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56화
본고는 마사 누스바움의 인지주의 감정이론을 법철학적으로 적용하려는 시도가 한국적 맥락에서 직면하는 근본적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누스바움은 응보적 분노를 '복수의 오류(magical thinking)'로 규정하고 이행 분노(transition-anger)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이는 제도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사법부 신뢰도 OECD 최하위, 정부 신뢰 급락이라는 구조적 조건 속에서, 누스바움이 제시한 대안들, 즉 공식 사과, 진상 규명, 재발 방지 제도 구축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근본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본고는 Jeffrie Murphy의 '정당한 응보(just retribution)' 이론을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한다. Murphy는 응보 감정을 자기 존중(self-respect)의 표현으로 재평가하며, 비례성(proportionality),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 인간 존엄성(human dignity)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할 때 응보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따라 본고는 이것을 한국적 맥락에 적용하여, 양형의 투명성 제고, 피해자 참가 제도 실질화, 응보의 비례성 원칙 명확화라는 최소주의적 제안을 도출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법감정의 제도화는 신뢰 회복이라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공정한 응보라는 최소선을 지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는 이론적으로 불완전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작동 가능한 유일한 경로일 수 있다.
주제어: 법감정, 응보적 정의, 마사 누스바움, Jeffrie Murphy, 사적제재, 절차적 정의
근대 법학은 이성과 감정의 엄격한 이분법 위에 구축되었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과 칸트의 실천이성 개념은 법적 추론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어 신경과학의 비약적 발전은 이성과 감정이 분리불가능한 인지 과정의 양면임을 실증하였고, 사회학적으로는 사법시스템에 대한 국민 신뢰의 붕괴와 사적 제재의 창궐이라는 위기가 도래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최근 마사 누스바움의 인지주의 감정이론을 법철학적 프레임워크로 채택하여, 법감정을 사실성 판단과 타당성 판단이라는 이원적 필터링 체계로 검증하고 제도화할 것을 제안한 논의가 등장하였다. 이는 감정을 단순한 비이성적 충동이 아닌 고도의 인지적 판단으로 재정의하고, 이를 법적 추론에 통합함으로써 대중의 법감정과 실정법 사이의 괴리를 해소하고자 하는 야심찬 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세 가지 근본적 난점에 직면한다.
첫째, 감정 자체가 권력에 의해 구성될 가능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이다. 한병철의 심리정치(Psychopolitik) 논의가 시사하듯,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감정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와 통치의 자원으로 작동한다.
둘째, 응보적 분노를 복수의 오류로 규정하는 것이 인간학적으로 타당한가의 문제이다. 손정우 사건에서 드러나듯, 대중의 응보 욕구는 제거 불가능한 인간 조건의 일부로 보인다.
셋째, 제도에 대한 신뢰가 붕괴된 상황에서 누스바움의 대안, 즉 공식 사과, 진상 규명, 재발 방지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본고는 이러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통해 이론을 정교화하고, 궁극적으로 Jeffrie Murphy의 정당한 응보 이론을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는 누스바움의 이상주의를 포기하고 Murphy의 현실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작동 가능한 유일한 경로일 수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본고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먼저 제II장에서는 누스바움의 인지주의 감정이론과 선행 논의의 핵심 주장을 요약한다. 제III장에서는 세 가지 비판적 문제제기를 심화한다. 즉, 감정의 권력 구성성과 입증 불가능성, 응보 감정의 재평가 필요성, 한국적 맥락에서의 작동 불가능성을 차례로 검토한다. 제IV장에서는 Murphy의 정당한 응보 이론을 상술하고, 제V장에서는 이를 한국적 맥락에 적용한 구체적 제안을 도출한다. 마지막으로 제VI장에서는 법학자의 역할과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며 결론을 맺는다.
피니어스 게이지(Phineas Gage) 사례는 감정 중추 손상이 합리적 의사결정 능력을 붕괴시킴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1848년 미국 버몬트주에서 철도 공사 감독관으로 일하던 25세의 청년 피니어스 게이지는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길이 1.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쇠막대가 그의 왼쪽 뺨을 뚫고 들어가 전두엽을 관통하여 정수리로 빠져나가는 끔찍한 부상을 입었다. 놀랍게도 그는 사고 직후 의식을 회복했고 병원까지 스스로 걸어갈 수 있었으며, 언어 능력이나 운동 능력, 기억력 등 기본적인 인지 기능에는 거의 손상이 없었다.
