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뭐야 무서워...
요즘 VR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부쩍 많아지면서 소소하게 인기를 끌고 있다.묘하게 생긴 기계를 머리에 쓰고 한 손에는 컨트롤러를 들거나 기계에 앉아 가상현실의 세계 속에 들어가는 일이 과거 오락실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가 하나 늘어나서 데이트 코스로도 아주 인기가 높은 것 같다.
VR에 관심은 많았으나 초기의 어설프고 별다른 재미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을 한번 체험해서일까? 그때와 지금의 VR이 크게 달라보이진 않아서 그냥 지나치면서 크게 관심을 갖진 않았다. 그러던 중 어쩌다가 TV를 통해 고소공포체험을 VR로 하던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생기던 참에 마침 그런 VR 체험 기회가 있어서 망설임 없이 해봤다.
고소공포증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높은 곳에 있으면 남들보다 유난히 긴장을 많이 하고 손에 땀이 고일 정도로 높은 곳에 대한 공포가 있는 나이기에 살짝 긴장은 됐지만 가상의 공간에서 얼마나 현실감이 있겠나 하는 생각에 도전을 해 본 것이다. 그래서 결과는?
5분도 안 돼서 중도 포기를 했습니다... 아까운 8천원... ㅠㅠ
체험 후 난 입에 침이 마르도록 VR에 대한 칭찬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이게 정말 무서운데... 아니 대체 왜 무서워야 하는지 이해는 되지 않지만 정말 조금 오버하자면 '떨어져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고소공포체험 VR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우선 간략하게 설명해 보자면, 위 사진처럼 VR 컨트롤러와 헤드마운트를 쓰고 빌딩의 고층에서 온 몸으로 높은 곳에 서있는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모든 장치를 장착하면 화면에 웬 엘리베이터가 등장한다. 엘리베이터를 여는 것부터 체험이 시작된다.
엘리베이터를 열고 상승 버튼을 누르면 엘리베이터가 올라간다. 이땐 크게 무서운 건 없었다. 다만 정말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면 문이 열리고 앞에는 좁고 긴 널판지가 'ㄱ'자 모양으로 설치돼 있다. 이 널판지 밑에는 바로 까마득한 바닥이다. 그리고 널판지의 끝에는 계란 바구니가 있고 계란 바구니의 계란을 하나씩 가져와 엘리베이터에 있는 바구니에 옮겨 담는 것이 체험의 끝이다.
바구니를 향해 널판지에 한발짝 다가가는 순간 이제 난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극도의 공포감이 몰려온다. 오로지 좁은 널판지 하나가 내 생명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한발을 올린 순간 '아... 이거 뭔가 잘못됐다... 난 큰일났다...'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종말하고 나만 살아남아 그 누구의 도움도 못 받는 상황에서 오로지 높은 건물에 허름한 널판지 하나에 덩그러니 떨어져 갈곳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용기를 내서 길의 끝에 가서 바구니에 있는 계란을 하나 드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런데 뒤로 돌아서 다시 가야하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뒤로 돌아서 가는 것은 커녕 뒤로 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분명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까지 무서워 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이해한다. 나도 체험하기 전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어쨌든, 결국 난 중도 포기를 선언했다. 생각해 보니 참 웃긴게 내가 포기한다고 했을 때 체험을 도와주는 직원분이 "제 손을 잡으세요"라고 했는데 난 그 손을 꽉 잡고 뒤로 돌을 수 있었다. 주변에서는 구경하는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분명 보는 사람들은 저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을 것이다.
진땀 나는 체험을 마치고 난 이게 왜 무서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대체 왜 무서운 것이지??
내가 생각하기에 이게 무서운 게 말이 안 되는 이유는 대략 이렇다.
1. 내가 체험을 하는 곳은 그냥 실내고 이동하는 범위도 고작 반경 2미터도 안 된다. 그 어떤 위험 요소도 주변에 있을 수 없다.
2.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결국 컴퓨터그래픽의 세계였다. 실사도 아니고 리얼리티가 가미된 그런 화면도 아닌 조금은 조잡한 수준의 그래픽일 뿐이다. 그런데 왜 현실보다 더 현실보다 느껴진 걸까?
3. 체험을 하기 전 이미 주변의 모습과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심지어 체험을 하면서도 내가 그 공간의 어디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왜 고층의 꼭대기에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일까? 내가 실제 밟고 있는 널판지 역시 가상현실 속의 널판지는 아닌 것을 분명 알고 있다. 근데 왜? 왜왜? 무서운거야?
처음 느껴본 VR 체험은 사실 충격이었다. 이렇게까지 실감나는 상황을 만들어준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전문가는 아니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왜 공포를 느끼게 됐는지 생각을 해보자면,
우선 가상현실의 공간에서 내가 보는 가상의 공간에 대한 한계가 없다. 고개를 들어 위를 봐도 좌우로 한바퀴 돌면서 봐도 어느 하나 공백없이 빽빽하게 가상의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픽의 수준을 떠나서 나는 어쨌든 조잡한 그래픽의 공간이더라도 그 공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가상현실이 시작되면서 이미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현실의 공간은 사라지게 된다. 그냥 내가 있는 곳이 현실이 된다.
사실 이게 내가 두려움을 느낀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가상현실의 가장 큰 무기는 '몰입'과 '집중'일 것이다. 단 몇 초만에 이전의 경험을 잊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몰입감을 준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려는 사고 따위는 사라지게 된다. VR을 통해 인간이란 그리고 우리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뇌'라는 것에는 허점이 있고 허술함이 있다는 것을 말 그대로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마지막으로 최근 기획에 대한 공부와 관심을 내가 가져서일까? 우리의 눈으로 보는 영역에서의 다양한 체험과 경험을 넘어서서 VR에서 사용자가 경험하는 것들을 누군가는 설계해 나가고 있을 것인데 그 분야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기게 됐다. 가상 현실 속에서의 공간을 넘어 사람의 심리적인 영역까지 파고들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획'의 영역일 것이다.
중도 포기한 VR 체험... 마치고 돌아서면서 한 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그냥 한번 뛰어내려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물론 당시에는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그냥 떨어지면 죽는다는 생각만이 있었다. 과연 그 가상현실에서는 떨어질 때의 모습은 어떻게 표현을 하게 했을까? 다음에 기회와 용기가 생긴다면 꼭 체험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