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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Jan 02. 2023

아침보다는 저녁의 향수가 좋아

연말의 잔향을 느끼며

매일 아침 정확히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선다. 배차 시간이 칼 같은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시간은 대략 10분 정도. 짧은 시간이지만 그 사이에 익숙한 얼굴의 이웃 서너 명을 마주치곤 한다. 가끔은 타임 루프에 갇혀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사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들 때도 있다. 이 시간에 출퇴근을 한지도 벌써 3년이 되었으니 이쯤 되면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어째 그 흔한 눈인사 한 번 해본 적이 없이 내적 친밀감만 쌓여가고 있는 상태다.


항상 마주치는 서너 명의 이웃들 중에는 전동 킥보드를 타고 내 옆을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향수에 대해 생각하던 중 자연스럽게 출근길부터 떠올린 원인이 바로 여기 있다. 그는 찰나의 순간에도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강력한 향수 내음을 남기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지나간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서 재채기를 두어 번 한다. 이 광경은 마치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어이없이 웃긴 면이 있다.


갓 뿌린 향수는 아침의 바람처럼 코끝 찡하도록 싱싱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하지만 나는 향수를 뿌린 후 시간이 좀 지나 그 존재감이 한 풀 꺾였을 때, 마치 오래 입은 잠옷처럼 편안하고 익숙하게 남아있는 잔향을 더욱 좋아한다. 하루종일 다양한 공간과 사람과 음식의 냄새가 덕지덕지 묻어 어깨가 조금은 무거워진 저녁에도, 나만 알아챌 수 있는 은은한 잔향을 맡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옷을 갈아입어도 코끝에 남아 있는 잔향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속수무책으로 지친 날에는 바로 그런 사소한 것들에 기대어 하루를 마무리할 힘을 내보는 것이다.




체온이 섞여 녹진해진 잔향은 12월의 달력을 떠올리게 한다. 아침의 향수보다 저녁의 향수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는 1월보다는 12월을 선호한다. 연말은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차분한 예고편 같다. 당분간은 그 어떤 것도 시작할 필요가 없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아 묘하게 안심이 된다. 12월에 해야 할 일이라고는 오로지 내년에 대한 약간의 기대뿐이다. 나는 역시 역동적인 시작보다는 요란 떨지 않는 끝이 더 좋다.


연말이다. 올해 11월은 유례없이 따뜻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뒤늦게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기다렸기에 더욱 반가운 겨울을 한껏 즐기려고 노력하며,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살았던 사람들과 송년을 핑계로 한 번 더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술을 나눠 마시거나 케이크 위의 초를 불며 2022년의 잔향을 즐긴다. 원래는 송구영신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여상히 넘기는 편이었는데, 언젠가부터는 연말 특유의 활기찬 분위기가 사랑스러워 여러모로 질척거리게 된다. 별로 맛은 없지만 예쁜 케이크, 전구를 엉성하게 달아도 너그럽게 반짝여주는 트리, 올 한 해도 고마웠고 내년에도 복 많이 받으라는 상투적인 안부 인사들 모두 그저 반갑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익숙한 인연들을 놓아준 올해의 잔향은 내게 좀 더 새롭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향수를 바꾸기도 했다. 지난 몇 년간 뚝심 있게 고집하던 향수가 올해는 유난히 묵직하고 버겁게 느껴져서 사용하기가 힘들었다. 퇴근길에 들른 가게에서 ‘산뜻한 여름 향’이라고 광고하는 향수를 홀린 듯이 산 뒤로 여름 내내 반 이상이나 썼다. 여태까지 줄곧 계절과 향수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지중해의 얕은 바다가 떠오르는 시원한 민트색 병에 담긴 과일과 풀 향을 온몸에 두르고 나니 조금 시원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올 해는 그런 해였다. 무거움과 진지함은 조금 떨쳐 버리고 좀 더 산뜻하고 가벼워지고 싶었던 해. 몇 년 만에 바꿔본 향수 덕분이었을까? 올 해의 잔향은 지난번보다 조금 더 개운한 것도 같다.


거의 비어 가는 향수병을 기울여보며 내년에는 어떤 향을 입을지 고민해 본다. 문득 다음 주 출근길에도 어김없이 마주칠, 내게는 강력한 향수 냄새와 재채기로만 기억되는 이웃을 떠올린다. 음, 아무래도 내년 역시 코끝 찡하게 선명한 향수보다는 가벼운 향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얼마 남지 않은 12월의 날들을 헤아린다. 1월이 되면 어김없이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에 전전긍긍하게 될 것이다. 내 욕심이 과하게 뿌린 향수처럼 누군가를 머리 아프게 만들지만 않기를 바라며, 내년은 또 어떤 잔향으로 기억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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