그러나 사고 이후 게이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사고 전 그는 빈틈없고 똑똑한 사업가이자 책임감 강한 리더로 평가받았으나, 전두엽 손상 후에는 변덕스럽고 불경하며 짐승 같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는 계획을 세우지만 실행하지 못했고 사회적 예절을 무시했으며, 결국 직장을 잃고 서커스단을 전전하거나 마부로 일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현대 신경과학은 게이지의 사례를 재분석하여, 그의 손상 부위가 감정과 사회적 행동을 조절하는 복내측 전두엽 피질(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과 백질(White Matter) 연결망이었음을 밝혀냈다.
게이지의 사례는 감정이 제거된 상태에서의 이성이란 무력하기 짝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는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었고 도덕적 규칙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 규칙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선택을 내리는 과정에서 감정적 가치 평가가 작동하지 않자, 그는 끝없는 우유부단함에 빠지거나 충동적인 결정만을 내리게 되었다. 이는 법관이 법조문을 달달 외우고 논리학에 능통하다 하더라도, 사건의 맥락에 대한 감정적 통찰 능력이 결여된다면 결코 정의로운 판결을 내릴 수 없음을 시사하는 생물학적 증거로 작동한다.
누스바움은 그녀의 저서 『사유의 격변(Upheavals of Thought)』과 『분노와 용서(Anger and Forgiveness)』를 통해 감정을 비이성적 충동으로 격하시키는 전통적 견해를 반박하고, 감정을 고도의 인지적 판단으로 재정의한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 스토아학파의 네오-스토아주의(Neo-Stoicism)를 계승하여, 감정이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이자 그 대상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평가하는 가치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모든 감정은 네 가지 구조적 특징을 갖는다.
첫째, 대상성(Object)이다. 감정은 막연한 불안(Anxiety)과 달리 항상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다. 판사의 분노는 피고인의 잔혹한 행위라는 대상을 향하며, 대중의 공포는 바이러스나 범죄자를 향한다. 대상이 명확하므로 그 대상에 대한 법적 평가와 감정적 반응을 대조할 수 있다.
둘째, 지향성(Intentionality)이다. 감정은 대상을 객관적 실체로서가 아니라 감정 주체가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대로 인식한다. 즉, 관점이 개입된다. 똑같은 살인 사건을 보고도 피해자 유족은 파괴된 삶을 보기에 분노하지만, 피고인의 노모는 불쌍한 아들을 보기에 슬퍼한다. 법은 이러한 다양한 지향성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셋째, 믿음(Belief)이다. 감정은 대상에 대한 특정한 명제적 믿음(Propositional Belief)을 전제로 한다. 저 사람이 나를 모욕했다는 믿음이 있어야 분노가 생기고, 저 개가 나를 물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두려움이 생긴다. 이 믿음은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감정은 검증 가능한 영역으로 들어온다.
넷째, 가치(Value)이다. 감정은 대상이 주체의 목표나 안녕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평가를 내포한다. 우리는 길가의 돌멩이가 부서졌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감정의 격동은 곧 가치의 확인이다.
선행 논의는 이러한 누스바움의 이론을 바탕으로 법감정을 법적 추론에 수용하기 위한 검증 체계로서 사실성 판단과 타당성 판단의 이원적 필터링을 제안했다. 사실성 판단은 감정의 기반이 되는 믿음이 객관적으로 참인가를 묻는다. 예컨대 저 사람이 나를 모욕했다는 믿음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에 기반한 분노는 법적으로 수용될 수 없다. 타당성 판단은 그 감정 반응이 사회적으로 적절한가를 묻는다. 믿음이 참이더라도, 그에 대한 반응이 과도하다면 역시 기각된다.
누스바움은 분노를 두 가지 유형으로 엄격히 구분한다.
먼저 응보적 분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의 원칙에 따라 가해자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피해를 회복하려는 욕구이다. 누스바움은 이를 복수의 오류라고 비판하면서, 이것이 가해자의 고통, 즉 down-ranking이 피해자의 회복, 즉 up-ranking으로 이어진다는 마법적 사고(Magical Thinking)에 기반한다는 점을 고발한다.
가해자를 고문하거나 죽인다고 해서 죽은 자녀가 살아오거나 훼손된 존엄성이 즉시 복구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분노는 과거지향적(Past-oriented)이며, 끝없는 보복의 순환을 낳을 뿐 법적 정의인 사회적 회복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녀의 진단이다.
이에 대해 누스바움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개념은 이행 분노(Transition-Anger)이다. 이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터무니없다, 그러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특징은 감정의 초점이 가해자 개인의 인격적 파멸이 아니라 부당한 행위(Act)와 상황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시간적 지향성이 과거가 아닌 미래의 예방과 사회적 개선을 향한다.
