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배려해줘요.
그럼 난 사랑받는 느낌일 테니..
그때 나도 잘해줄게요.
내가 배려해 줄게요.
그럼 난 괜찮은 사람이겠죠.
그러니 나에게 더 잘해주세요.
“자, 이번 주부터 방과 후에 역사 공부 좀 할까? 선생님과 함께하면 재밌게 할 수 있을 거야. 5학년 올라가기 전에 해두면 좋지. 안 그래?”
“네. 좋아요.”
“선생님은 너희를 이렇게 배려한다. 그치? 그러니 선생님 말 좀 잘 들어. 알겠냐?”
난 내 배려를 미끼로 삼아 아이들의 충성을 약속받았다.
학교 동료 선생님께서 나눠 먹자고 들고 온 떡을 2조각 받았었다. 오후 시간 매번 찾아오는 허기에도 난 그 떡을 손대지 않고 집으로 들고 와 아이들에게 내밀었다.
“엄마가 안 먹고 들고 온 거야. 딱 2조각이네. 저녁 간식으로 하나씩 먹으면 되겠다.”
God의 ‘엄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를 부르며, 신랑은 나를 타박한다.
“그냥 너 먹지. 그걸 들고 오냐?”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너희를 얼마나 배려하는지 알겠지? 그러니까 말 잘 들어. 응?”
난 내 배려를 근거로 아이들의 복종을 내세웠다.
신랑에게 항상 말하는 게 있다.
“날 배려해줘.”
신랑은 억울해한다.
“배려하고 있잖아.”
나는 반론을 제기한다.
“그건 내가 원하는 배려가 아니었으니 배려가 아니야.”
신랑은 항소한다.
“다 너한테 잘해주려고 한 거니까 그냥 배려라고 해주면 안 돼?”
나는 혼자서 대화를 마무리한다.
“안돼. 내가 원하는 배려를 해줘. 그럼 나 잘해줄게.”
난 상대방의 배려를 걸고 내 배려를 약속했다.
남을 배려하는 이유가 뭘까?
적어도 내가 하는 배려는 대부분 나를 위해서였다.
사랑받으려고
아침에 가족들이 입을 옷가지를 일일이 꺼내 두었고,
착한 사람이 되려고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주었다.
마음 편해지려고
남 일도 함께 해 주었고,
편히 살려고
아이들에게 잘해준 것이다.
그렇다면, 남에게 배려를 받는 이유는 뭘까?
사랑받는 느낌 때문에
내 가벼운 가방도 들어주길 바랐고,
내가 좋은 사람임을 느낄 수 있도록
조금의 칭찬도 필요했다.
내 편안한 삶을 위해
학교나 아이들의 성실함을 원했다.
내가 하는 배려에는 분명 사랑이 담겨 있다.
내가 받는 배려에도 진정한 사랑이 담기길 원했다.
하지만 지극하게 내 배려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이었다.
이건 진짜 변명할 수 없는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