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그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한국에 살 때 평생을 아파트에서 살았다. 물론 태어난 곳은 주택이었다고 내 기억에는 없는 증거 사진들이 남아있긴 하다. 어린 시절 초반의 아파트들은 지금 기억으론 그리 높지 않았다. 빌라나 다름없는 높이의 5층짜리 아파트였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하는 누리끼리한 외벽에 단출하게 쓰여 있던 숫자 33. 잠실에 있던 그 아파트 단지가 만약 1동부터 시작했다면 30개 이상이 모여 있던 큰 단지였음에 틀림없다.
고양시가 ‘고양군’이던 국민학생 시절에는 5층짜리 주공아파트에 살았다. 입구 하나에 1-2호, 3-4호 이런 식으로 한 층에 두 가구가 현관문을 마주 보고 있었다. 당연히 엘리베이터는 없다. 마주 보고 있는 현관문은 거의 늘상 활짝 열려, 문에 달린 지지대를 내려놓고 앞집, 윗집, 아랫집을 자유로이 들락날락하며 내 집도 네 집, 네 집도 내 집 하며, 지금 생각하면 완벽한 ‘공동육아’를 하던 시절이다. 아이들 나이가 비슷했고 부모들도 그랬던 것 같다. 그나마 내가 나이가 많은 편이라 나는 아마도 충실한 보모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매일 배달되던 ‘황인용 아저씨의 일일공부’를 본떠서 아빠가 회사에서 가져다주시던 이면지에 동네 아이들을 위한 일일공부를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선생 노릇을 좋아했나 보다.
아파트 옆으로는 논이 펼쳐져 있어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이 생겼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컵라면도 팔고 떡볶이와 어묵 국물도 있었다. 시골에 살면서 스케이트는 기본으로 탔다는 것이 뭔가 언발란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크리스마스에 새 하얀 피겨스케이트를 선물로 받고 가슴이 터질 듯 행복했던 기억. 그 새하얀 스케이트에 까맣게 한 줄로 흠집이 났을 때 너무나 속상하고, 또 혼날까 봐 매번 스케이트를 타고 오면 꽁꽁 숨겨놓았던 기억이 난다.
아파트에 살았지만 나의 초등시절 아파트는 응팔에 나오는 주택 골목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아이들은 줄줄이 같은 학교를 가고, 하교 후엔 따로 약속을 잡을 것도 없이 동네 공터나 놀이터에서 누구라도 한 명은 만나 놀았다. 여름이면 아파트 건물이 만드는 각진 그늘을 따라 옮겨 다니며 땅따먹기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했다. 놀다가 입이 심심하면 아이들은 자기 집 창문을 향해 목청껏 외쳤다.
“엄마 백 원 마안!”
귀신같이 자기 아이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엄마들은 베란다 샷시를 열고 백 원을 던져준다. 종이에 싸서 던지기도 하고 땅에 던져 튕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풀숲에 들어가 한참을 찾아야 한다. 나는 한 번도 돈을 달라 소리치지는 못하고 친구가 받은 백 원으로 50원짜리 쭈쭈바를 두 개 사면 얻어먹곤 했다. 간혹 같이 놀아주던 동네 꼬마들의 엄마들이 같이 사 먹으라며 오백 원이나 던져주실 때도 있었다. 그러면 참 융통성도 없는 나는 50원짜리 쭈쭈바를 머릿수대로 사고 거스름돈은 아이 주머니에 넣어 돌려보냈다. 뭐라도 하나 조금 더 비싼 걸 먹을 수 있는 기회인데도 말이다.
