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녀 일기>
D-4,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하얀 속살 뽐내며 무럭무럭 자라는, 기술도 파마기도 없는 총체적 난국인 머리카락을 오늘은 기필코 해결해야만 한다. 아빠와 나는 결전의 용사처럼 비장하게 날을 잡았다.
오늘은 복남 씨 미용실 가는 날.
아빠는 펌을 시키려 했으나, 복남 씨는 역시나 염색을 택했다. 내 걸음으로는 10분 거리의 미용실이지만 복남 씨에겐 마라톤급 도전이므로 안전을 위해 차를 타고 갔다. 가운을 입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자 서 있을 수 없는 복남 씨는 내 손목을 잡은 손을 하나씩 놓으며 휘청거리며 입었다. 미용실 의자에 앉는 것도 고됐다. 발받침 때문에 딛을 곳이 없어 복남 씨, 나, 헤어디자이너 셋이 서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양손으로 내 팔을 더 세게 움켜쥐던 복남 씨는 의자에 각도를 맞춰 몸을 내던지는 듯 앉는 바람에 의자가 크게 덜컹거렸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친절한 목소리에도 복남 씨는 고개를 숙이고 앞머리만 매만졌다. 대신 답했다.
“이건 제가 자른 거예요. 이 스타일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이것밖에 못 해서요... 예쁘게 부탁드려요.”
전문가의 가위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야매미용사는 멀리서 염탐했지만 오랜 시간 연마한 가위질은 눈대중으로 흉내낼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염색약까지 샤샤샥.
복남 씨가 랩을 감고 있을 때 작은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큰이모가 안 좋으셔. 곡기를 못 넘긴대. 이러다 큰일 치르겠다. 가봐야 하지 않겠니.” 아빠도 저번에 심상치 않은 전화를 받았다며 나온 김에 가보자고 했다.
이모 집에 도착했다. 한껏 고와진 복남 씨는 엉덩이에 힘을 주며 몸을 뒤로 뺐다. “집에 가고 싶어.” 이렇게 가까이 사는데 안 와보면 되냐고(이모 집은 도보 3분 남짓 거리), 후회는 남기지 말자고 아빠와 내가 복남 씨를 끌었다.
넷째 이모는 서울에 옹기종기 사는 넷째, 다섯째, 여섯째 중 가장 큰 언니였기에 우리는 모두 큰이모라고 불렀다. 지방에 사는 이모들은 10살에 처음 만났을 정도로 교류가 없어서 그때까지 나는 이모가 둘인 줄만 알고 살았다. 게다가 큰이모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았었기에 이모집이 내겐 곧 외가였다.
복남 씨가 집에 들어오니 큰이모는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리고 맞아주었다. 금세 그렁그렁해져서 연신 소매로 눈을 찍어내며 복남 씨 손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기운이 없다. 갈 때가 되았는지, 먹고 자픈 것도 없고…. 그래도 니가 이렇게 와줘서, 내가 차암 좋다. 아이고, 머리도 하고, 예쁘다, 잘했다. 아나, 이거 한번 먹어 봐라.”
기운 없다던 사람이 파리한 입술로 쉬지 않고 말했다.
이모와 복남 씨가 나고 자란 세상에서는 아들이 귀해서 딸인 나는 그들이 의도하고 겨누지 않은 칼에도 찔려 아팠다. 그렇지만 우리 집이 빨간 딱지가 붙자 단칸방을 내어 주고, 나중에 집을 살 때에 3,000만 원을 조건 없이 기꺼이 내어준, 나를 찌른 말들도 사실은 다 복남 씨를 위한 말이었던, 복남 씨에게는 엄마 같은 큰이모.
복남 씨는 그런 큰이모 앞에서도 고개를 떨구고 연신 앞머리를 만지다가 나를 보며 눈으로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 아이가 올 때가 됐다는 핑계를 대고 이모 집을 서둘러 나왔다.
그렇게 가을 외출을 서둘러 끝내고 돌아왔다. 하루에 두 탕이나 뛴 복남 씨는 좀 쉬겠다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 포옥 누웠다.
기대한 가을은 아니었다.
적어도 가을에는 동네 산책을 할 수 있으리라, 산책이 힘들면 드라이브라도 하겠지, 내내 가을을 기다린 마음은 그러했다. 그러나 오늘, 같이 낙엽 하나 줍지는 못했고, 하늘 한점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가?
오랜만에 복남 씨가 외출을 했다. 미용실에 갔고, 큰이모 집에도 다녀왔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기대와는 달랐으나 충분한, 우연히 챙긴
한 조각의 가을이었다.
(2023.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