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가치 늙어가는 중입니다
저만치 엄마가 보인다. 동네 산책 중이시다. 걸음이 어찌나 느린지, 금방 따라잡을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걸음이 날랬는데 팔에 마비(?)가 온 뒤론 걸음이 더디다. 느린 걸음은 노화의 징후라는데 걱정이다.
엄마의 뒷모습이 낯설다. 원래 키가 저리 작았나? 뽀글 머리만 아니면 영락없는 초등생이다. 저 몸으로 자식 셋을 먹여 살렸으니 그 무게가 상당했을 것이다. 이제는 취직도, 취집도 못하고 늙어가는 나 때문에 아예 땅속으로 꺼져 버릴지도 모른다.
얼굴엔 기미가 주름보다 더 많다. 선크림 좀 바르고 다니랬더니. 아님 모자라도 쓰던가. 옛날엔 집 앞 시장엘 가도 꼭 화장하고 나갔던 사람인데.
난 그런 엄마가 싫었다. 그렇게 거울 들여다볼 시간에 내 얼굴 좀 봐달라고, 내 얼굴의 그늘 좀 알아채 달라고 간절히 바랬다. 당신은 엄마이기전에 여자이고 싶었던 사람이다.
40년 산 동네 뭐 볼 게 있다고 저리 두리번거리는지 손만 앞으로 내밀면 완전 미어캣이다. 혼자 걷는 게 심심한 모양이다. 이 참에 같이 걸어볼까? 근데 하루에 열 마디도 안 하는데 어떻게 같이 걷지? 엄마도 불편해 하지 않을까?
직장에 다니는 언니는 주말마다 엄마랑 산책을 한다. 엄마가 혼자 다니는 게 걱정되는 모양이다. 아주 효녀다. 학교 다닐 땐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인기가 많았다. 부모가 뒷받침만 제대로 했더라면 뭐가 돼도 됐을 것이다. 지금도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곤 있지만 언니를 볼 때마다 내가 더 억울하다. 부모만 잘 만났어도 좀 더 멋진 사람이 됐을텐데. 그래도 언니는 부모 원망 안 한다. 나랑 이래저래 딴 판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언니한테 잘해야 한다. 나중에 죽어서라도 꿈에 나타나 로또 1등 당첨번호라도 알려줘야 한다.
엄마를 만나기 전 1미터 전. 그래, 더 늦기 전에 같이 걷자. 걷다가 걷다가 걷다 보면 할 말도 생기겠지.
"어엄...."
아, 근데 산책한단 사람 신발이 저게 뭐야. 발목부츠아니냐. 굽이 4센티는 돼 보이는데 저 나이에 저 높이면 킬힐이다. 킬힐! 뭐야, 아직도 여자이고 싶은 거야?
"엄마! 신발이 그게 뭐야? 그거 신고 다니다가 발목이라도 삐끗하면 어쩌려고 그래! 엄마 나이 생각은 안 해? 도대체 생각이 있어, 없어! 지난번에 언니가 사준 운동화 있잖아!
갑작스런 내 등장에 엄마 눈이 커졌다가 이내 옆으로 째진다. '이년이 갑자기 나타나서 왜 또 지랄이야!' 하는 표정이다. 그러게, 그냥 옆길로 샐 걸, 억지로 정붙이려다 괜히 화만 돋궜다. 정말이지 우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