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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Feb 27. 2023

기분 나쁘다고 반차 쓸 수는 없잖아요

어른스러운 우울에 관하여

요즘 많이 외롭다는 건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지만 평일 내내 온 힘을 다해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외롭다는 이유로 갑자기 오후반차를 던지고 울면서 공원으로 뛰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많은 문제가 여기서 시작되곤 한다. 예를 들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매번 모임에 불참하는 친구의 사과 메시지, 혹은 시간이 없어서 집안일을 못 했다는 동거인의 볼멘소리 같은 것들은 문제 상황이 시작되기에 아주 적절한 문장이다. 핑계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는 건 아주 애매모호한 표현이라 주의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정말 설거지를 하는 데 필요한 시간 10분조차 낼 수가 없을까? 그보다는 하루종일 시달리다 겨우 귀가했는데 설거지까지 신경 쓸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생활을 위해 바쁘게 살다 보면 실제로 절대 시간이 부족할 때도 많지만, 마음속 에너지가 너무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 버리는 게 더 큰 문제다. 연료가 바닥나서 위험 수준까지 도달하면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24초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것은 바로 감정을 느끼는 일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에 치여 정작 지금 무얼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뒷전이 되기 쉽다. 특히 나처럼 융통성 없는 인간이 위험하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계획된 일은 반드시 해야 하고, 해치워야 할 집안일이 눈에 보이면 쉬지 못하고, 만나자는 약속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유형. 심지어 타고난 에너지 자체가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기 때문에 내년, 내후년에 쓸 에너지까지 긁어모아 흥청망청 소진해 버리기 쉽다. 그게 아주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은 몇 년간 처절한 번아웃을 겪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요즘은 일정표를 수시로 체크하고 하루종일 침대에 딱 붙어 은둔할 수 있는 날을 반드시 남겨 둔다. 말하자면 깊은 바다로 잠수하는 중간중간에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날만큼은 외로움, 슬픔, 공허함, 설렘, 분노, 좌절 등 모든 감정이 나를 휩쓸고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특히 외로움이 하루를 지배하게 내버려 둘 필요가 있었다. 요즘 많이 외롭다는 건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지만 평일 내내 온 힘을 다해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외롭다는 이유로 갑자기 오후반차를 던지고 울면서 공원으로 뛰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루종일 방에 불을 켜지도 않고 침대에 파묻혀 마음껏 외로워했다. 감정이 눈에 보이는 거였다면 아마 침대 밖까지 흘러넘쳐 발목 위로 찰랑거렸을 것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밤 열한 시. 충분히 숨을 보충한 것 같아 다시 주섬주섬 잠수할 채비를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한 후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샤워를 한 뒤 가습기를 켰다. 지금 잘 준비를 하지 않으면 내일 엄청 피곤하겠지. 미팅도 두 개나 있는데... 뭐 그런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면서. 남은 우울을 잘라내는 느낌의 퍼포먼스로 어느새 길어버린 손톱을 잘라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른의 우울에는 한도가 있다, 잠들기 직전에 문득 떠올렸던 문장이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고, 모두의 우주는 자기 위주로만 돌아간다. 잔인한 사실이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우주 전체가 멈춰 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우주는 캄캄하고 조용하고 무서울 것이다. 더욱 잔인한 건 그 무서움까지 오롯이 본인이 견뎌내야 한다는 점이리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우주를 스스로의 힘으로 평생 굴려야 하는 의무를 갖고 태어났다. 그러니 항상 시간도 없고 피곤할 수밖에. 자연의 법칙에 따라 우주는 점점 팽창하는데, 그 우주의 주인인 나는 여전히 작고 서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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