? 사색과 판단의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상관이 시켰으니까", "법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업무 지시였으니까"


이것은 완벽한 면책사유가 된다. 칸트가 말한 "미성숙한 상태의 편안함"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이미 판단했으니까.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이렇게 변론했다.


"저는 명령에 복종했을 뿐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 불렀다. 악마적인 괴물이 아니라, 생각하기를 포기한 평범한 사람이 끔찍한 악을 저지를 수 있다.



11. 명령불복종의 시대

최근 한국에서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입법 논의가 있었다. 공무원의 '명령불복종 의무'다. 상관의 명령이라도 그것이 명백히 위법하거나 부당하다면 거부해야 할 의무를 지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종의 편안함을 깨뜨린다. 이제 공무원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이 명령이 정당한가? 법적으로 문제는 없는가? 나는 이것을 따라야 하는가?"


칸트가 요구한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가 법적 의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명령이 "거부해야 할 악명령"인지 판단할 구체적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는 이에 대해 유명한 공식을 제시했다. 법이 정의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모순될 때, 혹은 평등원칙을 의도적으로 부인할 때, 그 법은 효력을 잃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이 기준을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상관의 명령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당한가? 어디까지가 업무상 재량이고, 어디부터가 위법인가? 이 판단의 부담이 이제 개인에게 주어진다.



12. 이성 사용의 고통

결국 칸트가 요구하는 계몽은 편안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스럽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확실성과 마주한다는 것이다. 명령에 복종하면 책임도 면제되지만, 스스로 판단하면 그 결과도 스스로 져야 한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면 편하지만, 비판적으로 사고하면 고립될 수 있다. 내 신념을 강화해주는 정보만 받아들이면 심리적으로 안정적이지만,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면 혼란스럽다.

이것이 칸트가 "용기"를 말한 이유다. 계몽은 지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용기의 문제다.



13. 현대적 적용

이 구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직장에서 상사의 부당한 지시를 받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동자가 산업안전 위반을 명령받았을 때 거부할 수 있는가? 의사가 불필요한 의료행위를 강요받았을 때 양심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가?


칸트의 구분에 따르면, 직무 수행 중에는 조직의 원칙을 따라야 하지만(사적 이성), 그 조직의 정책이나 관행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공론장에서 비판해야 한다(공적 이성). 그리고 명령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당하다면,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


문제는 여전히 그 경계선이다. 무엇이 정당한 업무 지시이고, 무엇이 거부해야 할 악명령인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이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 그것이 칸트가 말한 계몽이다.



14. 사고방식의 참된 개혁

칸트가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다. "사고방식의 참된 개혁(wahre Reform der Denkungsart)"이다.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


정제기 교수는 이것이 탈진실 문제의 핵심 처방이라고 본다. 가짜뉴스를 일일이 팩트체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람들이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의 인지편향을 자각하고,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칸트는 희망을 말한다.




V. 근본악과 인지편향

15. 뇌에 새겨진 편향

그렇다면 왜 이토록 어려운가? 왜 우리는 "감히 알려고" 하지 못하는가?


리 매킨타이어는 냉정한 진단을 내린다. "인지 편향은 인간의 뇌에 근절 불가능하게 내재된 성향이다."

인지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진화 과정에서 '빠른 판단'에 최적화되었다. 선사시대 초원에서 풀숲이 흔들릴 때, 그것이 바람인지 사자인지 천천히 분석할 여유는 없었다. 일단 도망치고 보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


그 결과, 우리의 뇌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취약하다. 내 믿음과 일치하는 정보는 쉽게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왜곡한다. 집단사고(groupthink)도 마찬가지다. 내가 속한 집단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사회적으로 안전하다.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도 있다. 쉽게 떠오르는 정보를 더 중요하다고 착각한다.


이것은 도덕적 결함이 아니다. 뇌의 작동 방식이다. 나쁜 사람만 인지 편향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심지어 이것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조차 자신의 편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16. 칸트의 근본악

여기서 정제기 교수는 놀라운 통찰을 제시한다. 인지 편향의 이 '근절 불가능성'이 칸트의 근본악(Radikale Böse)개념과 닮아있다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근본악이란 인간 본성에 뿌리박혀 있는 악의 성향이다. 이것은 세 단계로 나타난다.


첫째, 허약성(Gebrechlichkeit).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너무 나약하다. "다이어트를 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달콤한 유혹 앞에서 무너지는 것처럼.

