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의 터널 한가운데서 오랜만에 ‘그놈’을 만난 이후 약 두 달 남짓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간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 같은 그놈을 셀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매일 만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챙겨 먹고 있던 약을 간헐적으로 먹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지금껏 잘 챙겨 먹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놈은 왔기 때문에 약을 복용하는 것도 회의가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운동도 접었다. 이제는 운동을 하면서도 그놈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만나지 않은 날을 세는 것이 빠를 정도다. 그러다 보니 직장생활도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이런 식으로 생활을 한다면 모두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라는 생각에 12년 다니고 있던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놈을 피해 바르고 건강하게 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봐야 어차피 그놈은 언제든 나에게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버려 더 이상 노력을 하기 싫다. 매일매일 ‘그놈이 또 오면 어쩌지?’라는 고민과 걱정을 했으며 그 걱정은 두려움을 낳았고 이 두려움은 다시 공포로 변해 그놈을 만나는 일상이 반복된다. 샤워를 하다가도 왔으며 밥을 먹으면서도 왔다. 거래처와 1대 1 회의를 하던 중에도 심지어 변기에 앉아 있는 시간에도 쉴 새 없이 왔다. 지난 3개월 동안 나오지 못하도록 억지로 눌러왔던 그놈이 이번 기회로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쉴 새 없이 나에게 왔다. 사는 게 무의미 해지고 몸도 마음도 계속 약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지 공감이 된다. 휴대폰으로 ‘자살’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검색했지만 무서워서 내용은 읽지 못했다. 그놈과 함께 내 하나의 몸뚱이를 공유하고 있는 기분이다.
일시적이기는 했지만 술을 많이 마셔 취하면 생각이 분산되어 그놈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술이 깬 다음 날이 문제다. 술 때문에 어제 오지 못했으니 마치 적금에 이자까지 붙여져 그놈을 만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는 날이 늘어갔다. 술을 마시면 비록 내일 그놈을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내일을 걱정할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직장이 있으니 당장은 일을 해야 한다. 이번 주는 본사에서 손님 2명이 온다. 우리 회사의 대리점 담당자와 나 그리고 외국 손님 두 명, 총 4명이서 함께 3일간 국내 거래처를 방문할계획이다. 오히려 해외에서 손님이 와서 어쩔 수 없이 하루 종일 동행하는 날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여러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놈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거래처 방문에는 대리점 담당자가 운전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통역만 담당하면 된다. 이번에 함께 할 세 명은 모두 익숙한 사람이지만 내가 공황장애가 심해져 고생하고 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모른다. 당연하다 내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상대가 알리 없다. 오히려 이들은 코미디언 시험을 3차례나 치른 경험이 있는 나를 무척이나 재밌고 유쾌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잘 짜인 스케줄대로 하루하루 거래처 방문과 미팅을 마치면 대리점 담당자와 나는 손님들을 호텔까지 배웅하고 다음 날 다시 픽업하여 또 거래처 방문을 하는 일정이다. 별다른 이슈 없이 계획대로 수, 목, 금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손님들을 김포공항까지 배웅했다. 현재 시간은 금요일 오후 5시 정도다. 나도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지하철, 공항리무진, 택시 세 가지의 교통수단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대리점 담당자가 나를 좀 집에까지 바래다줬으면 한다. 세 가지 교통수단 모두가 지금 나에게는 탐탁지 않기 때문이다. 지하철은 두 번 환승해야 하는데 곧 퇴근시간이며 사람들이 꽉 차 있을 생각을 하니 겁이 난다. 버스는 내부에서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으니 고역이다. 택시는 비용이 가장 비싸지만 비용보다는 금요일 퇴근 시간 러시아워의 꽉 막힌 도로 한 중간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대리점 담당자의 차를 타고 간다고 해도 택시와 같은 조건이지만 최소한 이 사람은 나와 오래 봐왔던 익숙한 사람이니 혹시 증상이 온다고 해도 덜 할 것이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집은 나와 정 반대다. 그때 ‘이과장님은 어떻게 집에 가실 건가요?’라고 묻는다. 당연하겠지만 ‘미안한데 저희 집까지 부탁 좀 해도 될까요?’라고 말해보려던 생각이 사라졌다. 이때 차라리 사정을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고민 중이네요. 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지.’라고 대답하는 순간 우리 집 바로 앞까지 가는 공항리무진 버스가 정차한다. 국제선 청사에 승객을 내려주고 다시 돌아가는 버스다. 무엇에 홀렸는지 지금까지 무엇을 타고 돌아갈까 고민했던 것을 잊고 서둘러 대리점 담당자에게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이 큰 버스에 나와 서너 명의 승객밖에 없다. 마음이 편하다. 생각 없이 버스를 타길 잘했다. 자리가 많이 있었지만 나는 운전사의 바로 뒤에 앉았다. 버스의 넓은 창문을 통해 바깥 상황이 잘 파악되는 자리에 앉아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버스는 국내선 승강장으로 이동한다. 급하게 타느라 다음 정류장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집으로 바로 가는 리무진 버스라고 착각한 것이다. 국내선 승강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순간 ‘버스에서 내릴까?’라는 고민을 했다. 이때 내렸어야 했다.
