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법학적 사유와 일반조항으로의 도피에 대한 고찰

생각의 서고, 16화

by 소는영

I. 서론: 한국 법해석학의 이율배반적 현상과 방법론적 진단



현대 한국의 법이론 및 법실무는 방법론적 관점에서 고찰할 때, 하나의 근본적이면서도 심각한 '이율배반적인 특성'을 노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율배반성은 법적 사태의 해결을 위한 법규정의 존재 유무에 따라 극단적으로 양분되는 법적용자의 해석학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첫째, 당해 법적 사태에 적용될 명시적인 법규정이 존재하는 경우, 우리의 이론과 판례는 해당 법조문의 문구에 지나칠 정도로 천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법적 판단의 실질적 기초가 되는 법현실을 도외시한 채, 형식논리적인 해석에만 지향되어 있는 이른바 형식주의Formalismus적 태도이다. 이러한 접근 하에서는 판결의 정당성이 개별 사태의 구체적인 규범적 타당성이 아닌, '판결이 법조문에 부합하는가' 혹은 '논리적인 체계가 내용적인 타당성보다 우선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형식논리적 척도에 의존하게 된다. 김영환(2001)은 이러한 경향을 '개념법학적인 사유형태'라고 명명하며 그 역사적·이론적 계보를 추적한다.


둘째, 이와는 정반대로, 적용할 법조문이 부재하거나 불명확한 경우, 법적용자는 불확정개념이나 일반조항Generalklauseln을 원용하여, '개괄적인 일상도덕의 관념들'을 법 영역 내부로 거침없이 수용한다. 이러한 판단 방식은 법적 분쟁의 해결 기준을 세분화되고 구체화된 법해석학의 기준이 아닌, 미분화되고 추상적인 '일상도덕의 척도'에 의존하게 만든다. 그 결과, 법적 결정은 실질적으로 '도덕적인 판단' 혹은 심지어 '여론재판'으로 변질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는 헤데만(Hedemann)이 일찍이 경고했던 '일반조항에로의 도피' 현상의 전형적인 발현이다.


이 두 가지 극단적 태도는 '법적 결정이 법률에 내재한 법원리의 구체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현대 법학방법론의 대전제, 즉 '법의 지배' 이념의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김영환(2001)은 이러한 이율배반적 현상이 '법의 계수'라는 한국 법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기인한 결과현상임을 지적한다. 즉, 서구의 법체계가 그 문화적·철학적 토대인 법원리와 분리된 채 형식논리적 체계(개념법학)로 수입되었고, 이 경직된 체계가 한국의 역동적인 법현실과 충돌할 때, 법관은 그 경직성을 견디지 못하고 시스템 외부의 도덕률(일반조항)로 '도피'하는 상호보완적 병리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추상적인 자연법 논거에 대한 불만이 개념법학적 발상법을 강화하고, 동시에 형식적 법실증주의에 대한 반작용이 일반조항으로의 도피를 초래하는 순환적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본고의 목적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김영환(2001)의 분석을 기준점으로 삼아 한국 법학방법론의 이율배반성을 고찰하는 것이다. 특히 두 축 중 '일반조항에로의 도피'가 현대 한국 법실무에서 가지는 함의와 위험성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헤데만(Hedemann)의 고전적 경고를 수용적으로 고찰한 윤철홍(2019.1)의 연구와, '신의성실의 원칙'을 둘러싼 최근의 판례 동향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윤철홍(2019.2)의 연구를 원용한다.


궁극적으로 본고는 이 두 현상, 즉 '개념법학적 사유형태'와 '일반조항에로의 도피'가 표면적으로는 형식주의와 반형식주의라는 정반대의 모습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법원리'의 부재 속에서 '법관의 자의적 재량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동일한 방법론적 실패를 공유하고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II. 형식주의의 경직성: 개념법학적 사유형태의 유산



김영환(2001)이 지적한 한국 법해석학의 첫 번째 축은 '개념법학적 사유형태'이다. '개념법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예링(Jhering)이 젊은 시절 자신의 스승이었던 푸흐타(Puchta)의 형식논리적인 법학방법론을 비판적으로 명명한 데서 유래한다.