누스바움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을 이행 분노의 전형으로 꼽는다. 킹 목사는 흑인이 겪는 부당한 차별에 대해 명확히 분노를 표출했으나, 그는 결코 백인들에 대한 보복이나 폭력을 선동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분노의 에너지를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대우받는 미래를 건설하는 동력으로 전환시켰다.
법적 차원에서 시민들이 흉악 범죄에 분노할 때, 그것이 범죄자를 찢어 죽여라는 야만적 외침이 아니라 시스템을 개선하여 안전한 사회를 만들라는 요구로 승화될 때, 그 분노는 가장 강력한 입법과 사법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 누스바움의 주장이다.
선행 논의는 디지털 교도소, 배드 파더스, 손정우 사건 등을 분석하여 사적 제재가 사법 시스템의 법감정 수용 실패의 결과임을 밝혔다.
디지털 교도소는 성범죄자, 살인자, 아동학대범 등의 신상정보를 임의로 공개하여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웹사이트였다. 운영자와 지지자들은 대한민국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을 믿을 수 없다, 우리가 직접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주장하였는바, 이는 사법 시스템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응보적 분노에서 기인했다.
배드 파더스 사례는 양육비 미지급 부모의 신상을 공개한 것으로, 디지털 교도소와 다소 결이 다르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배드 파더스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단순한 망신 주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는 타당한 동정심과 국가가 이를 방치했다는 이행 분노에 기반했다. 이 감정의 압력은 결국 국회를 움직여 양육비 이행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을 이끌어냈고, 이제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양육비 미지급자 명단을 공개하고 출국 금지 조치를 취한다.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손정우 사건이다. 손정우는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로, 한국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을 마쳤다. 이후 미국 법무부는 그를 자금세탁 혐의 등으로 기소하여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고, 미국으로 갈 경우 수십 년의 징역형이 예상되었다. 일반 대중은 "한국의 처벌은 너무 가볍다, 미국으로 보내 정의를 실현하라", 즉 사법 주권을 포기하더라도 실질적인 정의를 원한다는 강력한 의사 표시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주권 국가로서 형벌 권한을 행사해야 하며, 국내에서 추가 수사를 통해 아동 성착취 범죄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며 인도를 거절했다.
이러한 거부결정에 대해 일반 대중은 법원의 논리가 피고인을 보호하기 위한 궤변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사법부 내의 온정주의와 성범죄에 대한 낮은 감수성이 작동한다고 믿었다. 대중이 원한 것은 세련된 교화나 사법 주권의 수호가 아니라 죄질에 상응하는 고통, 즉 응분의 몫(Desert)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법학이 애써 무시해온 응보적 정의의 욕구가 여전히 대중의 마음속에 강력한 규범적 힘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병철의 심리정치 개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감정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와 최적화의 자원이다. 만약 감정 자체가 이미 담론적 헤게모니와 미디어 프레이밍에 의해 구성된다면, 사실성 판단과 타당성 판단의 기준 역시 중립적일 수 없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코로나19 사례를 통해 이를 구체화할 수 있다. 방역 수칙 위반자에 대한 분노는 선행 논의에서 정당한 이행 분노로 해석되었으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개인을 희생양 삼아 구조적 문제, 즉 방역 정책의 일관성 부재나 소상공인 지원 체계 미비를 은폐하는 통치 전략으로 작동했을 수 있다. 즉, 대중의 분노가 바이러스나 무책임한 개인으로 향하는 동안, 정책 실패의 책임은 은폐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두 가지 심각한 난점에 직면한다.
첫째, 법적 입증 불가능성의 문제이다. 이 감정이 권력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주장을 법정에서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구조적 권력은 대부분 의도적 음모가 아니라 담론의 헤게모니적 배치를 통해 작동하므로, 민사소송법상 증명책임 원칙으로는 포착하기 어렵다. 실무에서는 입증 불가능한 것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귀결이 발생한다.
둘째, 무한소급의 위험이다. 이 감정도 권력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의심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도 또 다른 권력관계의 산물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는 회의주의적 무정부 상태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현실적 해법은 차원을 구분하는 것이다.
입법론적, 정책론적 차원에서는 권력 비판적 관점에서 법제도가 특정 집단의 감정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거나 동원하는지 검토하되, 개별 사건 판단 차원에서는 누스바움의 사실성과 타당성 필터링을 적용하는 것이다.
예컨대, 특정 계층에 대한 혐오가 체계적으로 나타난다는 패턴이 발견되면 입법적 개입, 이를테면 차별금지법 등으로 대응하되, 개별 재판에서는 기존 필터링 체계로 처리한다. 이는 이론적으로 불완전하지만, 법치주의의 예측가능성과의 타협이다.