둘째, 불순성(Unlauterkeit). 도덕 법칙을 따르기는 하지만, 순수하게 도덕 법칙 때문이 아니라 다른 동기(명예, 이익 등)가 섞여 있다.

셋째, 악의성(Bösartigkeit). 도덕 법칙보다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는 성향.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악을 선택한다.


중요한 것은, 칸트가 이 근본악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고 본다는 점이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인 한, 이 성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원죄와 비슷하지만,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학적 현실이다.



17. 유비의 설득력

인지 편향과 근본악의 유비는 놀랍도록 정확하다.


우선, 둘 다 근절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닮았다. 인지 편향은 뇌의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되고, 근본악은 인간 본성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또한 둘 다 보편적이다. 인지 편향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고, 근본악 역시 모든 인간이 공유한다. 착한 사람만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 많다고, 도덕적이라고 면제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둘 다 자각은 가능하다. 인지 편향을 알고 있어도 빠지지만, 적어도 내가 빠졌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근본악도 마찬가지다. 도덕 법칙을 알면서도 위반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안다. 이 자각이야말로 변화의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절망적인 결론인가? 탈진실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가? 근본악을 제거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냥 포기해야 하는가?



18. 극복 불가능성의 인정

정직해지자. 탈진실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인지 편향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고, SNS 알고리즘은 계속 진화하고, 정치적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것이다.


칸트도 이것을 알았다. 근본악은 근절할 수 없다. 그러나 칸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심성의 혁명(Revolution der Gesinnung)"과 "행위의 점진적 개혁(allmähliche Reform des Verhaltens)"을 말한다.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어도, 끊임없이 노력할 수는 있다. 한 번의 결정적 변화는 아니어도, 조금씩 나아갈 수는 있다.


이것은 순진한 낙관론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비극적 낙관주의다. 완벽한 승리는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멈출 수는 없다.





VI. 그럼에도 희망

19.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만 하기 때문에

칸트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다.

"당위는 가능을 함축한다(Sollen impliziert Können)."


이것은 언뜻 이상하게 들린다. 보통 우리는 반대로 생각한다. '할 수 있으니까 해야 한다.' 그런데 칸트는 순서를 뒤집는다.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깊은 실존적 통찰이다.

근본악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지 편향에서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탈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만약 '할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다.


그러나 칸트는 다르게 묻는다. '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가?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하는가? 인지 편향과 싸워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할 수 있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조금씩이라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20. 심성의 혁명과 행위의 점진적 개혁

칸트가 제시하는 길은 이중적이다.


우선 심성의 혁명이란,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말한다.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독단에서 벗어나,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함으로. '내 신념을 확증하는 정보만 찾기'에서 벗어나,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하기'로. 이것은 순간적인 결단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행위의 점진적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한 번 결심했다고 끝이 아니다. 매일 조금씩,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탈진실 시대를 극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창한 사회 개혁이 아니라, 일상적인 실천에서 시작된다.


내가 공유하려는 이 뉴스가 정말 사실인가? 한 번 더 확인해본다. 상대방의 주장이 터무니없어 보이는가? 그래도 끝까지 들어본다. 내 진영의 입장이 당연히 옳은 것 같은가? 반대편의 논리도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작은 실천들이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칸트가 말한 '점진적 개혁'이다.



21. 희망이 순진하지 않은 이유

어떤 사람들은 이런 태도를 '순진하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인지 편향은 극복할 수 없다면서요? 탈진실은 해결 불가능하다면서요? 그런데 희망을 말하는 건 모순 아닌가요?"


그러나 칸트의 희망은 순진한 낙관론이 아니다.

순진한 낙관론자는 말한다. "우리가 노력하면 언젠가 탈진실 문제가 해결될 거야!" 이것은 근거 없는 믿음이다.

냉소주의자는 말한다. "어차피 불가능한데 뭐하러 애쓰나? 그냥 포기하자." 이것은 책임 회피다.


칸트의 희망은 다르다.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다. 조금씩이라도."


이것은 한계를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승리가 보장되지 않아도 싸우는 것.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어도 그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이렇게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Yes라고 말하기." 칸트의 희망도 이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에 Yes라고 말하기."



22.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진실

칸트 철학에는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e)'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것은 실제로 도달할 수 없지만, 우리의 사유와 행위를 인도하는 이상이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우리는 별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별을 보며 방향을 잡을 수 있다.


