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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날 Jan 07. 2023

블라인드앱을 열어보지 않기로 했다

어쩌다 인사담당자

2023년,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해가 떠올랐다.

물론 연도를 표시하는 숫자와 내 나이의 숫자가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스스로에게 잘 해보자는 마법같은 주문을 다시 한번 걸어볼 만 했다.  


# 오늘도 좋은 날

나는 오랫동안 '좋은날'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다. 마치 나 자신에게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하고 주문을 거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21년차 직장인이 되었다. 첫 직장에서 여전히 인사담당자로 일을 하면서 꾸준함과 성실함이 나의 가장 큰 강점이라는 것을, 변화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 만난 인사담당자라는 옷은 나에게 잘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축제 같은 날들을, 또 가끔은 우울한 날들을 마주하게 했다.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 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중에서


 직장에서 한 업무를 오랜시간 해 오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꽤 오랜 시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구성원들이 일하고 싶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 같이 고민하고, 제안하고, 시도하기를 반복하면서 그들 역시 나처럼 지푸라기 같은 사명감의 끈은 여전히 붙잡아두고 싶었을게다. 직장인들의 대나무숲이라는 블라인드앱 덕분에, 여러 환경의 변화들 덕분에, 우리가 가진 사명감의 끈은 어느새 금방 끊어질 것 같은 지푸라기처럼 변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 너무 잘 안다. 처음엔 화가 났고, 이런 우리가 안쓰러웠다. 함께 일하는 선배로써 그들의 부담을 덜어주지 못해 마음 속에 벽돌을 올려놓은 것 만큼의 부채가 늘 나를 따라다녔다. 남들이 욕해도 나는 잘 안다. 우리가 얼마나 애쓰며 버티고 있는지를.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애써주고 있어서.


# 블라인드앱을 열어보지 않기로 했다.

더운 여름 날, 밀폐된 회의실에서 에어컨이 고장났다. 숨 쉬기가 어려웠다. 더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내내 반복되는 증상에 매일 퇴근하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매년 극성수기 여름휴가에는 유럽 가족여행을 다닐때였다. 대구에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인천공항까지 비행기를 잘 탔고, 프라하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숨이 잘 안쉬어진다는 걸 알아차렸다. 비행기를 탑승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119 소견이 있었지만, 버텨보기로 했다. 그리고 더위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게이트 앞에서 결국 119의 산소호흡기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공황장애를 경험했다. 인사담당자는 연예인이 겪는 악플의 무게를 감당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진심 블라인드앱을 만든 사람을 쫓아가 따져묻고 싶었고, 악플을 다는 직원을 고소하고 싶었다. 나는 블라인드앱을 열어보지 않기로 했다


# 2023년의 터널

2022년, 20년의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다. 블라인드앱 따위 거들떠볼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일하는 환경의 변화는 일상의 리듬 깨트리는 경험을 하게 했고, 그 버팀의 시간은 쉽지 않았다. 책을 읽고 쓰는 여유를 가질 수 없었고, 나의 마음은 건조한 날씨만큼이나 메말라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꾸준함과 성실함이 벼랑 끝에서도 결국은 버텨내게 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일상을 다시 찾아야 했다. 좋은날이 되기 위해 책을 읽어야 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와 같이 잘 버텨내기 위해 바른 길잡이가 되어야 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해야 할 역할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나를 다독여본다. 잘하지 못했던 후회의 시간은 반성으로, 잘해야 한다는 다짐의 시간은 실천으로 만들어가야 다. 2023년, 새로운 환경을 마주해야 하는 사실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지 기대하고 싶지 않지만, 잘 안다. 어제보다 어려운 하루하루를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걸. 나는 지금 2023년의 터널, 그 입구에 서 있다.  


소행성은 공룡을 포함해 지구 생명체 일부를 몇 차례나 멸종시켰지만, 그래도 지구에는 흐드러지게 생명이 꽃피었다. 위기를 이겨낸 우리의 마음속에도 언젠가는 봄꽃이 간질간질 피어나리라. 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중에서


책을 읽고 독서일기를 쓰면서 나와 마주한다. 버팀의 시간과 조각들이 모여 더 단단해진 좋은날을 만나보 싶다. 2023년에도 여전히 인사담당자로 보낼 한 해를 응원해다. 봄꽂이 간질간질 피어나길 기대보는 오늘도 좋은날이다.


20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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