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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mpunyee Feb 12. 2021

행복한 상상(공황장애와 결혼#15)

높은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면 나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금문교 방문을 시작으로 서부 여행이 시작됐다. 미국은 모든 것이 큰 것 같다. 산도 크고 나무도 크다. 사람들도 크게 느껴진다. 할리우드 영화의 배경화면으로 익숙한 곳들이지만 실제로 와보니 감회가 새롭다. 뉴스나 액션 영화의 영향일지 모르지만 미국이라고 하면 왠지 길거리 아무 곳에서나 총격전을 하고 자동차 추격전이 난무할 것 같은 인상을 가졌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진다. 머릿속으로는 공황장애의 증상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 걱정되긴 했지만 확실히 지금은 걱정보다는 여행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가 가장 크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햇살, 한국의 초봄과 같은 날씨에 모든 주변 경관이 시원시원하게 뚫린 여기에 있으니 내가 공황장애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 막연하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도 확실히 비슷한 경험을 했다. 풍광 좋은 골프장에서 종종 지인들과 라운딩을 하는 약 5시간 동안은 한 번도 그놈을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왜 그놈이 오지 않지?’라고 의아해했을 정도다. 다만 골프장까지 차로 홀로 이동하는 시간이 고역이었다. 대낮이지만 도심을 빠져나가는 동안 간혹 정체가 되어 꽉 막힌 도로의 한 중간에 있으면 어김없이 그놈이 온다. 그러면 나는 약을 먹고 졸음쉼터나 혹은 최대한 안전할 것 같은 곳에 주차를 하고 약 20~30분 후에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후 다시 출발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그놈이 와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약속시간에 갈 때에는 훨씬 미리 출발하는 습관이 생겼다. 예를 들어 목적지까지 두 시간이 걸린다면 보통 그 두 배인 네 시간 전에 출발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간혹 그놈이 오지 않을 경우에는 남들보다 훨씬 빨리 약속 장소에 도착하곤 한다. 미국 서부의 이런 대자연 속에 있는 아직까지는 그놈이 한 번도 나에게 오지 않았다. 왠지 미국이 좋다.

 

공황장애에서 잠시 벗어났다는 생각을 하니 어제 버스에서 봤던 눈이 크고 인상이 좋았던 여자가 계속 생각난다. 먼저 어제 그녀의 뒤에 따라오던 남자와 그녀가 어떤 관계인지 알아내고 싶다. 하지만 이 알아내는 과정이 자칫 여자에게 집적대는 모습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해야 다. 더구나 식구들과 함께 온 여행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니 최대한 조심스럽고 티가 나지 않도록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지금껏 언제 어디서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날지 몰라 모든 게 조심스럽고 위축되어 있던 내 몸속으로 오랜만에 20대의 젊은 기운이 훅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살아 있는 느낌이다.


오늘 저녁은 샌프란시스코의 한국 식당에서 한식이 준비된 모양이다. 식당은 한국 식당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새하얗고 예쁜 서양식 단층 목조 건물이다. 약 50여 명 정도가 테이블과 일행의 구분 없이 섞여 된장찌개, 잡채 등등 한국식 저녁을 시작한다. 부산스럽게 식사를 하면서도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둘러본다. 내 테이블의 대각선 테이블에 있다. 어제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먼저 나서서 주변 어른들에게 음식을  덜어주는 모습이며 사람들에게 살갑게 웃으며 대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옆의 남자가 거슬리고 맘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어느덧 여행의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그랜드캐니언을 눈 앞에서 직접 봤을 때의 그 웅장함은 도저히 잊을 수 없다. 이런 거대한 협곡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높이 올라가야 모든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협곡이 남한 전체보다 크다고 가이드가 말하는 것을 얼핏 들었다. 프로펠러를 동력으로 하는 경비행기를 타는 코스가 있다. 비행기를 타는 것이 좀 거북했지만 이 광경은 눈으로 꼭 담고 싶다. 하늘에 올라 둘러본 그랜드캐니언은 역시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다. 하늘에서는 그 끝이 보일까 했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협곡만 보인다.


문득 이런 거대한 대자연 속에 ‘나’라는 존재가 보잘것없는 미물처럼 느껴진다. 높은 하늘에서 땅에 있는 나를 보면 작은 점으로 보이거나 점보다 작아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작은 점과 같은 존재가 그 점보다 더 작은 조그만 머리로 뭔가를 수없이 고민하고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있는 지금의 나를 대입하여 생각하니 부질없고 공허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혹시 인생에서 뭔가를 깨우쳐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깨우친 그 무엇인가가 어쩌면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희열이 느껴진다.