탈진실 시대에 '진실'은 어쩌면 이런 규제적 이념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완벽하게 객관적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지 편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조금 더 정직해질 수 있다. 조금 더 겸손해질 수 있다.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듣고, 조금 더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면 충분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계속 노력하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23.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제기 교수가 제안하는 것은 결국 '사고방식의 참된 개혁'이다. 제도를 바꾸고, 법을 만들고, 알고리즘을 규제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 각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느냐다.


내 신념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기.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기.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하기. 쉽게 분노하지 않기. 성급하게 공유하지 않기.


이것들은 거창하지 않다. 영웅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이것이 칸트가 요구한 '용기'다. 편안한 미성숙함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는 용기.


탈진실은 우리 시대의 숙명이 아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선택한다. 편안한 확신과 불편한 진실 사이에서.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정보와 스스로 탐구하는 지식 사이에서.

그리고 그 선택이 모여, 조금씩 세상을 바꾼다.




VII. 결론

24. 250년의 시간을 넘어

1784년, 임마누엘 칸트는 프로이센의 작은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짧은 에세이를 썼다. 당시에는 신문도 제대로 없었고, SNS는 물론 인터넷도 없었다. 알고리즘도, 필터 버블도, 가짜 뉴스도 없었다.

그러나 250년이 지난 지금, 칸트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감히 알려고 하라.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라."


탈진실 시대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알고리즘을 규제한다고, 팩트체크 시스템을 강화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는 용기의 문제다. 편안한 확신을 버리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용기. 내 신념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인정할 용기.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을 용기.


칸트가 보기에, 계몽은 지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였다. 우리에게 이성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을 사용할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



25. 법학도의 고백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완벽하게 이성적이지 못하다. 나도 인지 편향에 빠지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 내 신념과 맞지 않는 주장을 읽을 때면, 끝까지 읽기도 전에 반박 논리부터 떠올린다.


법학을 공부하면서 자주 느낀다. 법은 이성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완벽하게 이성적이지 못하다. 판사도, 변호사도, 학자도 자신의 편견과 감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더욱 칸트의 가르침이 중요하다.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 노력하는 것. 심성의 혁명과 행위의 점진적 개혁.


나는 법률가가 되려 한다. 그리고 법률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어쩌면 경청일지도 모른다. 의뢰인의 고통을 온전히 듣는 것. 상대방의 주장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것.

이것이 탈진실 시대를 사는 법률가의 책무가 아닐까.



26. 감히 희망하기

정제기 교수의 논문 제목은 『탈진실 시대의 비판철학의 요청』이다. '요청'이라는 단어가 인상적이다. 명령도 아니고, 권유도 아닌, 요청.


칸트는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요청한다. 용기를 내라고. 스스로 생각하라고. 편안한 미성숙함에서 벗어나라고.


그리고 희망을 말한다. 완벽한 승리는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조금씩이라도.


이것은 순진한 낙관론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비극적 낙관주의다.


탈진실은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지 편향도 근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 조금 더 정직해지고, 조금 더 겸손해지고,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250년 전, 한 철학자가 던진 질문이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감히 알려고 하는가?"


이 질문에 매일, 매 순간 답하는 것. 그것이 탈진실 시대를 사는 우리의 과제다.




2026. 2. 3.



참고문헌

1차 문헌 (칸트 원전)


Kant, Immanuel.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1784).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Kant, Immanuel. 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1787). 『순수이성비판』

Kant, Immanuel.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1793).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주요 논문

정제기, 「탈진실 시대의 비판철학의 요청 - 칸트의 계몽주의 정신과 희망철학을 중심으로」, 『철학논총』 제117집, 새한철학회, 2024.



2차 문헌


McIntyre, Lee. Post-Truth. MIT Press, 2018.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트루스』, 김재경 역, 두리반, 2019)

Kakutani, Michiko. The Death of Truth: Notes on Falsehood in the Age of Trump. Tim Duggan Books, 2018. (미치코 가쿠타니,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Ball, James. Post-Truth: How Bullshit Conquered the World. Biteback Publishing, 2017. (제임스 볼,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

Pariser, Eli. The Filter Bubble: What the Internet Is Hiding from You. Penguin Press, 2011. (엘리 프레이저, 『생각 조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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