1. 개념법학의 역사적 연원과 이론적 특징


개념법학적 사고유형은 그 용어의 등장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는 이미 개념들 간의 형식논리적 구조와 연역적 추론을 중시하는 '논거제시방법'을 주창한 바 있다. 이후 역사법학의 창시자인 사비니Savigny)가 법의 연원을 '민족정신'에서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해 이와 같은 논리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사유방식을 독자적인 법학방법론으로 완성시킨 인물은 푸흐타이다. 푸흐타가 제시한 개념법학의 이론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법을 '개념의 피라미드'라는 폐쇄적인 논리 체계로 상정한다. 푸흐타는 법학의 임무가 개별 법명제들의 계보를 그 원칙(최상위 개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다시 그 원칙으로부터 미세한 가지까지 연역해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체계에서 상위 개념은 하위 개념을 포섭하며, 최상위의 개념(라렌츠에 따르면 푸흐타의 경우 칸트의 '자유' 개념 )은 논리적 순환을 피하기 위해 이미 고정된 것으로 전제된다.


둘째, 형식논리적인 '연역적인 추론방식'을 유일한 법학적 방법으로 간주한다. 법학의 일차적 임무는 법적 구성방법juristische Konstruktion을 통해 상위 개념으로부터 하위 법명제를 논리적으로 도출하는 것이다. 개념법학자들은 이러한 연역적 추론을 통해 사고가능한 모든 사태에 대한 법적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셋째, '개념의 생성적인 기능'을 신봉한다. 개념법학에서 개념은 단순히 법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상의 논리적 맥락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개념 간의 상호연관성을 통해 '자발적으로 새로운 법명제'가 창출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특히 법의 흠결 보충에서 역추론방식Inversionsmethode이라는 기법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A라는 사실로부터 X라는 상위 명제를 추론한 뒤, 다시 이 X로부터 법이 상정하지 않았던 B라는 사실에 대한 명제를 연역해내는 식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개념법학은 법의 흠결Lücke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베르그봄(K. Bergbohm)은 "법률 자체에 흠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적용자의 머릿속에 흠결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2. 개념법학의 근본적 문제


개념법학은 법을 체계화하고 학문화하는 데 공헌했지만, 김영환(2001)은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첫째, '비현실주의'이다. 개념법학은 법과 '법적 사태'의 연관성을 은폐한다. 법의 일차적 임무가 올바른 분쟁 해결에 있음에도, 개념법학은 형식적인 체계만을 중시한 나머지 법적 분쟁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필립 헥크(Philipp Heck)가 지적했듯, 법명제와 법적 사태 간의 현실적 연관성을 법체계의 논리적인 연관성으로 대체하는 것에 연유한다. 그 결과 법적 사태는 형식적인 구조를 통해 희석화되어 버린다.


둘째, '체계주의'이다. 이는 비현실주의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법해석학적 개념들을 그 실질적 근거가 되는 '법원리'로부터 차단시킨다는 것이다. 개념의 타당성은 그것이 내재한 법원리가 아니라, 오직 각 개념들 간의 '체계적인 맥락'에 의해서만 확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역설적으로 법관에게 '폭넓은 재량'을 부여한다. 개념법학은 단지 연역적 추론만을 요구할 뿐, 어떤 특정 '법적 구성방법'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관은 자신이 원하는 결론에 부합하는 '체계'나 '구성'을 자의적으로 선택한 뒤, 마치 그 결론이 객관적인 '연역'의 필연적 산물인 것처럼 은폐할 수 있다. 이 '은폐된 자의성'이야말로 개념법학의 가장 큰 위험이다.



3. 한국 형법해석학에서의 구체적 사례


김영환(2001)은 이러한 개념법학적 사유형태가 한국의 형법 이론과 실무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진단한다.