‘그래, 저 높은 하늘 위에서 나를 보면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내가 뭘 그리 고민하고 걱정하고 살까? 맘 편히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거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내 대각선 자리에 그녀가 보인다. 경비행기의 소음으로 인해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모두가 헤드폰을 끼우고 있어 그녀가 바로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떤 용기가 났는지 대뜸 두 일행에게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승낙을 했으며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봤고 짧게나마 나의 존재를 알렸다.




미국에는 친한 친구 두 명이 20대에 이민을 가서 살고 있다. 모두 자리를 잡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각각 서부의 LA, 동부의 워싱턴에 살고 있었는데 이번에 내가 미국으로 여행을 간다는 소식에 고맙게도 두 친구는 어렵게 시간을 맞춰 우리 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오기로 했다. 이에 여행사에 양해를 구하고 9일간의 일정 중, 마지막 이틀은  나만 식구들과 떨어져 LA의 친구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 친구들이 이틀 뒤면 온다. 내가 친구들과 합류하여 LA로 가게 된다면 실질적으로 그녀에 대해서 뭔가를 알아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은 유타주의 한 호텔에서 묵는다. 아무것도 없이 바위와 모래사막으로 둘러싸인 곳에 호화스러운 호텔만 덩그러니 있다. 호텔 밖으로는 나가봐야 아무것도 없으며 호텔 내에서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구조다. 호텔 로비 옆에 꽤 큰 카지노가 보인다. 익숙한 발걸음으로 들어가 본다. 관광객들로 북적북적하다. 군데군데 우리 패키지 투어의 일행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멀리 블랙잭 테이블에 우리 패키지 투어의 가이드가 앉아 게임을 하고 있다. 1달러 정도만 팁으로 주면 무한 제공되는 맥주를 마시며 꽤나 익숙한 듯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반갑게 가이드 옆에 의자 하나 여유를 두고 앉았다. 가이드가 무척이다 나를 반긴다. 가이드와는 담배를 피우다가 여러 차례 대화를 해서 서로 익숙하다.


“OO씨도 블랙잭 하세요?” 가이드가 묻는다.


사실 나는 테이블 게임보다는 슬롯머신을 즐긴다. 그렇다고 블랙잭을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번 여행에 달러를 많이 환전해 온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게임을 할 목적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해가며 게임을 했다.


그렇게 게임을 하면서 편히 대화를 하다 보니 우리 대화 내용은 점점 매우 한국적으로 이어진다. 서로의 호구조사를 시작으로 개인의 인생사까지 일사천리로 대화는 이어진다. 게임에서 이기면 기뻐서 말하고 지면 기분이 나빠져서 말한다. 대화 내용만 들어 보면 마치 10년 이상을 알고 지낸 사이처럼 가까운 사람들만 하는 대화가 오고 간다. 가이드는 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았으며 이미 결혼을 했지만 지금은 이혼한 상태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여자는 피하고 저러한 여자를 만나야 한다는 말로 아낌없이 충고까지 해준다. 나 또한 술도 마셨고 흥분이 고조된 블랙잭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이런 분위기에 취해 마음에 두고 있던 그녀를 언급하며 그런 타입이 좋다고 얘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가이드는 그 사람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술술 말한다. 역시나 내가 느낀 비슷한 느낌을 가이드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동행하고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몰라 좀 거슬린다고 하자, 남동생이니 신경 쓰지 말고 맘에 있으면 남자답게 다가가 보라고 한다.


순간 약간은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면서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그 사람의 이름도 모르고 제대로 대화도 해보지 않은 주제에 마치 이미 사귀기로 한 것 같은 혼자만의 발칙한 기분에 들떠 흥분됐다. 내가 져서 딜러가 내가 베팅한 100불을 가져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늘 그랜드캐니언 상공에서 느꼈던 나름의 깨달음에 가이드가 알려준 정보까지 합치면 비록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나라고 해도 아직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마음에 두고 있던 그녀에게 다가가 사심 가득한 말을 건넨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사실이 기뻤다.   

가이드는 먼저 들어갔지만 나는 자리를 옮겨 슬롯머신 기계 앞에 멍하게 앉아 기계를 돌리며 그녀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생각해 본다. 끊임없이 내 돈을 먹기만 하고 뱉지는 않는 기계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공황장애의 증상이 언제 올지 몰라 고민만 하던 내가 이런 생산적이고 건강한 고민을 하고 있다. 가슴이 벅차다. 보통의 나, 원래의 나로 돌아온 느낌이다. 그렇다. 이런 모습이 원래 나다. 그렇지만 친구들이 내일 저녁에 온다. 서둘러야겠다. 나를 어필할 수 있는 시간은 내일밖에 없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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