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57화
1.
2026년 1월 어느 겨울날, 나는 인터넷에서 한 편의 칼럼을 발견했다. 2011년 가을, 아버지 당신께서 쓰신 글이었다. 브레이비크의 테러와 동일본 대지진, 그리고 김정일 체제의 종말을 관통하며 '절제와 조화'를 이야기하는 글. 15년이라는 시간의 간극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
그 글의 마지막 대목은 이러했다.
"나뭇가지로 불을 지필 때 긴 나뭇가지를 빼내어 불쏘시개로 사용하지만 마지막에는 그 불쏘시개마저 아궁이 속으로 던져야 하는 것처럼... 빨래할 때 비누를 쓰지만 결국은 비누조차도 헹구어내야 하고 물조차도 말려야 깨끗한 빨래가 되는 것처럼... 진리는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법학을 연구하는 나에게, 이 비유는 낯설게 아팠다. 왜냐하면 법학에서는 불쏘시개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법학에서 언어와 개념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는 그 아픔을 응시하는 기록이다.
3.
2011년 7월 22일. 32세의 백인 남성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는 오슬로 정부청사에서 폭탄테러를 일으킨 후, 우퇴위아 섬의 노동당 청년캠프에서 1시간여 동안 총을 난사했다. 77명이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노르웨이 최악의 참사였다.
4.
아버지의 칼럼이 주목한 것은 범죄 그 자체가 아니라 노르웨이 사회의 반응이었다.
"노르웨이는 사형제도가 없지만 브레이비크를 죽여야 한다는 여론도 없다. 더 놀라운 것은 이번 총기난사 사건을 접한 노르웨이 시민의 반응이다. '만약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증오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랑은 얼마나 클 수 있을지 상상해 보세요!'"
당시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는 "우리는 증오에 사랑으로 답할 것"이라며 "우리의 응답은 더 많은 민주주의"라고 선언했다.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나아간 미국과 달리, 노르웨이는 애도와 연대로 대응했다. 브레이비크가 우파 정당인 진보당의 당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진보당에 책임을 돌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5.
이것은 응보적 정의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형벌의 목적이 복수가 아니라 사회의 치유와 재건에 있음을, 노르웨이는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마사 누스바움이 말한 '감정의 인지이론'으로 보면, 노르웨이인들은 분노를 사랑으로 전환하는 집단적 감정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법은 단지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어떤 공동체가 되고자 하는지를 선언하는 행위다.
6.
아버지의 칼럼은 이렇게 이어진다.
"식위민천(食爲民天: 밥은 백성의 하늘)이란 말이 있듯이 먹고 사는 일이 신랑을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일이니 박정희가 뜨고, 김정일이 지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7.
'식위민천'은 관자(管子)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민생, 특히 경제적 안정이 정치적 정당성의 기반이라는 의미다. 여기엔 심각한 정치철학적 긴장이 있다. 절차적 정의(민주주의)와 실질적 결과(경제성장) 중 무엇이 우선하는가?
8.
한국 현대사는 이 질문의 살아있는 실험장이었다. 1961년 쿠데타의 정당화 논리가 "못 먹고 못사는 나라를 발전시킨다"였고, 이것이 실제로 일정 부분 달성되었기에 권위주의 체제가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다. 민주주의라는 형식과 경제발전이라는 실질 사이의 긴장. 우리는 여전히 이 긴장 속에 살고 있다.
아버지는 "김정일에 유감인 것은 어떤 다른 이유보다도 북한 동포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이는 이념이나 체제가 아니라 구체적 삶의 질을 정권 정당성의 척도로 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과연 '잘 먹고 잘 산다'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오래된 경구가 떠오른다.
9.
아버지 칼럼의 핵심은 마지막 비유에 있다. 불을 지피기 위해 불쏘시개가 필요하지만, 결국 그 불쏘시개도 아궁이에 던져야 한다. 빨래를 위해 비누가 필요하지만, 결국 비누도 헹궈내야 한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조차 버려야 한다는 것.
이것은 매우 선불교적이고 도가적인 사유다. 장자의 '득어망전(得魚忘筌)' -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는다는 말과 같다. 언어와 개념은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달 그 자체가 아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것이다.
10.