이러한 이원적 접근을 통해, 권력 비판의 이론적 통찰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개별 사건의 법적 판단에서 요구되는 입증 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누스바움은 응보적 분노를 마법적 사고(magical thinking)로 비판한다. 이는 정신분석학과 발달심리학, 특히 Jean Piaget의 아동 인지 발달 단계에서 차용한 개념으로, 원인과 결과 사이에 인과적 연결이 없는데도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사고를 의미한다.
누스바움이 응보적 분노를 마법적 사고로 비판하는 핵심 논리는 가해자의 고통, 즉 down-ranking이 피해자의 회복, 즉 up-ranking으로 이어진다는 인과관계가 실제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피해, 즉 죽은 자녀나 파괴된 명예는 가해자를 벌한다고 해서 복구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복수하면 뭔가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 마법적 사고라는 것이다.
물론 누스바움도 응보 감정의 보편성과 지속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자연스럽고 강력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고 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누스바움의 논의에서 기술적 진술과 규범적 진술이 혼재된다는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응보 감정은 지속적이고 보편적이다라는 명제가 실증적으로 참이지만, 규범적으로는 그러므로 법은 이를 오류로 보고 억제해야 한다는 것은 가치판단이다.
그러나, 만약 응보 감정이 제거 불가능한 인간 조건의 일부라면, 그 경우에도 누스바움이 말한 바와 같이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이를 논하기 위해선 응보가 실제로 하는 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상징적 비난(Symbolic Denunciation)이다. 응보는 가해자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납 불가능함을 선언하고, 피해자의 가치를 사회가 인정함을 표현한다.
둘째, 감정적 카타르시스이다. 응보는 피해자와 공동체의 분노 감정을 해소하고,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주관적 만족감을 제공한다.
셋째, 일반예방 효과이다. 응보는 잠재적 범죄자에게 경고하고 법질서의 위엄을 확립한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이러한 효과들이 응보 자체가 아니라 다른 메커니즘으로도 달성 가능하다고 재반박한다.
상징적 비난은 공식적 사과나 진실 규명으로도 가능하고, 감정 해소는 회복적 대화나 추모 의식으로도 가능하며, 예방 효과는 재발 방지 제도 구축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핵심은 가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과 정의 실현 사이에 필연적 연결이 없다는 주장이다.
첫째, 끝없는 보복의 순환이다.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의 구조가 이를 보여준다. 아가멤논이 딸을 제물로 바치고,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을 살해하고, 아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복수의 여신들이 오레스테스를 추격하는 이 순환은 응보의 논리가 내재적 정지 메커니즘을 갖지 않음을 보여준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점은 상대적이고, 각자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한 응보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의 일베와 메갈 갈등 구조도 이와 흡사했다. 일베는 여성들의 남성 비하에 대한 정당한 응수라고 주장하고, 메갈은 수십 년간의 여성 혐오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라고 주장한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 누구의 피해가 더 큰가라는 질문은 해결 불가능하다.
둘째, 비례성의 무한 팽창이다. 응보의 동등성 기준은 주관적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고통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유족이 사형도 모자라다고 느끼는 것은 심리적으로 당연하다.
그러나 이를 법적 기준으로 삼으면, 성범죄는 사형, 살인은 고문 후 사형, 대량 학살은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비례성 원칙이 무너지고 형벌이 무한 경쟁에 빠진다.
셋째, 피해자의 회복 지연이다. 역설적이게도, 응보에 집착할수록 피해자의 실제 회복은 지연된다. Carlsmith 등의 2008년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복수를 실행한 집단이 실행하지 않은 집단보다 더 오래 분노와 고통에 시달렸다. 이유는 복수 후에도 피해가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시 직면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의 사례를 보면, 책임자 처벌에만 집중했을 때보다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로 전환했을 때 심리적 안정이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다.
응보 감정은 도덕적 진지함의 표현일 수 있다는 Murphy의 주장과, 마법적 사고의 오류를 포함한다는 누스바움의 주장은 모두 일정한 타당성을 갖는다.
문제는 응보 자체가 아니라 어떤 응보가 정당한가이다. 이는 다음 장에서 Murphy의 이론을 통해 구체화될 것이다.