첫째, 형법에서의 범죄론 '체계'에 대한 맹신이다. 우리의 통설은 범죄론을 사례해결을 위한 하나의 '도식'이나 '법학교육방식'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가 '도그마'인 것처럼 신성시한다. 그 결과, 구체적인 법적 결정이 범죄론 체계를 따랐기 때문에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개별 사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때만 해당 범죄론이 설득력을 지닌다는 본말이 전도된다.


둘째, '행위론'을 둘러싼 현학적 논쟁이다. 형법상 행위론(예를 들면, 인과적 행위론이나 목적적 행위론 등)은 반사작용이나 절대적 폭력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배제하는 실천적 기능 외에는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범죄현상을 연역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현학적인 개념들의 퍼즐맞추기'로 전락했다. 이는 종래 하세머(Hassemer)가 비판한 이론적 세분화에 비해 실천적 성과는 거의 없는 '불균형 현상'의 전형이다.


셋째, 미수범 영역에서의 인위적인 개념 생성이다. 형법상 범죄의 실현단계(예비, 실행, 기수)는 행위의 '현실적인 진행과정'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이 현실과 무관하게 체계적 맥락에서 '예비' 단계에 유비 적용되어, '예비의 예비', '예비의 미수'와 같은 새로운 개념을 자발적으로 창조한다. 이는 '개념의 생성적 기능'이 자유주의적 형법 원리(미수범의 예외적 처벌)를 도외시한 채 공리공론을 만들어낸 사례이다.




III. 반형식주의의 위험: 헤데만의 '일반조항에로의 도피'



개념법학의 경직된 형식주의가 현실의 문제를 외면할 때, 법적용자는 그 반대편 극단인 '일반조항에로의 도피'라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1. 헤데만의 경고와 그 역사적 배경


윤철홍은, 헤데만이 1933년 출간한 동명의 저서가 '법과 국가에 대한 하나의 위험'이라는 부제 하에 당시 독일 법학계에 만연했던 일반조항 의존 현상을 비판했음을 상기시키며, 이러한 현상이 두 가지 주요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촉발되었음을 강변한다.


첫번째는, 자유법운동Freirechtsbewegung의 영향이다. 자유법운동은 칸토로비츠(Kantorowicz), 훅스(Ernst Fuchs) 등을 중심으로 '실정법에는 흠결이 없다'는 법실증주의Gesetzespositivismus에 반대하며, 법조문에 매몰되지 않는 '자유로운 법 발견'과 '법 감정'을 강조했다. 이는 일반조항을 법관의 창조적 해석을 위한 중요한 통로로 만들었다.


둘째, 평가절상 문제Aufwertungskampf라는 경제적 현실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초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마르크는 마르크와 동일하다'는 엄격법ius strictum적 태도는 수많은 채권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극심한 불공정을 야기했다. 이에 독일 제국법원은 형평aequitas을 실현하기 위해, 독일 민법 제242조의 '신의성실' 원칙과 같은 일반조항을 근거로 사정변경을 인정하고 계약 내용을 수정하는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2. 헤데만이 경고한 세 가지 핵심 위험


그러나 헤데만은 이러한 '도피'가 법과 국가에 치명적인 세 가지 위험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첫번째는, 법률가의 유약화Verweichlichung이다. 이는 법학자, 재판관, 입법가 모두가 '철두철미하게 논구해야 하는' 어려운 개별 원칙의 탐구를 기피하고, '신의성실'이나 '선량한 풍속'과 같은 '쉽고 간결한' 일반조항을 통해 복잡한 사안을 해결하려는 지적 나태함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법적 불안정성Unsicherheit이다. '선량한 풍속', '신의성실', '공공의 안녕'과 같은 개념은 그 자체로 명확한 척도가 될 수 없다. 법률이라는 '확고한 법규범'이 재판관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대체될 때, 법과 도덕의 경계가 혼미해지며 법질서 전체의 예측 가능성이 붕괴된다.


