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본여행 사진을 뒤척거리며
일본행 LCC가 늘어나며 도쿄를 포함 일본 대도시에는 흥미가 그다지 없던 나에게 새로운 재미가 생겼다. 주말 포함 연속 3-4일을 쉴 수 있는 상황이 되고 별다른 일이 없다면 주저 않고 일본의 소도시행을 택했었다. 물론, 2019년 이전까지.
십오 년 전, 도쿄에 살고 있던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처음 일본 여행을 갔던 때 그 혼잡함에 놀란 이후 십 년이 흐르도록 일본으로 향한 적은 없었다. 6년 전 회사 일에 몹시 지쳤던 봄날, 3일간 휴일을 만들 수 있어서 급작스레 다카마쓰행에 올랐다가 일본의 소도시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이름조차 생소했던 다카마쓰를 고른 이유는 당연히 나오시마 때문이었다. 안도 다다오의 베네세하우스 뮤지엄 하나만 바라보고 도착한 다카마쓰의 시내는 소박했다. 우동의 도시답게 우동가게가 블록마다 자리 잡고 있었고, 큰 도시에 비해 확실히 윤기가 적어 보이는 사람들이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호텔까지 이동하며 그 분위기에 이미 취하기 시작했다.
다카마쓰항에서 배를 타고 도착한 나오시마, 베네세하우스 근처에서 내려 잠시 사람 만나기 힘든 산책로를 걷고, 뮤지엄에 들어가 구경을 마치고 나오니 서울에서 들어차 혼란함 그 자체였던 머릿속이 벌써 반쯤 씻겨나간 기분이었다. 흐린 날 늘어져있는 길고양이들과 함께 바닷가 한켠 벤치에서 날씨를 이불 삼아 20분 정도 낮잠도 잤다.
이후 일 년에 두세 번씩은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이름도 모르던 일본의 작은 도시들을 다니며 작은 온천의 따뜻함, 깨끗함이 보장되는 한가로움, 소박하지만 정갈한 상점가, 작은 가게에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마시는 하이볼과 맥주, 공항 면세점이라 부르기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공간, 수줍음 많은 사람들 등 여타 여행지에선 즐기기 힘든 재미들을 하나하나 경험했다.
컨디션 좋은 날이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넘어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경차 하나를 렌트하면 타임머신 없이도 과거로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얼마든지 있었다. 국내와 다른 점을 꼽아보자면, 한눈에 보이는 자그마한 시골 동네라도 생활 전반에 필요한 상점들이 깔끔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젊은 사람들도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주로 호텔을 선호하지만, 에어비앤비를 이용하여 오래된 목조주택에서 묵어보기도 했는데 그때의 경험도 무척 즐거웠다. 사람이 움직이면 ‘끼그덕’ 거리며 함께 움직이듯 나무소리가 났고, 서양 욕조와 달리 좁고 깊은 일본식 욕조가 있는 욕실엔 밖이 훤히 보이는 창이 나있었다. 실내에 있는 문은 모두 미닫이, ‘다가다가’하고 열리는 화장실 문을 열자 손바닥 한쪽이면 꽉 찰 사이즈의 세면대 옆에 야시시한 색의 꽃 한 송이가 꽂힌 화병이 놓여있었다. 손님을 위한 집주인의 취향 묻은 배려가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
후쿠오카와 기타큐슈 중간쯤 작은 시골 마을에 있던 집에서 골목 두 개쯤만 지나면 마트가 있었다. 도시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정겨운 마트에 들러 먹거리를 사고, 코타츠에 앉아 저녁을 먹던 밤은 유독 바람이 심하고 추운 날이었다. 바람을 맞는 집은 계속해서 ‘끼그덕’ 소리를 냈는데, 처음엔 선명하던 그 소리가 스르르 익숙해져 버렸는지 어느샌가 거슬리지 않았다. 천정이 낮은 주방에서 고기를 굽느라 키 큰 일행이 고생을 좀 했지만, 입속에서 샤르르 번진 육즙과 육향이 너무나 근사해서 이후 소고기를 먹을 때마다 그날의 고기 맛이 생각나곤 했다.
별것 없는 일본 여행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하는 것은, 사실 요즘 강렬하게 오타루에 가고 싶기 때문이다.
오타루에 대한 기억은 https://brunch.co.kr/@halee204/9 에 짧게나마 적어둔 적 있는데, 오타루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귓가에서 부서지던 바람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금방 다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답답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선선함이 좋을 계절에 다시 한번 이 길을 따라 걸으며 물 냄새 섞인 바람을 쏘이다가 버터향이 묻어오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 베이커리 문을 제치고 들어가 파삭한 빵을 한가득 사서 나오고 싶다.
귀를 통해 스민 기억을 붙잡고
오늘을 화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