누스바움의 대안들, 즉 공식 사과, 진실 규명, 재발 방지가 작동하려면 최소한의 제도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공식 사과는 진정성 있는 사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신뢰, 진실 규명은 은폐 없이 투명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신뢰, 재발 방지는 실제로 이행될 것이라는 신뢰가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은 이러한 신뢰가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세월호 사건은 2014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지만, 진상 규명 특별법이 제정되었음에도 정권 교체 후 조사가 중단되었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음에도 2022년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대중의 반응은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이지만, 옥시 대표의 공식 사과는 머리 숙인 90도 각도 논란으로 사과가 아니라 쇼라는 비판을 받았고, 실제 배상은 소송이 10년 넘게 진행 중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은 2020년에 개혁 취지가 견제와 균형이었지만, 현실은 정권마다 권력 기관으로 악용되었고, 대중의 냉소는 누가 집권하든 똑같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응보 대신 재발 방지를 말하는 것은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누스바움의 대안은 작동하지 않는다.
(2) 응보의 "확실성" vs. 대안의 "불확실성"
대중의 심리를 솔직하게 분석하면,
응보적 처벌은 즉각적이다. 판결 후 집행되기 때문이다. 반면 누스바움의 대안은 지연적이다. 진상 규명에 수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응보적 처벌은 가시적이다. 가해자가 감옥에 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안은 추상적이다. 제도 개선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응보적 처벌은 확정적이다. 형량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반면 대안은 가변적이다. 정권이 바뀌면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응보적 처벌은 단순명쾌하다. 10년형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안은 복잡모호하다. 진상 규명 후 재발 방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비질란테, 복수자, 판사 이한영, 모범택시 시리즈가 흥행하는 이유는 주인공이 즉각적으로, 가시적으로, 확정적으로 정의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복잡한 절차, 정치적 타협, 뒤집힐 가능성을 모두 건너뛴다. 대중은 여기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이것이 누스바움이 비판하는 마법적 사고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응보만이 유일하게 마법처럼 확실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뢰 회복을 위해 싸운다는 접근도 문제가 있다. 신뢰 회복이 정치화되는 순간 본래 목적이 전도되기 때문이다.
검찰 개혁은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진행되었지만, 출발점은 권력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를 통한 신뢰 회복이었으나, 진행 과정은 여야 극한 대립과 정권 교체 후 뒤집기였고, 결과는 신뢰가 더 추락한 것이었다.
사법 농단 사태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진행되었지만, 출발점은 사법부 독립성 회복이었으나, 진행 과정은 판사 파업과 진영 대립이었고, 결과는 사법 신뢰가 OECD 최하위를 유지한 것이었다.
구조적 함정은 다음과 같다. 신뢰 회복 시도가 정치적 의제화되면서 여야 갈등이 발생하고, 개혁 대 탄압이라는 프레임 대립이 생기며, 국민은 또 정치 싸움으로 인식하고, 신뢰가 더 하락한다. 싸운다에 초점이 맞춰지는 순간,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진영 논리와 권력 투쟁뿐이다. 따라서 신뢰 회복을 위한 투쟁이라는 접근은 그 자체로 신뢰를 더 파괴하는 역설에 빠진다.
Jeffrie Murphy는 누스바움과 달리 응보 감정 자체를 옹호한다.
그는 분노는 자기 존중(self-respect)의 표현이라고 주장하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자기 비하(servility)라고 본다.
노예가 주인의 폭력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포기한 것이다. 따라서 분노 자체는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이는 누스바움이 응보적 분노를 일률적으로 마법적 사고로 치부하는 것과 대조된다.
Murphy는 응보 감정이 "나는 이렇게 대우받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기 존엄의 선언이며, 악에 대한 도덕적 진지함(Moral Seriousness)의 증거라고 본다. 악에 대해 무감각한 것보다는 분노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Murphy도 무제한 응보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응보가 정당화되기 위한 조건을 명확히 제시한다.
응보는 침해된 가치에 비례해야 한다.
명예 훼손의 경우 정당한 응보는 공개 사과나 손해 배상이지, 사형이 아니다.
재산 침해의 경우 정당한 응보는 원상 회복과 이자 지급이지, 손가락 절단이 아니다.
생명 침해의 경우 정당한 응보는 장기 징역에서 사형까지의 범위일 수 있지만, 고문 후 사형은 부당하다.
기준은 피해자가 잃은 것과 가해자가 잃을 것의 균형이다.
한국적 적용을 고려하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현행 무기징역은 비례적일 수 있다. 그러나 화학적 거세와 신상공개와 무기징역을 모두 부과하는 것은 과잉일 가능성이 있다.
비례성 판단은 개별 사건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일률적인 기준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핵심 원칙은 명확하다. 응보는 피해의 성격과 크기에 상응해야 한다.
응보는 적법 절차를 거쳐야 정당하다. 필수 요소는 공정한 재판, 즉 변호인 조력권과 증거 법칙의 준수, 상소 기회의 보장, 무죄 추정 원칙의 적용, 이중 처벌 금지의 원칙이다.