세번째는, 재판관 및 국가권력의 '자의성'이다. 그는 이것이 가장 치명적인 위험이라 보았는바, 이는 일반조항은 그 내용이 비어있기 때문에 재판관이나 국가권력이 자신들의 윤리적, 경제적, 혹은 '정치적인' 목적을 자의적으로 주입하는 완벽한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연유한다. 재판관은 '조문의 노예'가 아니라 '도덕의 심판자' 혹은 '국가주의 사상의 선전자'가 된다. 헤데만은 이러한 위험이 국가권력에 의해 악용될 때 극대화된다고 보았다. 그는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형평'과 '법' 사이의 해석은 오로지 황제 자신에게만 속한다"고 선언한 것을 그 예로 들었다. 이는 일반조항의 해석권을 최고 권력이 독점할 때, 그것이 법의 제한으로부터 해방된 '절대적 의지'의 도구가 됨을 보여준다. 헤데만의 이러한 경고는 불행하게도 저서 출간 직후 나치의 수권법Ermächtigungsgesetz과 사법살인Justizmord을 통해 가장 참혹한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도피'는 법실증주의의 경직성이 현실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 법학이 스스로의 내재적 원리를 통해 이를 극복하는 대신, 법 '외부'의 기준(도덕, 감정, 정치)에 항복했음을 의미한다. 헤데만이 지적한 '유약화'는 바로 이러한 법학의 지적 파산 선언이며, 법이 스스로의 규범성을 포기하고 정치권력의 시녀가 되는 경로, 즉 '자의성'의 문을 여는 행위이다.




IV. '일반조항에로의 도피'의 한국적 적용: 신의성실의 원칙을 중심으로



헤데만이 경고한 세 가지 위험(유약화, 불안정성, 자의성)은 '신의성실의 원칙'(이하 '신의칙')의 과도한 적용 확대를 통해 현대 한국 법실무에서 그대로, 혹은 더욱 심각한 형태로 현실화되고 있다.



1. '제왕적 조항'으로서의 신의칙 확대


윤철홍은 우리 민법 제2조에 규정된 신의칙이 본래의 사법(私法) 영역을 넘어 '제왕적인 조항'으로 군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신의칙은 민법총칙의 통칙 규정으로서 물권법(예: 유치권 남용 판단), 채권법(예: 선관주의의무), 친족상속법(예: 고지의무) 등 민법 전반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약관 규제에 관한 법률'(제5조) 등 상법 영역은 물론, '민사소송법'(제1조 제2항) , '행정절차법'(제4조) , '국세기본법'(제15조) 등 공법(公法) 영역에까지 일반원칙으로 규정되어 그 적용 범위가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나아가 신의칙은 판례를 통해 사정변경의 원칙clausula rebus sic stantibus, 실효의 원칙, 모순행위의 금지 원칙 등 성문법에 규정되지 않은 새로운 법 제도를 창설하는 근거로까지 기능하고 있다.



2. 헤데만의 위험이 현실화된 비판적 사례 연구


나아가 윤철홍은 이러한 신의칙의 확대 적용이 구체적인 판결에서 어떻게 헤데만의 위험을 현실화하는지 보여준다.


(1) 관습법상 법정지상권 및 유치권 남용 (법관의 유약화와 자의성)

판례는 토지소유자가 법정지상권을 취득할 지위에 있는 건물 양수인을 상대로 소유권에 기해 건물 철거를 구하는 것을 '신의칙상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한다. 또한, 경매 절차 등에서 채무자와 공모하여 '고의적으로 작출'된 것으로 보이는 유치권 행사를 '신의칙에 반하는 권리행사 또는 권리남용'으로 보아 배척한다.

