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혼자 늙어가는 중입니다
○○지역아동센터에 미진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5학년 여자아이로 엄마가 베트남인이었다. 그 때문인지 미진이는 늘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폭염이 기승을 부려도, 단체게임을 하느라 땀을 뻘뻘 흘려도 절대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심지어 간식이나 급식을 먹을 때도 그랬다. 음식을 먹을 때만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가 얼른 다시 썼다. 그마저도 고개를 푹 숙여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위생상, 보기 좋지 않았다. 딱 한번 마스크를 벗은 미진이와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아야 다문화가정 아이 티가 났다.
어느 날 횡단보도 앞에서 엄마와 있는 미진이를 봤다. 미진이는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난 멀찍이 떨어져서 못 본 척했다. 단기알바(?)라 미진이 엄마를 본 적도 없어서 미진이가 먼저 아는 척하면 그때 인사를 하자 생각했다. 미진이 내 쪽으로 몸을 틀다 나를 발견했다. 나는 계속 못 본 척했다. 미진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이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신호가 바뀌었다. 나는 계속 정면만 응시한 채 길을 건넜다. 내 시야에 미진의 엄마가 들어왔다. 그녀는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며 머라 머라 했다. 상대방도 머라 머라 했다. 베트남어였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미진이는 보이지 않았다. 길을 안 건넌 것 같았다. 아니 신호가 바뀌자마자 번개처럼 건너간 것도 같다.
그 다음날 센터에서 미진이는 나를 스스럼없이 대했다. 내가 어제 자기를 못 봤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미진이가 숨기고 싶은 건 뭐였을까? 엄마 그 자체였을까, 아니면 엄마의 국적이었을까?
20년 전, 친구와 영화를 보기 위해 약속장소로 가던 길이었다. 지하철을 갈아타려고 환승통로를 지나가는데 벤치에 대자로 누워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깜짝 놀랐다. 식은땀이 났다. 누가 봐도 술에 취해 누워있는 꼴이었다. 모른 척하고 지나갔다. 뒤에서 친구가 오고 있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맘이 편치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혀를 차고 지나갈 것 같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기 전에 빨리 깨워 집에 보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주위를 살피며 "아빠! 아빠!"하고 불렀다. 그가 실눈을 떴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여기서 뭐 해! 술 취했어!"
"어지러워서 누워 있는 거야..."
분명 술 취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술냄새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믿기 싫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니, 안 마셨어도 술에 취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빨리 집에 가!"
'창피하니까!', 란 말은 속으로 삼켰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다. 영화 보는 내내 맘은 불편했다. 열차 타는 것까진 지켜볼걸...
두 달 후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그날 그는 술에 취했던 게 아니라 뇌경색 전조증상이었다. 그의 말을 믿지 않은 댓가는 혹독했다. 나는 2년여간 그의 간병인으로 살았다.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지났지만 난 지금도 나의 아버지를 들키고 싶지 않다. 그가 얼마나 무능하고 얼마나 심각한 알코올중독자였는지를. 그런 인간이 내 아버지였단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