디지털 교도소가 부당한 이유는 절차가 없어서 무고한 사람도 피해를 입고, 검증이 없어서 오정보가 확산되며, 구제가 불가능해서 영구적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핵심은 정당한 절차 없는 응보는 복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절차적 정의는 단순히 형식적 요건이 아니라 응보와 복수를 구분하는 본질적 기준이다. 복수는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지만, 응보는 객관적 절차를 통해 정당화된다. 이는 근대 국가가 형벌권을 독점한 근거이기도 하다. 국가만이 공정한 절차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인간으로서의 최소 존엄은 보장해야 한다. 금지되는 것은 고문, 비인간적 처우, 즉 과밀 수용이나 위생 방치, 공개 처형이나 조리돌림, 가족에 대한 연좌제이다. 한국의 논쟁거리로는 화학적 거세가 신체 불가침성을 침해하는가, 전자 발찌를 종신토록 착용하게 하는 것이 감시의 인권 침해인가 등이 있다.
Murphy의 입장은 재범 방지가 목적이라면 화학적 거세보다 심리 치료와 사회 복귀 프로그램이 우선되어야 하고, 감시가 필요하다면 기간 제한과 정기 재심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핵심은 범죄자를 단순한 객체로 취급하지 않고, 여전히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정당한 응보와 복수는 여러 측면에서 구분된다.
목적 측면에서, 정당한 응보는 정의 회복과 공동체 규범 확인을 추구하지만, 복수는 가해자의 고통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절차 측면에서, 정당한 응보는 공정한 재판을 거치지만, 복수는 사적 판단에 의존한다.
비례성 측면에서, 정당한 응보는 엄격한 비례 원칙을 따르지만, 복수는 감정적 과잉으로 흐를 수 있다. 종결성 측면에서, 정당한 응보는 형 집행 후 종료되지만, 복수는 끝없는 증오로 이어질 수 있다.
인간성 측면에서, 정당한 응보는 존엄을 보장하지만, 복수는 비인간화가 가능하다.
실천적 구분 기준을 제시하면, 피해자가 "그는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응보이고, "그는 똑같이 고통받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복수이다. 또한 형 집행 후 "이제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응보이고, "아직도 부족하다, 더 괴롭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복수이다.
응분의 몫은 정의론의 가장 오래된 정의 중 하나인 각자에게 그의 몫을(suum cuique)과 직결된다.
칸트는 『법이론(Rechtslehre)』에서 동해보복원칙(lex talionis)을 주장했다.
칸트 응보론의 세 가지 핵심은 동등성(Gleichheit), 즉 범죄와 형벌의 균형, 절대성(Absolutheit), 즉 목적론적 고려의 배제, 존엄성(Würde), 즉 범죄자를 수단으로 취급하지 않음이다. 손정우 사건에서 대중이 원한 것이 바로 이 칸트적 의미의 응분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개념적 분기가 발생한다. 칸트에게 응보는 의지의 보편성 회복, 즉 범죄자가 침해한 법칙을 그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며, 이성적 존재로서의 대우를 의미한다. 반면 누스바움이 비판하는 응보는 감정적 만족 추구, 즉 피해자 고통이 가해자 고통과 같다는 등식이며, 과거지향적으로 피해를 되돌릴 수 있다는 환상이다. 다시 말해, 칸트의 규범적 응보론과 대중의 심리적 응보 욕구는 다르다.
Murphy는 이 둘을 연결하려 시도한다. 그는 응보 감정이 칸트적 존엄성 개념과 양립 가능하다고 보며, 응보가 적절히 제약될 때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적 딜레마를 고려해야 한다. 칸트의 응보론은 행위자의 이성적 의지를 전제한다. 범죄자는 자신의 준칙(Maxime)을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했고, 그 법칙이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전두엽 손상으로 의지 능력 자체가 결여된 경우, 그는 보편적 입법 의지의 형태로 행위하지 않았으므로 칸트의 응보론은 적용 불가능하다. 이는 칸트 자신도 『법이론』에서 "광인(insane person)에게는 형벌이 아닌 치료를 적용해야 한다"고 명시한 부분과 일치한다.
피니어스 게이지 사례는 응보론의 존재론적 가정을 붕괴시킨다. 응보론은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이성적 존재라고 전제하지만, 신경과학은 의지가 뇌의 특정 영역, 즉 전두엽의 기능임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신경학적 우연의 산물인가? 만약 게이지가 사고 전에 살인을 저질렀다면 사형이 정당하지만, 사고 후에 살인을 저질렀다면 무죄가 되는가? 이 차이는 1.1미터 쇠막대의 궤적 차이일 뿐이다. 응보적 정의는 이런 우연에 의존할 수 없다.