이는 헤데만이 지적한 '유약화'와 '자의성'의 전형이다. 법관이 등기라는 물권법의 엄격한 형식적 요건이나 유치권의 구체적인 성립요건을 심사하는 지난한 법적 분석을 회피하고(유약화), '신의칙 위반'이라는 모호한 도덕적 잣대를 사용하여(자의성) 물권법의 대원칙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2) 과거사 관련 소멸시효 항변 (법적 불안정성)

권위주의 정권 하의 국가 불법행위에 대해, 법원은 피해자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객관적으로 사실상의 장애사유'가 있었음을 이유로,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항변이 '신의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해왔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3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이러한 장애사유가 해소된 후에도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해야만 시효 항변을 배척할 수 있으며, 이 '상당한 기간'은 민법상 시효정지에 준하여 '3년'을 넘을 수 없다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윤철홍은 이러한 태도 변화가 "기존의 태도에서 후퇴한 것"이며 "너무 자의적"이라고 비판한다. 특히 "정권이 권위주의 정권으로 바뀐 후에 이 같은 판결이 내려졌다"고 지적하며, 신의칙의 적용 기준 자체가 정치적 환경에 따라 변동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법적 안정성을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헤데만의 '불안정성'의 위험이 현실화된 것이다.



(3) 통상임금 판결 (강행규정의 무력화와 사법적 입법)

헤데만의 세 가지 위험이 총체적으로 발현된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통상임금 관련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노사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더라도 이는 '근로기준법'이라는 강행규정을 위반하여 무효이며, 따라서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먼저 확인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어서, 근로자가 이러한 (법적으로 정당한) 무효 주장에 터 잡아 추가적인 법정수당(과거 소급분)의 지급을 구하는 것이, 사용자에게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워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면, 이는 '정의와 형평 관념에 비추어 신의에 현저히 반하'므로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이는 '신의칙이 강행규정을 개폐한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는 단순한 법 '적용'에서의 자의성을 넘어 법 '창조'에서의 자의성이라는 점이다. 과거사 판결에서 '3년'이라는 새로운 규칙을 창설하고, 통상임금 판결에서 명문의 강행법규를 '무력화'시킨 것은, 사법부가 일반조항을 헤데만이 우려했던 해석의 도구가 아니라 사실상의 '입법적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해당 판례는 대법원 2024. 12. 19. 선고 2023다302838 전원합의체 판결로 변경되면서 폐기되었다. 이는 통상임금은 법적 개념이자 강행적 개념이므로, 원칙적으로 법령의 정의와 취지에 충실하면서도 당사자가 이를 임의로 변경할 수 없도록 해석하여야 한다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당 논문이 2019년에 작성되었음을 고려하면, 당시는 폐기되기 전에 실무에서 적용되던 법리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V. 종합: 개념법학과 일반조항 도피의 근원적 동일성



표면적으로 '개념법학적 사유형태'는 극단적 형식주의로, '일반조항에로의 도피'는 극단적 반형식주의로 나타나 정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영환(2001)은 이 두 현상이 실제로는 '대단히 유사한 속성'을 공유하는, 동일한 문제의 다른 양태일 뿐임을 논증한다.



1. 동일한 역사적 기원: '법의 계수'


두 현상 모두 '서구법의 계수'라는 동일한 역사적 사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상이한 법문화권에서 전래된 서구법을 해석함에 있어, 그 법의 배후에 있는 문화적 맥락과 실질적 법원리를 이해하고 체화하기 어려웠던 한국의 법적용자는 두 가지 극단적 경로 중 하나를 택하게 되었다.


하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들의 법문화보다는 '법체계 자체의 형식논리적인 맥락'에 의존하는 길, 즉 '개념법학'으로의 침잠이다. 다른 하나는, 그 형식논리가 한국의 '생활관계의 차이점'과 충돌하여 부당한 결론을 초래할 때, 번역상의 모호함 등을 빌미로 '법외적인 규범'(일상도덕)으로 우회하는 길, 즉 '일반조항'으로의 도피이다.




2. 동일한 논증구조: '법원리'의 부재


두 방식은 법적 판단을 실질적인 '법원리'에 귀속시키지 못하고, 법 외부의 것에 의존한다는 동일한 논증구조를 갖는다.


이는 김영환이 비판하였듯, 개념법학은 법원리로부터 해석학적 개념을 '차단'시키며, 일반조항의 원용은 법규칙 대신 '개괄적인 윤리기준'을 들이대는 것에서 도출된다.




