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후인-뱃푸-기타큐슈-후쿠오카
일본 자유여행이 가능하다는 공지가 뜬 날, 바로 후쿠오카행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그즈음엔 회사 일로 바쁜 시기라 11월 말 일정으로 잡아놓은 여행. 한 달이 남았을 때부터 드릉드릉 여행 시동 걸 차비를 해놓고 날을 기다렸다.
그래놓고 보니 그동안 무언가를 향한 별난 재미가 없어 술을 많이 마셔왔단 생각이 들었다. 22년은 내 평생 가장 많은 술자리에 갔던 해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유후인은 3년 전 반나절쯤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벳푸에서 유후인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본 풍경이 너무 좋아 늘 다시 한번 가리라 마음에 품어왔던 곳.
한눈에 반해 골라둔 숙소는 직접 보아도 마음에 쏙 들었다. 짐을 놓고 나와 간식거리를 사 먹고 킨린호수까지 한 바퀴를 도는 동안 평화로운 동네 분위기에 몸과 정신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동네 슈퍼에서 장을 본 뒤 숙소에 들어가 간단한 요리를 해 먹고 숙소 노천탕에 몸을 담그니 행복감은 더 커졌다. 일본은 공기가 여전히 참 깨끗하다. 20년 전까진 한국도 이랬었는데, 이젠 대기질 수치를 확인하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리다니!
벳푸로 가는 버스에서 보는 풍경은 역시나 특별했다. 버스창을 통해 혼을 풀어가며 구경을 하다가 충동적으로 로프웨이 앞에 내려 케이블카를 타고 츠루미산에 올랐다. 큰 구름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해안가의 동네를 덮었다가 드러내주는 걸 보고 느낀 그때의 시간은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벳푸에 도착하니 날이 따뜻해서 11월이지만 반소매 티셔츠만 입어도 충분할 온도였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와 온천 동네 구경을 하고, 미소를 번지게 만들어주는 푸딩을 먹고, 해안가 산책을 한 뒤, 입에 착착 감기는 음식을 내어주는 이자카야에서 엄지가 절로 치켜지는 식사를 했다. 벳푸 타워가 수리 중이어서 라이트업을 하지 않은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여행 셋째 날, 한 명이 더 이번 여행에 합류하기로 한날. 세 명이 된 우리는 이번 여행의 메인 지역인 기타큐슈 고쿠라로 향했다. 고쿠라에 예약해 둔 숙소 관리인은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연세 지긋한 분이셨는데, 역까지 픽업을 나와주시고 이곳저곳에 대한 소개와 설명을 해주시는 등 이모저모 도움을 많이 주셨다. 숙소는 역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조용하고 깔끔한 동네였는데, 한국에도 존재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버린 ‘중산층’ 거주지역이었다. 3일간 지내며 이 동네에 반해버린 나는 나중에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기타큐슈에서 들른 고쿠라, 모지코, 시모노세키는 여러모로 딱 적당한 지역이었다. 사람이 많지 않지만 인프라가 충분하고 바다 인근 지역이자 흥미로운 시간이 담겨있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퍼펙트.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 가라토시장 구경을 하고 숙소 관리인께서 추천해 주신 해저터널을 통해 모지코로 돌아와 기타큐슈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했다. 다음날 오후 비행기로 한국에 와야 하므로 남은 24시간은 후쿠오카 시내에서 보내기로 했다. 후쿠오카에 오니 역시나 사람이 많고 많아 무뎌졌던 정신의 날이 바싹 세워졌다.
후쿠오카에서 안 먹고 오면 서운한 모츠나베를 먹고 쇼핑을 한 뒤, 숙소 앞 이자카야에 들러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나니 자정이 넘어가있었다. 몇 시간 안 잤지만 동네 킷사텐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기에 부지런을 떨며 나와 좋아하는 킷사텐 식사를 끝으로 규슈에서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규슈 여행을 마치고 나니 23년에 대한 불안감이 습격해 오기 시작했다. 연말연시에는 워낙 평소에 비해 머릿속이 시끄럽긴 하지만, 23년은 내 의지와 달리 정해져 있는 큰 변화가 기다리고 있는 해이기에 더욱 유난스러운 것 같다. 어차피 정해져 있는 것, 이 불안함을 굳이 앓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뒤 바로 1월 1일에 출국하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22년 연간 누적된 대휴가 꽤나 있었고 1월 첫 주는 나와 같은 대휴 소진 촉진을 위해 시무식을 한주 미뤄 진행한다고 했으니 마침 딱 이었다. 12월 마지막주에 열일을 해놔야 가능할 일정이었는데 못할 것도 없었다.
3 주남은 여행을 하나 잡아놓자마자 앓을 뻔했던 불안감이 누그러들었고, 앞둔 여행에 대한 기대가 그 자리를 메워주게 되었다. 나는 또 이렇게 날나리같이 22년과 헤어지고 있었다. 인생, 뭐 있나.
행복보다 즐거움을 쫓기로 결심한 한 해의 마무리로 딱이지 않은가!
행복보다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