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회색 회의실 뒤 숨어 있는 도시의 색
“출장이란 도시를 정말 제대로 본다는 착각을 남긴다.” 오래전 선배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나는 회색 회의실의 답답한 공기, 하얀 조명 아래 표정 없는 회의, 번역기와 파워포인트에 갇힌 시간 속에서 가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라는 허탈함을 느낀다. 어느 날, 그 감정을 달래려 회의실 복도를 나와 대로변을 걷었다. 그 순간 내가 만난 것은, 회의록 어디에도 담기지 않은 도시의 진짜 색이었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항저우, 선전, 이우... 도시의 이름만 들어도 뚜렷한 색채가 떠오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출장자의 하루는 대부분 회색에 가깝다. 이른 아침,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흐린 하늘과 먼지 낀 유리창, 교통 체증에 묻힌 도로, 도착한 회의실의 차가운 조명. 회색 벽, 회색 책상, 회색 정장들. 도시의 진짜 색이란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 늘 손에 잡힐 듯 멀다.
첫 미팅이 끝나고,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다음 회의. 슬라이드의 숫자와 그래프, 빠르게 오가는 음성 통역, 고개만 끄덕이는 참석자들. 이따금 창밖을 보고 싶지만, 블라인드가 내려온 회의실에선 빛의 온기조차 닿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회색’의 하루를 보낸다.
그런 회색의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일부러 회의가 끝나면 도로 위로, 골목으로, 사람들 사이로 들어서곤 한다. 진짜 도시의 색은 ‘명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하이 푸동의 야경이 금빛으로 번져갈 때, 반쯤 비친 유리벽 너머 내 얼굴에도 그 도시의 색이 번진다. 회색 정장의 주름 사이사이로, 외부의 불빛과 간판, 행인들의 옷, 거리 벽화의 빨강과 시장의 푸른 모자이크 타일이 스며든다.
베이징의 해 질 녘, 붉은 자금성 담장이 석양에 물드는 풍경. 나는 그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아닌, 붉은색과 금색, 회색 그림자가 뒤섞인 거대한 캔버스로 가득 채워졌다.
광저우에선 새벽 시장 아주머니의 파란 앞치마, 손수 빨아 널은 형광색 티셔츠, 켜켜이 쌓인 과일 상자의 노란빛에 둘러싸였다. 출장자는 잠시 공공연한 외부인으로 남지만, 그 색채 사이로 스며들며 어느새 도시의 일부가 되어있다.
나는 출장 때마다, 도시의 진짜 색을 찾기 위해 일부러 카메라를 들고 걷는다. 회의실을 나와 골목길을 맴돌며 시간의 빛깔을 채집한다. 하늘의 변화, 시장의 소란, 건물 외벽에 비친 그림자와 저녁 어스름까지, 모든 것이 다채로운 색으로 다가온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 오래된 카페의 초록 잎사귀 뚜껑 틈새로 내리쬐는 햇살, 퇴근길 지하철 역의 붉은 벽돌, 자전거 주차장의 메탈릭 오렌지. 출장 일지가 아니라 색채 기록장이 될 때, 나는 비로소 이 도시, 이 순간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한 번은 베이징 798 예술구 골목에서 노란 페인트 벽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예술가들의 낙서, 벽에 붙은 광고지, 선택적으로 뜯겨진 스티커들까지도 도시의 레이어, 시대의 흔적, 나만의 색으로 해석됐다. 회의실에서 반복한 무채색 그래프를 지우고 그 위에 진짜 ‘이야기’의 색을 덧입히는 순간이었다.
도시의 색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니다. 붉은색의 고궁 앞 벽은 경외심을, 푸른 시장 천막은 활기와 신뢰를, 밤하늘을 가르는 네온은 도시의 열정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회의실에서만 머무르면 이 감정들이 사라진다. 현지인들과 합석한 저녁 식탁 위에도, 푸른 물병, 분홍 접시, 녹색 찻잔, 손님맞이의 밝은 목소리, 모두가 일상에 스며든 도시의 색이다.
나는 오히려, 똑같은 회색의 옷차림으로 출장길을 나서지만, 매일 다른 컬러의 기억을 쌓아간다. 협상에 지고 돌아오는 밤, 거리를 물든 적색 등이 내 피로를 씻어주고, 뜻밖의 제안이 성사된 날엔 금빛 노을이 한껏 내 기분을 높인다. 도시의 색은, 내가 실패와 성공을 모두 긍정할 수 있게 만드는 치유의 코드이기도 하다.