3. 동일한 기능적 귀결: '통제받지 않는 재량(자의성)'


두 현상의 가장 치명적인 공통점은, 법관에게 '통제받지 않는 재량', 즉 '자의성'을 부여하여 '법의 지배'를 약화시킨다는 기능적 귀결이다.

결국, 김영환이 비판한 '개념법학적 사유'는 헤데만이 경고한 '자의성'의 형식논리적 은폐이며, 김영환이 비판한 '일반조항으로의 도피'는 헤데만이 경고한 '자의성'의 도덕적 은폐이다. 두 방식 모두 법관의 주관적 가치판단을 법적 논증으로 위장하는 은폐사회학Kryptosoziologie에 다름 아니다.


윤철홍이 제시한 '통상임금' 및 '과거사' 판결 은, 김영환이 우려한 이러한 '은폐된' 자의성이 '일반조항'이라는 통로를 통해 한국 법체계의 '강행규정'까지 무력화시키는, 헤데만의 3대 위험(유약화, 불안정성, 자의성)이 총체적으로 발현된 현실태를 입증하고 있다.




VI. 결론: 응용법철학의 과제와 법학방법론의 재정립



한국 법해석학이 개념법학의 경직성과 일반조항의 자의성이라는 양극단을 오가는 이율배반적 현상은, 법원리의 부재와 법관 재량의 통제 실패라는 단일한 뿌리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현실적 병리 현상의 진단과 극복 방안 제시는 추상적 법'철학'이 아닌, 구체적 법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법'철학, 즉 '응용법철학'의 핵심 임무이다.


제시된 세 논문의 논지를 종합할 때, 이러한 방법론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향후 과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법원리'와 '법규칙'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김영환(2001)이 강조하듯이, 개념법학(규칙만 중시)과 일반조항(원리 아닌 도덕 중시)의 한계는 법규칙을 그 배후의 실질적 법원리와 연관 짓지 못하는 데 있다. 법문의 해석과 체계의 준수(법규칙)는 판결의 정당성을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충분조건'은 개별 사태가 지니는 규범적 의미를 '법원리'적으로 구체화시킨 '법적 논거'에 의해 마련된다. 해석학적 개념들은 법원리로부터 분리된 도그마가 아니라, 정당한 판결을 이끌어 내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둘째, 일반조항의 적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그 보충적 지위를 확립해야 한다. 윤철홍이 통렬히 비판하였듯, 신의칙과 같은 일반조항이 강행법규를 무력화하는 '제왕적 조항'으로 기능하는 것은 헤데만이 경고한 '유약화', '불안정성', '자의성'의 위험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일반조항은 법적 판단을 도덕적 판단으로 변질시킬 내재적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에 그 원용은 세분화된 해석학적 규칙(법규칙)이 발견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보충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즉, 일반조항은 법해석의 최후보충적인 원칙ultima ratio으로서의 지위로 엄격히 한정되어야 하며, 통상임금 판결에서처럼 법규칙을 회피하는 '도피'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개념법학적인 사유방식과 일반조항적인 개념의 원용은 모두 '법치국가의 시험대'이다. 이 두 극단을 지양하고, 법원리에 기초하여 법규칙을 해석하며 일반조항의 남용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법의 계수'라는 역사적 과제를 완수하고 진정한 '법의 지배'를 실현하는 한국 법철학 및 법학방법론의 핵심 과제이다




참고문헌(參考文獻)



김영환,《법의 계수의 결과현상들: 개념법학적인 사유형태와 일반조항에로의 도피》, 한국법철학회, 『법철학연구』제4권 제1호, 2001. 5., 149-174면


윤철홍, 《신의성실의 원칙의 적용 영역 확장에 따른 위험성에 관한 소고》, 충남대학교 법학연구소, 『법학연구』 제30권 제1호, 2019. 2., 361-395면


윤철홍, 《헤데만의 일반조항으로 도피의 수용적 고찰》, 숭실대학교 법학연구소, 『법학논총』 제43집, 2019.1., 219-2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