그러나 법학도로써 나는 여기서 멈칫한다. 법학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법에서 손가락(문언)이 곧 달(법 자체)이기 때문이다. 형법 제250조 "사람을 살해한 자"라는 문장, 그 언어 자체가 살인죄의 내용이다. 우리는 그 문언을 '넘어서' 살인죄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문언이 곧 본질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개념을 도구로 사용하다가 그것을 버릴 수 있다. 더 나은 개념으로 대체하거나, 아예 개념 없이 직관으로 도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법학자는 법전의 활자를 버릴 수 없다. 그 활자가 곧 우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11.
내가 최근 쓴 '활자의 감옥과 자유: 김신 대법관의 침묵하는 문언주의'라는 글에서, 나는 두 명의 대법관을 비교했다. 김신 대법관과 조희대 대법관. 두 사람 모두 문언주의자였지만, 그 문언주의의 성격은 달랐다.
김신 대법관에게 문언주의는 '닻'이었다. 그는 법률의 문언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다. 설령 그 결과가 부당해 보일지라도, 법이 그렇게 써 있다면 그대로 따랐다. 그는 휴일근로수당 사건에서 노동자에게 유리한 해석을 했고, 변호사 보수 감액 사건에서는 시장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가 진보적이어서, 혹은 보수적이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텍스트가 그곳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조희대 대법관에게 문언주의는 '키'였다. 그는 문언을 존중하되, 그 문언을 목적론적으로 조정했다. 항공기 회항 사건에서 그는 지상의 경로도 '항로'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법의 목적은 항공기의 안전 운항이므로, 문언의 문자적 의미보다 그 목적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2.
나는 이렇게 썼다. "김신 대법관의 법학은 기하학이다. 점과 선이 만나 도형을 이루듯, 문언과 문언이 만나 결론을 도출한다. 그 과정에 해석자의 감정이나 외부의 풍경이 개입할 틈은 없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 감옥 안에서 비로소 자유로웠던 한 법관의 영혼을 기리며"
활자의 감옥.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다. 법학자는 법전의 활자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감옥 안에서만 법관은 자유로울 수 있다.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여론의 호오로부터, 자신의 편견으로부터조차 자유로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가 아니라.
13.
그렇다면 법학만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언어와 개념은 모든 문자 기반 학문의 도구다. 철학도, 역사학도, 문학도 언어를 사용한다. 왜 유독 법학에서만 언어가 감옥이 되는가?
14.
첫번째는 규범성과 강제성의 결합 측면에서다. 철학은 '있어야 할 것'(Sollen)을 논하지만, 그것이 물리적 강제력과 직결되지 않는다. 칸트의 도덕철학이 아무리 설득력 있어도 누군가를 감옥에 보낼 수는 없다. 하지만 법은 다르다. 법적 판단은 국가의 독점적 폭력과 결합되어 있다. 형법 제250조의 해석은 누군가의 자유를 박탈한다. 이것이 법해석의 무게다.
두번째는 Non liquet 금지, 즉 결단의 불가피성 측면에서다. 철학자는 판단을 유보할 수 있다. '아직 충분한 근거가 없다'며 판단 중지(epoche)를 선언할 수 있다. 하지만 법관은 그럴 수 없다. 비록 법률이 불명확하고, 선례가 모순되며, 법리가 대립한다 해도 판결을 내려야 한다. 칼 슈미트가 말한 '예외상태에서의 결단'이 법의 일상이다.
세번째는 언어의 이중적 지위(도구이면서 대상)에서 비롯한다. 철학에서 언어는 사유를 표현하는 도구다. 하지만 법에서 언어는 도구일 뿐 아니라 법 그 자체다. 법률 텍스트가 곧 법이다. 형법 제250조의 "사람을 살해한 자"라는 문장이 바로 살인죄의 내용이다. 우리는 그 문언을 넘어서 살인죄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문언이 곧 본질이기 때문이다.
네번째는 과거지향성과 권위 의존 측면에서 그렇다. 법해석은 자유로운 철학적 사변이 아니다. 입법자의 의도, 선례, 기존 법교리 등 '이미 주어진 것'에 구속된다. 목적론적 해석을 하더라도, 그 목적은 법률 자체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이것이 법해석의 보수성이다. 가다머가 말한 '선이해'(Vorverständnis)가 법해석의 출발점이다. 법관은 백지상태로 법률 텍스트를 마주하지 않는다.
