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수 Apr 27. 2024

말 없는 애

그것도 저예요.

나는 말이 없는 편이다. 아마도?


기 때 너무 많이 자서 종종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깨웠다. 잠에서 깨면 울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잘 울지 않던 애기가 커서 툭하면 우는 어른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고 한다.


다섯 살이 되어서는 학원을 마치면 항상 바쁜 엄마 아빠를 대신해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다녔다. 가끔 할아버지는 공사장에 단기로 일을 하셨는데, 그때 종종 공사판에 따라가서 귀여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말이 없었던지라 모르는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이 계속해서 말을 붙였는데 끝까지 대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어린 아이라 귀여웠는지 거북알 아이스크림을 사주셔서 얻어먹었다. 그때의 기억이 좋았는지 여전히 거북알 아이스크림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이 남아 있다.

할아버지가 바쁠 할머니를 따라 경로당에 가기도 했다. 할머니는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다. 그래서 경로당에 가서도 조용했다. 항상 나와 할머니는 같은 자세로 조용하게 앉아 있다 경로당을 빠져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경로당에 왜 가야만 했는지 더더욱 알 수 없다.

할머니는 종종 부업으로 정구지('부추'의 방언)를 다듬으로 가기도 했다. 그때도 나는 따라다녔는데 같이 다듬을 생각은 안 하고 옆에서 지켜만 봤다. 다들 할머니를 '밀양 띠기(밀양댁)'라고 불렀다. 왜 예쁜 할머니 이름을 두고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다른 할머니들 이름도 그러했다. '경산 띠기' '양산 띠기' 등등.


스무 살이 되어서 말이 트여가기 시작했다. 왜냐면 대학교에 와서 아싸는 되긴 싫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때 친구 정과 손, 전 등등을 만났고. 몇몇은 지금도 소울메이트로 잘 지내고 있다. 특히 손과 나는 극 I였는데 극 E인 정을 만나 조금씩 자신감을 갖고 나아가게 되었다.

뭣보다 손이 굉장히 키가 크고 포스가 있는 남자아이였다. 그래서 깨갱하는 남자 선배들도 꽤 있었다. 정은 자신감이 넘치고 말을 잘해서 항상 든든한 여자 아이였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누구도 무섭지 않았다. 그들에게 배운 것들이 굉장히 많다. 신문물을 나에게 많이 알려준 친구들이다. 그리고 덕분에 밝아진 것 같다. 스무 살 인생에서 그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에 잠길 때도 많다. 내 스무 살은 온통 그들이었다.


지금 '말이 없는 애'라고 하면 여러 친구들에게 질타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낯을 가리는 것도 사실이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못 건네는 성격도 맞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됨을 아주 고맙게 생각한다.


공사판에서도 경로당에서도 조용하던 아이는 잘 자란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큰일 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