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 4
몽골에 오기 전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몽골에 한 달간 있으면서 심심하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여행 목적으로 타국에 한 달 이상 체류해 본 적은 없는지라 적당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냥 쉴 거라고 얼버무릴 뿐이었다. '여행', '한 달 살기', 이런 거창한 말을 달고 떠나오기는 했지만 내가 하고자 했던 건 그저 사는 것이었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한국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친구와 인사를 나누며 하루를 시작하고 늦잠을 자면 거실에 나와 멍을 때리다 시작한다. 주중에는 헐레벌떡 짐을 챙겨 나서는 친구를 배웅하고 요가를 하고, 주말에는 각자 헬스장으로, 요가 매트 앞으로 향한다. 시간이 맞으면 점심을 함께 만들어 먹거나 외식을 한다. 혹은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나는 울란바토르 시내를 누빈다. 서울에서의 삶과 다르지 않게 카페를 찾아다닌다.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다가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다. 틈틈이 일기를 쓴다. 카페 근처에 맛집이나 관광지가 있으면 요기를 하고 구경하러 간다. 컨디션이 좋으면 이곳저곳 쏘다니며 사진을 찍고 피곤해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조금씩 자주 장을 본다. 요리를 해서 저녁을 먹거나 포장해 온 것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늦은 저녁이 되면 고단해하는 친구가 돌아온다. 나는 낮에 설거지와 빨래를 하고 친구는 밤에 한다.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여전히 쌩쌩하면 함께 저녁 산책을 나가거나 맥주를 한 잔 하러 나간다. 고단한 날엔 먼저 잠에 든다. 대부분은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다 불을 끈다.
예진에게 추천받은 카페 BITES에 가려고 채비를 하고 나선 날이었다. 하늘이 쾌청하길래 얇은 긴팔에 후드집업을 걸치고 현관을 나섰다. 1층 문을 여는 순간 세찬 바람이 훅 다가왔다. 머리칼이 얼굴로 들이치는 순간 이대로 나가면 얼어 죽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집에 들어가 누빔재킷을 걸치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목도리를 둘렀다. 분명 어젠 얇은 바람막이 안에 반팔을 입었던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건 따뜻한 옷들을 있는 대로 껴입는 것뿐이었다. 어찌 됐든 다이내믹 몽골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카페는 수흐바타르 광장 너머로 걸어가야 했다. 빌딩 사이로 흐르는 세찬 바람을 뚫고 걸었다. 한껏 웅크리다가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쨍쨍한 하늘 아래 작은 눈발이 날렸다. 광장 북쪽 국회의사당 건물 위 몽골 국기가 힘차게 펄럭였다.
사진을 재빨리 찍고 카페로 들어갔다. 식물이 덮인 천장과 커다란 통창이 주는 넓고 환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내부의 온기가 다가왔다. 옷깃에 묻은 추위를 금방 털어내고는 겉옷을 훌훌 벗었다.
BLT 베이글과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곤 바깥의 부산함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눈발이 흩날리다 다시 해가 비치기를 반복했다. 몇 분 단위로 여름과 겨울을 오갔다. 베이글과 커피는 평범했지만 맛있었다. (나중에 몽골 현지식을 먹어보고 느낀 거지만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는 정말 맛있는 음식이다......) 일기장에 변화무쌍한 날씨를 기록했다. 금세 노곤노곤해졌다.
집에 돌아와서는 소파에서 낮잠을 한숨 잤다. 저녁엔 약속이 있었다. 일찍 퇴근한 예진과 그의 동료 A와 함께 동대문 포차에 갔다. 상호가 동대문 포차였는데 건물 안에 여러 개의 가게가 있었다. 포차도 있고 노래방도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쪽은 왕돌구이라고 적힌 고깃집이었다.
이질감 없는 불판과 불판 위로 달린 환풍구, 메뉴판까지 한국 가게 하나를 통째로 옮겨온 듯했다. 예진과 A는 운동 메이트인데 오랜만에 치팅을 한다며 삼겹살에 소주를 시켰다. A는 이 식당에만 참이슬이 아닌 진로가 있다면서 잔뜩 신나 있었다. 대화하다가 물어보지 않았다면 나는 A가 몽골인인 줄 몰랐을 것이다. 살얼음 냉면까지 시켜서 완벽한 한 상이 차려졌다. 긴 몽골 생활에 한식을 그리워하던 예진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외국에서 먹는 한식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 꽉 찬 행복이었다.
중심가에 있는 카페로 와서 브라우니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한바탕 수다를 떨고 집 오는 길에 맥주와 간식도 샀다. 급격한 배부름에 치솟는 당스파이크와 함께 졸음이 몰려와 먹지 못했지만 몸과 마음이 든든하게 잠에 들었다.
다시 아침이 온다. 잠깐 멍을 때린다. 가볍게 요가를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강의를 듣고 카메라를 만지작거린다. 아침으로 챙겨 먹는 바나나나 샐러드가 질릴 때면 스킵하고 점심쯤 음식을 포장해 온다. 마음이 내키면 새로운 장소를 찾아간다.
그렇게 단조롭고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당황하곤 하지만 그것도 몽골이겠거니 생각하며 적응하고 있다. 돈 내고 여유 부리는 게 전부인 여행은 해본 적 없다. 며칠 안 되었지만 베짱이형 여행이 체질인 것 같다. 아무래도 한 달간 대단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