사람들이 서서히 우리 버스에 올라타나 싶더니 이내 버스가 만석이 된다. 내 옆에도 한 여성이 앉는다. 만석의 버스가 될 것을 알았다면 차라리 혼자 앉을 수 있는 좌석에 앉았어야 했다. 아직 김포공항을 벗어나지도 않은 버스에서 이미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놈의 심장이 또 나대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자동차 전용도로에 진입하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내리고 싶다. 망설이는 사이에 버스는 전용도로에 진입한다. 금요일 퇴근시간 너무 혼잡하니 고속도로로 우회하여 간다는 안내가 나온다. 큰일이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면 이놈이 더욱 확실하게 올 같았기 때문이다.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여 이내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버스와 달리 내 심장 박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당장 버스 밖으로 나가야 살 것 같다. 하지만 난 지금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고속도로 한 중간에 그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버스 안이다. 나의 왼쪽, 오른쪽, 앞, 뒤에 모두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이다. 지금은 괜찮다고 나를 다독여 가며 내 팔과 목을 주물러 줄 수 있는아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아무도 나를 모른다. 의자를 바로 세워 앉았다. 이내 불편하고 답답하여 숨이 막힌다. 소리를 크게 지르고 싶다. 몸을 자꾸만 뒤척여본다. 조용한 실내에서 나의 뒤척이는 소리만 들린다. 차라리 버스 내부가 시끌시끌했으면좋겠다. 오늘따라 버스는 너무 고요하다. 약을 먹어야겠다. 약을 먹으면 보통 20분 후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20분이 그놈을 마주하는 최대의 고역인 것이다. 약을 꺼냈다. 하지만 물이 없다. 좀 전에 대리점 담당자의 차에 먹던 물을 그대로 두고 왔다. 몸을 틀어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물을 찾는 행위이다. 지금 나는 다른 사람에게 물이 있다면 아무 말도 없이 확 낚아채서 미친놈처럼 마실수 있다. 물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물 있으세요? 급하게 약을 먹어야 해서..”라고 옆에 앉아 있던 아가씨에게 대뜸 물었다. 당황했을 것이다. 아쉽지만 물은 없다고 한다. 운전하던 버스 기사에게 물었지만 없다고 한다. 본인이 먹던 것 밖에 없다고 해도 먹을 수 있었지만 그조차도 없다. 이런 공황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시도했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실망감과 함께 증상이 최고조에 달했다. 크게 소지를 지르면 조금이나마 괜찮을 것 같지만 주변은 너무 조용하다.
“기사님, 죄송한데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그러니 차 좀 세워주세요.”라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차를 세울 수 없다고 한다. 더구나 다른 승객들도 있으니 정차는 더욱더 안된다고 한다.
“아무 데든 세워주시고 기다리지 않고 가셔도 됩니다.”라고 말하자 상황의 심각함을 느꼈는지 곧 나올 졸음쉼터에 세워주겠다고 한다. 약 2킬로 미터 가량 남은 졸음쉼터까지 나는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 가며 겨우 도착했다. 버스가 정차하자마자 곧바로 뛰어나갔다. 바깥공기가 느껴지는 순간 살았다는 안도감이 든다. 버스 기사가 “진짜로 그냥 가도 되는 거예요?”라고 묻는다. 그렇게 버스는 가고 난 고속도로 한 복판에 차도 없이 혼자 서 있다.
조그만 푸드트럭이 보인다. 여기에서 음료 하나를 사서 서둘러 약을 먹었다. 반갑게 벤치도 있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주행도로와 가까운 작은 쉼터다. 집에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이다. 고작 버스 하나도 타지 못하는 내가 처량하다. 울컥해지면서 짜증 섞인 눈물이 난다. ‘이런 반쪽짜리 인간이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스스로에 대한 질타이다.
택시를 호출하는 어플을 켜본다. 근처에 가능한 차량이 없다고 한다. 훨씬 비싼 옵션을 선택해 본다. 집에까지 예상 금액이 15만 원가량 하는 차량이지만 가능한 차량이 없다고 한다. 얼마든 좋으니 나 좀 집에 데려다줬으면 좋겠다. 혹시 몰라 이 근처를 지나가는 동료들이 있을까 싶어 하나씩 연락해본다. 하지만 대부분 사무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 빠져나오는 것은 역시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존재한다. 아.. 김포공항에서 그냥 택시를 탔어야 했다. 그러는 사이 벌써 어두워졌다. 간혹 빨간색 광역버스가 지나간다. 가만 보니 멀리에 고속도로 정류소가 있는 것이 보인다. 저걸 타면 우선은 가까운 IC를 통해 일반도로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것도 버스다. 방금 전까지 죽도록 무서워서 내렸던 버스다. 그래도 약도 먹었고 진정됐으니 타야 겠다. 운 좋게도 내가 탄 버스는 가장 가까운 IC를 통해 일반 도로로 나가는 버스였다. 공항리무진보다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다. 하지만 심장은 다시 두근대기 시작했고 또 그놈이 올 것을 직감했다. 다행이 그놈이 다시 오기 전에 버스는 정류장에 정차했다. 어딘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난 바로 내렸다. 한적한 시골길 같다. 다른 사람이 보면 버스를 타고 내리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지만 나만 혼자 치밀하게 계산하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싸움을 하고 있다. 버스 정류장에 그대로 앉아 택시를 호출했다. 다행히 곧 택시는 도착했다.
다음 주에는 어머니의 환갑 기념으로 식구들이 9박 10일 일정으로 미국 서부 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다. 누나, 나, 여동생 셋이 약 5년 동안 매월 얼마씩 적금을 부어 야심 차게 계획한 가족 여행이다. 하지만 공황장애 증상이 점점 심해지면서 이 여행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7명의 식구들이 시간을 맞춰 열흘이라는 시간을 서로 어렵게 조절했고 각종 예약들도 모두 마무리가 된 시점에서 나 혼자만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이번 여행은 빠지고 싶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