Murphy의 해법은 응보가 완전한 책임능력을 이분법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가 가진 책임 능력의 정도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이지의 경우, 감소된 책임능력을 인정하되 완전 무죄는 아닐 수 있다. 이는 현행 형법의 심신미약 감경 제도와 유사하지만, Murphy는 이를 더 세밀하게 정도의 문제로 파악한다. 즉, 책임능력이 100퍼센트냐 0퍼센트냐가 아니라, 책임능력의 정도에 따라 응보도 비례적으로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기해야 할 목표가 있다.
첫째, 사법 신뢰 회복이다. 이는 법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치, 언론, 시민사회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둘째, 응보에서 회복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이는 전제 조건, 즉 최소한의 제도 신뢰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셋째, 사적 제재의 완전 근절이다. 이는 신뢰 붕괴 상황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달성 가능한 목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응보를 최소한 공정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절차를 최소한 투명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 피해자를 최소한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진전이다. 거창한 목표를 추구하다가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하는 것보다, 작지만 현실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낫다.
현재 문제는 유사 사건인데 형량이 천차만별이고, 왜 이 형량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며, 대중은 판사 마음대로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해결책으로는 양형 이유서 의무화를 들 수 있다. 현재는 선택 사항이지만, 이를 의무화하여 모든 판결에서 형량 결정의 구체적 이유를 명시해야 한다. 또한 AI 양형 보조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다. 예컨대, 유사 사건 1,000건의 평균 형량이 7년이라는 데이터를 제시하고, 본 사건이 평균보다 높거나 낮은 이유를 X, Y, Z로 명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의 효과는 신뢰 회복까지는 못 해도 공정하다는 인식은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데이터 기반이므로 정치적 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 해석학적 순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AI 결과를 절대 기준이 아닌 하나의 해석 제안으로 취급하고, 양형위원회의 심의와 토론 과정을 거치며, 대항 데이터, 즉 소수자나 전문가 의견을 의도적으로 투입해야 한다. 이를 통해 AI가 기존 편향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현재 문제는 피해자 진술권이 형식적이고, 실제 판결에 영향이 거의 없으며, 피해자는 자신을 들러리로 느낀다는 것이다.
해결책은 일본 모델을 참조하여, 피해자에게 증인 신문권과 피고인 질문권을 부여하고, 양형 의견 진술 시 구체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게 하며, 판사는 피해자 의견을 양형 이유서에 명시하고, 국선 피해자 변호사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의 효과는 피해자가 내 목소리가 반영되었다고 느낌으로써 절차적 정의를 경험하고, 응보 감정이 제도 내에 수용됨으로써 사적 제재가 감소한다는 것이다. 회복적 정의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면, 이것은 응보 시스템 내에서의 피해자 참여이고, 회복적 정의는 별도 트랙으로 청소년 범죄나 특정 기업 범죗 등 조건이 갖춰진 영역에서만 실험해야 한다. 전면적 도입은 현실적이지 않다.
현재 문제는 여론에 따라 형량이 무한 상승하고, 사형도 모자라다는 여론이 나오면서 어디까지 처벌을 강화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해결책은 헌법적 상한선을 명확화하는 것이다. 생명권과 관련해서는 사형 논쟁이 별도로 필요하지만, 신체불가침과 관련해서는 화학적 거세를 최대 15년으로 제한하고, 자유권과 관련해서는 무기징역의 실질 최대 복역 기간을 설정해야 한다.
독일 모델을 참조하면, 무기징역은 실제로는 15년 후 가석방 심사가 이루어지고, 재범 위험이 높으면 보안 처분(Sicherungsverwahrung)을 별도로 적용한다. 즉, 응보로서의 형벌과 예방으로서의 보안을 분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의 효과는 응보의 무한 경쟁을 방지하면서도, 위험한 범죄자는 사회로부터 격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 보안 처분도 정기 재심사가 필수적이어야 한다.
전면 도입이 아니라 소규모 실험이 필요하다.
첫째, 청소년 범죄에서 뉴질랜드 모델을 참조할 수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재기 가능성이 있고, 공동체, 즉 학교나 가족이 명확히 식별되므로, 성공 사례를 축적한 후 점진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
둘째, 특정 기업 범죄, 즉 환경이나 노동 분야에서 금전 배상보다 실질적 개선이 의미 있는 경우, 예컨대 중대재해 발생 시 안전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고 제3자 감시를 받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중요한 원칙은 일반 흉악범죄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복적 정의가 솜방망이라는 인식을 방지해야 하며, 성공 사례를 쌓아야만 신뢰가 축적될 수 있다. 실패 사례가 발생하면 전체 제도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므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진짜 문제는 처벌 수위보다 집행의 불공정성이다.