다섯째는 실천적 귀결의 직접성에서다. 철학적 오류는 사상사의 한 페이지가 되지만, 법적 오류는 구체적 인간의 자유, 재산, 생명을 박탈한다. 이것이 법학이 가진 윤리적 무게다.
15.
아버지는 "진리는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진리는 흔적이 없지만 우리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으니 구름만 걷히면 바로 태양이다"라고 썼다. 아름다운 문장이다. 그러나 법에서는 진리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법전의 활자로, 판결문의 문장으로,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형태로.
16.
그렇다면 법학자는 불행한 존재인가? 불쏘시개를 버릴 수 없고, 비누를 헹궈낼 수 없으며, 활자의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은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김신 대법관의 삶이 보여주는 것은, 감옥 안에도 자유가 있다는 역설이다. 그는 문언에 구속됨으로써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여론의 호오로부터 자유로웠고, 자신의 편견으로부터조차 자유로웠다.
이것은 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적극적 자유다. 문언이라는 제약 안에서, 법관은 비로소 정의를 말할 수 있다. "법이 이렇게 말한다"고 할 때, 그는 자신의 주관을 넘어선 객관적 규범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17.
역설적으로, 문언의 감옥은 시민들에게 예측가능성이라는 자유를 선물한다. "법이 이렇게 써 있으므로 나는 이렇게 행동해도 된다"는 확신. 법관의 자의적 해석이 차단될 때 비로소 법치가 가능하다. 김신 대법관이 약자를 사랑했지만 법이 약자를 보호하지 않을 때 법을 비틀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침묵으로 웅변했다. "이 법이 잘못되었다면, 국회가 고쳐라. 나는 판사이지 입법자가 아니다."
18.
2011년 가을, 아버지는 브레이비크의 테러를 보며 '사랑'을 이야기했다. 동일본 대지진의 어머니를 보며 '절제'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쏘시개와 비누를 버리라고, 흔적 없는 진리로 나아가라고 했다.
2026년 겨울, 아들인 나는 그 글을 읽으며 법학의 숙명을 생각한다. 우리는 불쏘시개를 버릴 수 없다. 비누를 헹궈낼 수 없다. 활자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법전의 문언이 곧 우리의 세계이고, 그 세계를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법을 잃는다.
그러나 이것이 비극만은 아니다. 노르웨이가 보여준 것처럼, 법은 단지 처벌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공동체가 되고자 하는지를 선언하는 행위다. 김신 대법관이 보여준 것처럼, 문언의 구속 안에서도 정의를 향한 길은 열려 있다. 식위민천의 역설이 말해주듯이, 절차와 실질의 긴장 속에서도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아버지가 말한 진리는 흔적이 없지만, 법의 진리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법전의 활자로, 판결문의 문장으로,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형태로. 그 흔적들이 쌓여 법치가 되고, 법치가 쌓여 자유가 된다.
19.
나는 창밖을 본다. 은행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가 보인다. 그 가지는 법전의 활자들처럼 검고 뚜렷하다. 겨울이 왔다. 문언의 겨울이, 혹은 해석의 봄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쏘시개를 버릴 수 없는 자들, 비누를 헹궈낼 수 없는 자들, 활자의 감옥에 갇힌 자들. 우리 법학자들은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감옥 안에서, 자유를 꿈꾼다. 구속된 자유, 자유로운 구속. 이것이 법학의 역설이자, 법학의 존엄이다.
2026. 1. 27.
이 글은 2026년 1월 27일, 아버지의 2011년 칼럼을 읽은 후 작성되었다. 대화는 브레이비크 사건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식위민천의 의미, 법학에서 언어의 특수한 지위, 그리고 내가 쓴 '활자의 감옥' 글과의 연결로 이어졌다.
15년의 시간 간극을 넘어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나의 법철학적 고민과 연결하는 과정은 묘한 경험이었다. 2011년의 가을과 2026년의 겨울, 브레이비크의 테러와 김신 대법관의 문언주의, 불쏘시개 비유와 활자의 감옥.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대화로 엮어졌다.
법학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언어와 진리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답은 여전히 멀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는 과정 자체가, 아버지의 칼럼을 읽고 대화하는 이 시간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답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