아파트 옆 논과 냇가, 그리고 숲에서 우리는 올챙이도 잡고 개구리도 잡고 나비와 잠자리도 잡았다. 어느 날엔 참존 화장품 광고에나 나올법한 엄지손톱만 한 반질반질한 청개구리를 잡았다. 너무 귀엽고 예뻐서 소중하게 나무 상자에 넣어 집에 들고 왔는데 밤 사이에 누가 열었는지 제가 열고 나왔는지 다음 날 상자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과연 그 예쁜 개구리가 어디에 숨어있을지 한 걱정을 했다. 우리 집엔 개구리가 먹을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왜 그런지 오히려 기겁을 하게 되었지만 그때는 개구리도 잡자리도 손으로 덥석덥석 잘 잡았다. 나뭇가지 끝에 앉아있는 잠자리 곁으로 숨을 참고 살금살금 다가가 검지와 중지를 가위 날처럼 열었다가 재빨리 싹둑하는 모션으로 손가락을 닫아 잠자리 날개를 포개어 잡았다. 배가 누런 된장잠자리, 빨간 고추잠자리, 그리고 크기가 더 크고 날개 끝이 갈색으로 물들어 있던 태극잠자리까지 손으로, 그리고 잠자리채로 참 많이도 잡았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잠자리 통에는 투명 슬라이딩 창이 있어서 조심스레 한 손으로 창을 밀어 열고 내 두 손가락 아래 버둥대는 잠자리를 얼른 집어넣고는 창을 닫는다. 잠자리 통이 없는 아이들은 그냥 비닐봉지에 잡아넣기도 했다. 한참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 보면 어느새 잠자리통이 이런저런 잠자리들로 가득해졌다. 그 잠자리들을 어떻게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저녁이 되어 ‘밥 먹어’ 하는 엄마 목소리가 들리면 하나, 둘 채집통을 개방하여 방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연과 더불어, 생명들과 더불어 살다 보면 피할 수 없이 목격하고 겪는 것이 아마도 죽음일 거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사마귀가 정말 저승사자 같기도 하고 악마 같기도 한 모습으로 유난히도 빨간 배를 가진 예쁜 고추잠자리를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사마귀도 먹고살아야겠지만 된장잠자리도 아니고 예쁜 고추잠자리를 먹고 있는 모습에 움찔했다. 그렇다고 사마귀를 쫓아버리거나 이미 가망 없어 보이는 잠자리를 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짖꿎은 아이들에겐 곤충이 유희적 희생양이 될 때도 있었지만 나는 살아있는 생명을 내 손으로 어찌한다는 것은 그냥 옳지 않다는 믿음이 있었다. 귀에 딱지가 앉게 늘 잔소리를 들었거나 종교 지도자로부터 설교를 들어서가 아니다. 그냥 그것은 해가 지면 달이 떠오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믿음이었다.
그날도 나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잠자리채로 잠자리를 잡았다. 나는 기술이 꽤 좋은 편이어서 잠자리를 잘 잡았는데, 나무 끝에 앉은 잠자리를 잠자리채의 그물 안에 들어오도록 조준을 하고 잠자리채의 둥근 입구를 땅으로 내리꽂거나 혹은 잠자리를 그물 안에 들어가게 한 뒤에 현란한 공중돌기로 잠자리의 혼을 쏙 빼놓고 나서야 잠자리채를 땅에 착지시키기도 했다.
날개의 네 귀퉁이가 갈색으로 칠해진 태극잠자리였다. 내 키에 조금 간당간당하지만 살짝 뛰어오르면 가능할 것 같았다. 살금살금 다가가 목표물을 확인한 후 배구에서 스매싱을 하듯이 살짝 뛰어올라 잠자리채로 잠자리를 낚아채고 땅에 내리꽂았다. 예스. 잡았다. 역시 난 잘 잡아. 이미 퍼드덕 거리는 잠자리들이 가득한 내 통에다 추가할 태극 잠자리를 꺼내려 잠자리채로 다가섰다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잠자리채의 둥근 테가 내 스매싱으로 인해 가속도가 붙어 세차게 땅을 내리쳤는데 그만 잠자리의 머리가 걸렸던 것이다. 내 눈앞에는 잠자리채 안에 있는 잠자리의 몸과 밖에 있는 떨어져 나간 머리가 보였다. 잠시 숨이 턱 막혀 몸 둘 바를 모르다가 잠자리채 꼬랑지 부분을 잡고 빨래 털듯이 털어내고는 사건 현장을 빠져나왔다.
누가 신고할 것도 아닌데 숨 가쁘게 범죄현장을 벗어났다. 아마도 그것이 내 잠자리 잡기의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파트에 살았지만 내 어린 시절은 시골스러운 놀이들로 가득하다. 나중에 사 차선 도로로 뻥 뚫린 그 논과 산 덕분에 나는 계절을 온몸으로 살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슬픔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어쩌면 그때 그렇게 자연과 연결된 삶을 살았던 기억이 지금 여기 땅을 밟고 온갖 생물들과 공생하고 있는 영국땅을 불러왔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