제안으로는 집행 과정의 실시간 공개가 있다. 수형자 출소 예정일을 공개하고, 가석방 심사 기준을 명확화하며, 재범 방지 프로그램 이수 여부를 공개해야 한다. 또한 특별사면 기준의 법제화가 필요하다. 현재는 대통령 재량에 맡겨져 있지만, 독립 위원회 심사와 기준 공개를 통해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처벌 자체는 응보적이더라도 과정이 투명하면 최소한 공정하다는 인식이 가능하다. 이것이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본고가 도달한 결론은 이론적으로 불완전하다. 우리는 누스바움의 이상을 포기했고, Murphy의 현실주의를 받아들였으며, 그마저도 완전한 해결책이 아님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근본 문제는 신뢰 부재이고, 이는 법학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법학자가 아무리 정교한 이론을 제시해도, 국민이 제도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은 작동하지 않는다. 이는 법학이 직면한 근본적 한계이다.
법학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이론적 정교화이다. 정당한 응보의 구체적 기준을 마련하고, 판례 분석을 통한 비례성 원칙을 추출하며, 비교법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다. 둘째, 실무적 제안이다. 양형위원회에 투명성 제고 방안을 제시하고, 피해자 참가 제도 개선안을 입법 제안하며, 교정 시스템 인권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셋째, 대중 교육이다. 응보와 복수의 개념을 구분하고, 절차적 정의의 중요성을 설명하되, 설교조가 아닌 구체적 사례를 통해 접근하는 것이다.
법학자가 할 수 없는 것도 세 가지이다. 첫째, 신뢰 회복이다. 이것은 정치, 언론, 시민사회 전체의 문제이며, 법학자가 나서면 오히려 정치화될 뿐이다. 둘째, 대중의 응보 욕구 제거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이며, 신경과학적으로도 제거 불가능하다. 대신 제도 안으로 수용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셋째, 사적 제재의 완전 근절이다. 사법 신뢰가 낮은 한 불가능하며, 최소화와 투명화만이 가능하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중간 지대의 붕괴이다. 극단적 응보파와 극단적 사면파, 엄벌하라와 용서하라 사이에 중간의 합리적 논의 공간이 없다. 법학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Murphy의 정당한 응보 논의를 통해, 응보를 인정하되 그 조건을 명확히 하는 제3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작동 가능한 유일한 경로일 수 있다.
중간 지대의 회복은 단순히 응보파와 사면파의 절충이 아니다. 그것은 응보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명확히 하고, 절차적 정의를 통해 응보를 복수와 구분하며, 비례성 원칙을 통해 무한 경쟁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간 지대에서만 법감정과 실정법이 만날 수 있고, 대중과 사법부가 대화할 수 있다.
본고는 형사법 영역에 초점을 맞췄지만, 노동법에도 유사한 구조가 있다. 플랫폼 노동자들의 분노, 즉 우리를 노동자로 인정하라, 알고리즘 평가를 투명하게 하라는 요구에 대해, 정부와 기업의 대응은 태스크포스, 간담회, 가이드라인 마련에 그치고 있다. 만약 노동자들이 차라리 배달 앱을 해킹해서 불공정 알고리즘을 폭로하겠다는 사적 제재로 나아가고, 이것이 대중적 지지를 받는다면, 이것도 응보 대 제도 개선의 딜레마이다. 플랫폼 노동자들의 정당한 분노를 어떻게 제도 안으로 수용할 것인가, 이들의 응보 욕구를 어떻게 절차적으로 정당화할 것인가는 향후 연구 과제이다.
법감정의 제도화는 신뢰 회복이라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공정한 응보라는 최소선을 지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는 누스바움의 이상주의가 한국적 맥락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솔직한 인정이며, Murphy의 현실주의가 불완전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작동 가능한 유일한 경로라는 인식이다.
법학자는 거창한 목표를 추구하기보다, 작지만 달성 가능한 목표, 즉 양형의 투명성, 피해자 참가의 실질화, 비례성 원칙의 명확화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만 해도, 사적 제재를 최소화하고 공정한 응보의 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완벽한 정의는 불가능하지만, 덜 부정의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이것이 본고가 도달한, 겸손하지만 현실적인 결론이다.
2026.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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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규·김연수,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인식이 사적제재 수용도에 미치는 영향」, 『한국범죄심리연구』 20(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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