출장자는 의무와 책임으로 도시를 걷고, 여행자는 감정과 호기심으로 도시를 걷는다. 하지만 내게 출장과 여행의 경계는 희미하다. 회의실에서 받은 인상만으로 이 도시를 단정 짓지 않으려, 나는 퇴근 후 일부러 시장을 돌고, 지하철 종착역까지 멀리 가보기도 한다.
도시의 이면, 다양한 색채의 층위를 만나면서 내 안에도 변화가 생겼다. 실패로 끝난 미팅 뒤, 우연히 만난 길거리 예술가의 공연 속 노란 조명 아래, 완전히 새로운 용기를 얻었던 경험.
회의실 밖에서 만난 도시의 색은 내 소진된 열정을 되살리고, 불안정한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도시마다 고유의 색채가 있다.
베이징은 붉은색과 금색, 넓은 스케일 속의 황갈색 황사, 단단함과 중후함의 색.
상하이는 회색과 은색, 새벽의 블루그레이, 네온의 스카이블루, 금융도시의 세련됨.
광저우는 떠들썩한 오렌지와 노랑, 각기 다른 삶의 자유로움이 겹쳐진 색.
항저우는 연둣빛, 연못 위 안개처럼 흐르는 수채화의 녹(綠), 조용히 번지는 담청색의 여유.
그 색을 온몸으로 느끼고 체화하는 순간, 출장의 불확실성도, 비즈니스의 긴장도 한결 견딜만해진다. 회의실의 회색이 아닌 도시의 실제 색이 나를 감싸주는 위로가 된다.
내 경험상, 도시는 색으로 읽다가 비즈니스에서도 창의성이 터졌다. 반복되는 회의, 뻔한 질문과 답변의 악순환. 그러다 우연히 본 벽화, 뜻밖의 컬러 배색에서 새로운 제품 콘셉트를 떠올린 적이 있다.
항저우의 연둣빛과 분홍빛이 섞인 찻집 내부, 그 색 배합을 두고 이야기하다가 파트너와 깊은 공감대를 쌓게 됐다. 감정이 해제되는 순간, 섬세하고 인간적인 대화가 가능해지고, 그게 결국 계약의 성패를 좌우했다.
매번 중국 출장길에 메모장 한쪽에 이런 글귀를 남긴다.
‘오늘의 도시 색깔은? 오늘 내 기분과 닮은 색은?’
출장 성과보다 의미 있는 답을 찾는 날이 있다. 회색이라면 그래도 거짓이 없었다는 반증이고, 분홍이나 초록이 섞인 날엔 내 내면에도 작은 변혁이 있었던 것이다.
노트에 붙인 시장의 전단지, 슬쩍 떼온 호텔 와인라벨, 카페 메뉴판의 컬러프린트, 길에서 찍은 벽화 사진.
이런 사소한 기록들이 쌓이면, 출장이 아닌 새로운 삶의 컬러팔레트가 완성된다.
비즈니스란 늘 예측 가능한 영역에서 승부해야 할 것 같지만, 도시의 색은 예고 없이 내 일상을 파고든다. 생각해 보면, 나는 매일 회의실의 회색을 벗어나 또 다른 도시의 색을 찾아 걷는다.
그 여정에서 마주친 수없이 많은 컬러—푸른 새벽샷, 빨간 강변 노을, 검정 비 오는 밤의 거리, 은빛 야경, 다채로운 시장의 소음—모두가 내 삶의 색이 되고, 내 비즈니스를 움직이는 원천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회색 회의실을 빠져나와, 도심의 카페 창가, 후통의 벽화 앞, 리강 공원의 연둣빛 벤치에 앉는다. 도시의 색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회색만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수천 겹의 컬러, 그 사이를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출장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자주 반복 같은 하루를 살지만, 그 반복 사이사이 스며드는 색에 주목할 때, 비로소 업무도, 인생도, 한층 더 성장한다.
흑백의 업무 보고서, 채워지지 않는 성과표, 피곤에 찌든 표정들—그 한가운데에서 도시가 던져주는 색의 힌트를 놓치지 않는다면, 내일도 내 비즈니스와 삶에는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내 출장 기록의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무채색 회의실 뒤에서 만난 그 도시의 색. 그 색에 물들어, 내 인생도 한 뼘 더 넓어졌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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